204화
태건은 당장 로프에 매달려 있어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 그림은 자유로웠다.
3D 입체화면처럼 이리저리 돌려보며 공략점을 찾았다.
-1층.
“아니고.”
휙.
-창문.
“아니야.”
휙.
…….
그러던 태건이 한 곳에서 그림을 멈췄다.
그건 헬리콥터 레펠로 접근할 때 얼핏 봤던 승강기 예상 지점이었다.
정확히 그 옆에 존재해야할 비상구, 그리고 창문이다.
‘……확인부터.’
타아악!
태건은 두 다리로 쇠창살을 박차 옆으로 이동했다.
그나마 평평한 벽이라 로프를 기준으로 시계추처럼 움직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부웅.
옆으로 옮겨온 장소는 벽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비상구의 층계 창문이 존재했다.
조금 전까지 솟구친 검은 연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장소다.
휘리잉.
이리저리 돌풍이 불어 이젠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곳 층계 창문은 소방법상 꾸밈이 허락되지 않는 장소다.
이 건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몸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 크기인 창문이 떡하니 존재했다.
터엉!
“찾았어. 들어갈 수 있어!”
희망은 태건에게도 필요했었다.
요구조자를 살릴 수 있는 희망이었다.
그게 바로 이 창문이다.
끝끝내 찾았다.
파앙!
인정사정없이 손도끼를 휘둘러 한 번에 부숴버렸다.
드디어 출입구를 만들었다.
뭉게뭉게.
정체된 검은 연기들이 몰려나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터덕.
태건은 대번에 창문 안으로 들어가며 무전했다.
“막내라텔, 출입구 확보. 전 단원 승강기 방향으로!”
차분한 목소리로 알렸다.
그러나 듣는 단원들은 침착할 수가 없던 모양이다.
-띠릭. 정말? 간다. 캡이 간다. 지금 출입구 만나러 간다!
-띠릭. 타아앗, 우리 강태건이. 넌 역시 라텔다운 남자였어. 이 멋진 자식아!
-띠릭. 이래 놓고 에이스가 아니란 건 뭔데!
-띠릭. 어이, 라면. 오늘 이름값 제대로 하네.
터더덕!
오광휘부터 이지성까지 무전소리와 함께 속속들이 로프의 반동을 이용해 나타났다.
그런데 그들이 끝이 아니다.
아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무전소리가 덧붙여 들려왔다.
-띠릭. 뚫었어? 그럼 신병 받아라!
유중헌의 목소리다.
설마?
휙!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봤다.
한강 방향에서 라텔의 헬리콥터가 다시 날아오고 있었다.
조금 전 단원들이 사용했던 로프에 완전 무장한 소방관들이 똑같이 매달려 있었다.
로프가 5개라 후보대원들도 다섯 명이었다.
터덕!
“어떻게……. 끄응!”
먼저 내부에 들어선 태건이 오광휘 단장의 손을 끌어당기며 의구심을 표했다.
오광휘 단장이 계단에 내려서며 무전했다.
-띠릭, 걔들이 왜 거기 매달려 있어?
-띠릭. 수상택시 타고 오는 걸 발견하고 픽업해 왔습니다. 왜 거깄는지 까진 대화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 모르겠습니다.
-띠릭. 이쪽도 더 대화 나눌 시간 없고, 잔챙이들은 알아서 따라붙으라 그래!
오광휘 단장이 다급히 외쳤다.
이제 희망의 포문을 열었는데 지체할 시간 따윈 없었다.
그건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휙휙.
한 명씩 내부로 들어와 로프에서 자유가 됐다.
지금을 기다렸던 오광휘 단장이 곧바로 인원 분배에 들어갔다.
“핸썸, 까칠. 7층 달려, 후보대원 도착하면 바로 붙일 테니까 그렇게 알아!”
“접수!”
“갑니다.”
터더덩!
고수현과 이지성이 순식간에 계단을 박차고 올랐다.
오광휘 단장은 바로 이어서 말했다.
“나랑, 빅, 라면은 일단 6층. 나머지 도착하면 다시 찢어져!”
“화끈하게 출발합시다!”
황대산이 불을 뿜어내듯 소리치며 달려갔다.
쾅쾅쾅.
육중한 장비가방까지 메고 있어 더욱 무게감이 느껴지는 발소리였다.
오광휘 단장이 뒤따르려던 찰나였다.
턱.
태건이 바로 팔을 붙들며 말했다.
“단장님은 후보대원들 안내하시고 내려가십시오.”
“……아씨, 또 밀어내냐? 이제 들어왔는데!”
“그럼 한 분 모시고 내려가세요. 먼저 갑니다.”
타다닥.
할 말을 마친 태건은 곧장 전속력으로 달렸다.
원래 단장의 위치는 현장지휘다.
지금까진 출동인원이 한정적이라 우선 현장에 함께 진입했다. 그러나 후보대원들이 투입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오광휘 단장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순식간에 계단을 뛰어 6층에 들어섰다.
벌컥.
비상구 문을 열자 연기가 먼저 밀려오고, 그 다음 곳곳에 자리 잡은 불길이 보였다.
“쯧, 하이에나 같은 새끼들.”
화륵화륵.
태건은 타오르는 불길을 사정없이 격하시켰다.
왜 불길이 여기까지 타고 올라왔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승강기 통로, 아니면 내부 계단, 그것도 아니면 천장 내 통로.
불길이 침투할 곳은 상상외로 많은 탓이다.
솨아악.
스프링클러가 작동 중이라 복도 바닥이 축축했다.
어느 정도 불길 확산을 저지시켜줬을 거다.
그런데 중간중간 고장이 나서 멈춰 있는 스프링클러들이 있었다.
그 허점을 불이 그냥 놔둘리 없었다.
화르륵.
세를 키우는 불길 모두 고장난 스프링클러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렇게 태건은 복도 상황을 한 눈에 파악했다.
먼저 올라간 황대산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승강기 옆 객실 문이 열려 있었다.
그때였다.
-띠릭. 빅라텔, 601호. 투숙객 2명 발견, 남녀. 정신 또렷, 깨진 창문으로 빨대 내밀어 숨쉬고 있었음.
시작부터 좋은 소식이었다.
곧바로 7층의 첫 번째 객실 소식이 들려왔다.
-띠릭. 까칠라텔, 709호, 투숙객 일가족 5명. 스위트룸. 연기 유입 적어 건강 양호. 탈출로 확보 바람.
그 소식도 좋은 소식이라 다행이었다.
무전이 울리는 사이 태건은 어느 불길 쪽을 직시했다.
까딱거린 다리의 주인이 있는 객실 방향이다.
구조 순서는 곧 응급 순서다.
미미한 반응을 보인 요구조자를 먼저 구조하는 게 정석이다.
“요구조자님, 우리 인사 좀 하시죠!”
파바박!
태건은 그대로 복도 끝으로 달렸다.
앞에 불길이 허리 높이까지 넘실거렸다.
일부는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화르륵.
다가오면 삼켜버리겠단 위협을 가득 내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태건에겐 지금 저런 불길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사람이 죽어 가는 상황이다.
불길이 막는다고 멈춰 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툭. 휙.
방화복에 달린 소화볼 하나를 뜯어 던졌다. 일정 거리를 날아간 소화볼은 그대로 공중에서 폭발했다.
퍼어엉!
폭발음과 동시에 사방으로 소화분말이 흩날렸다.
그리고 태건을 위협하던 불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척척.
“급해 죽겠는데.”
태건은 흩날리는 소화분말도 개의치 않고 그대로 내달렸다.
누군가 쓰러진 객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유일하게 반쯤 열린 객실 문이 보인 탓이다.
그쪽으로 연기가 흘러들어가는 흐름이 읽혔다. 밖에서 깬 창문 틈으로 공기가 순환하는 게 분명했다.
‘저기야!’
태건은 눈빛을 굳히며 단언했다.
문 근처에 스프링클러가 작동 중이다.
연기 유입이 많지 않았던 객실 내부 상황에 빗대어보면 확실했다.
단숨에 다가간 태건은 그대로 객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벌컥!
“라텔입니다……. 엇!”
내부를 본 순간 태건이 크게 멈칫했다.
쓰러진 사람이 무려 세 명이었다.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
우선 침대 근처에 쓰러진 남자는 50대로 추측됐다. 반팔 티셔츠에 트렁크 사각 속옷을 입고 있었다.
다른 남녀는 30대로 추측 되며, 옷을 모두 입고 있고 신발까지 신고 있었다. 욕실 문 근처에 남자가 여자를 보호하는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너무도 행색이 다른 중년인과 남녀는 남남으로 추측됐다.
또 한 가지 더 알아챈 부분이 있었다.
‘두 사람이 불길을 피해 뛰어올라와 문을 두드렸고, 이 아저씨가 열어준 건가?’
태건은 그 모든 걸 애써 생각한 게 아니었다.
객실 내부의 상황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떠오른 추측이었다.
당장 이들 관계야 아무래도 좋았다.
생존의 여부 확인이 우선이었다.
파박!
태건이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특수소방단 라텔입니다. 소방관입니다.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
세 남녀 모두 대답이 없었다.
“흡……. 음!”
태건의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가려던 그때였다.
세 남녀 모두 미미한 반응을 보였다.
꿈틀, 꿈틀.
각자의 손가락이나 팔, 다리가 자그맣게 움직였다.
태건은 그걸 본 순간 가슴이 확 메어 왔다.
-생존 신호.
자신이 살아있음을 필사적으로 알리는 신호가 분명했다.
반응이 있단 걸 본 순간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차자작!
부리나케 객실 내부로 들어간 태건은 가까이 있는 30대 남녀에게 우선 다가갔다.
슬라이딩 하듯 자세를 낮추면서 방화장갑을 벗었다.
사삭.
객실 내부에 연기가 뿌옇게 차 있을 뿐이다.
불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맨손이 된 태건은 보조호흡기를 꺼냈다. 이어서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30대 여성의 코와 입을 덮었다.
“숨 쉬어요. 숨!”
처억.
독려와 동시에 여성의 목에 손을 댔다.
-퉁, 퉁퉁.
약해진 맥박이 느껴졌다.
그런데 공기를 흡입하는 힘이 너무 적었다.
“후……. 흐…….”
독한 연기를 상당히 많이 들이켰을 때 반응이다.
“……실례합니다.”
휙, 꾸욱!
여성을 바로 눕히며 재빨리 흉부압박을 실시했다.
갈비뼈 가운데가 푹 꺼지듯이 눌렸다. 그 강한 압박에 30대 여성의 폐에 정체된 오염된 공기가 한순간 밀려나왔다.
……툭.
“크허어어, 컥커겈거컥!”
막힌 숨이 터져 나오며 괴로워했다.
눈물과 콧물은 기본이었다.
그런 여성은 못 쉬었던 숨을 몰아서 쉬듯 거친 숨이 계속 이어졌다.
“커허어억, 커컥, 허억, 컥컥.”
“됐어요, 됐어. 그대로 숨 쉬어요. 괜찮아요. 숨 쉬어요!”
태건은 호흡을 계속 권하며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