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곧 라텔 헬기가 현장에 도착하는 장면이 재생됐다.
이미 지난 순간이라 지켜보는 태건의 표정은 덤덤했다.
“그랬지.”
그때 불타는 미즈호텔 화면에 엉뚱한 소리가 입혀져 들려왔다.
-띠릭. 막내라텔, 출입구 확보. 전 단원 승강기 방향으로!
-띠릭. 정말? 간다. 캡이 간다. 지금 출입구 만나러 간다!
태건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이거 우리 무전 소리잖아.”
그에 확신을 더해주듯 다음 무전소리가 바로 이어졌다.
-띠릭. 빅라텔, 601호. 투숙객 2명 발견, 남녀…….
-띠릭. 까칠라텔, 709호, 투숙객 일가족 5명…….
황대산과 이지성이 처음 요구조자들을 발견한 그때 무전 내용이다.
정말 자신들끼리 오간 무전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태건의 혼란이 가득했다.
이건 지금 이렇게 혼자 들을 내용이 아니었다.
태건은 재빨리 대기소로 뛰어갔다.
벌컥!
“선배들, 이것 좀 같이 봐야겠습니다!”
들어서자마자 태건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그런데 반응이 싸늘했다.
여기저기 흩어진 단원들이 흘겨보며 퉁명하게 쏘아붙였다.
“흥, 뭐 여친의 애교 사진이라도 보내셨나?”
“난 니네가 잘 지내든지 말든지 관심 없그덩!”
“이젠 아주 대놓고 자랑질이네. 옆구리 시린 사람 서러워 살겠냐.”
방금 태건이 놀린데 대한 토라짐이 계속 진행 중이었다.
태건은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
“일단 모여요. 같이 봐야 한다니까요!”
“너 혼자 보시라니까요.”
단원들은 툴툴거릴 뿐,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싸람들이.’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귀를 닫은 모습이 답답하기만 했다.
태건은 그냥 소리를 잔뜩 높여 재생했다.
방금 황대산과 이지성의 무전 보고가 한 번 더 울렸다.
-띠릭. 빅라텔, 601호. 투숙객 2명 발견, 남녀…….
-띠릭. 까칠라텔, 709호, 투숙객 일가족 5명…….
그 소리에 다들 멈칫했다.
어디서도 다시 울릴 수가 없는 내용인 탓이다.
오광휘 단장이 일순간 심각해진 얼굴로 태건에게 물었다.
“너 현장에서도 녹음 했었냐?”
“휴대폰을 헬기에 두고 내렸잖습니까.”
“그럼 그건 뭐야?”
“와서 보세요. 다 같이 봐야합니다.”
태건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제야 모두 이상함을 느끼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흐음.”
“쓰읍, 뭐지.”
처적.
이내 모두가 휴대폰을 두고 빙 둘러 앉았다.
꾹.
태건은 처음부터 다시 영상 재생을 시작했다.
영상은 수많은 촬영본들을 짜깁기해 하나로 만든 거였다.
그 속에 현장에서 오간 무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노주민 후보대원이 촬영한 현장 영상이 더해져 생생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현장에 함께 있단 착각이 들 정도였다.
잠시 후.
영상 재생이 모두 끝났다.
그런데 대기소엔 정적만이 흘렀다.
“…….”
다들 뭐라고 말을 하기가 애매한 표정들이었다.
태건도 가만히 생각하다 툭 하고 떠오른 걸 내뱉었다.
“다들 안다면 본부장님도 아시는 걸까요?”
“……강태건, 일어나. 본부장님께 같이 가자.”
벌떡.
오광휘 단장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제안했다.
태건은 멀뚱히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왜요?”
“네가 대면보고 하기로 했잖아.”
“그거 아까…….”
태건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턱.
오광휘 단장은 태건의 팔을 낚아채 당겼다.
“일단 가. 입씨름할 시간 없어.”
“알겠습니다. 알았다고요. 간다니까요.”
“다들 대기하고 있어. 심심하면 애들 불러다가 굴리든가.”
“노주민 대원에게 촬영은 허락했던 거니까 일단 뭐라고 하지 마세요.”
태건이 덧붙여 말하자 오광휘 단장이 더욱 바짝 당겼다.
“넌 시끄럽고 따라오기나 해.”
“팔 떨어진다니까요.”
투덜투덜.
태건은 삐쭉거리며 서두르는 오광휘 단장과 같이 움직였다.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순식간에 본부장실에 도착했다.
이젠 해가 진 저녁이었지만 박규영 본부장은 아직 퇴근 전이었다.
기다렸단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본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오 단장과 강 대원 표정을 보니 짐작이 가. 일단 앉지.”
박규영 본부장은 차분하게 권했다.
곧 오광휘 단장과 태건은 응접소파에 자리했다.
티테이블엔 커피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상석에 박규영 본부장이 위치해 있었다.
탈칵.
박규영 본부장이 커피잔을 내렸다.
“…….”
고요한 분위기가 상당히 가라앉아 있었다.
태건은 슬쩍 분위기를 파악하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대면보고……. 시작할까요?”
엉뚱한 질문이었다.
박규영 본부장의 심각한 입꼬리 끝이 살짝 올라갔다.
“훗. 내가 너무 심각했나?”
“현장에서 심각하기도 벅찬데, 일상에선 좀 편안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래. 현장에서 그 고생을 했는데, 외적인 상황에선 여유를 갖는 게 좋지.”
그리고 그도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표정이 달라진 만큼 박규영 본부장의 분위기가 조금 부드럽게 변했다.
오광휘 단장은 덩달아 긴장하고 있었다.
이제야 틈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우선 알고 계셨는지가 궁금합니다.”
“무전 생방송을 나도 들었어.”
“네? 그럼 저희가 현장에 있을 때일 텐데, 복귀할 때 아무 말씀도 없으셔서 몰랐습니다.”
오광휘 단장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박규영 본부장은 개의치 않고 수더분하게 답했다.
“자네들이 쉬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그렇군요.”
“그리고 그땐 나도 정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어.”
나지막이 덧붙여 말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태건이 차분히 질문했다.
“그럼 지금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파악이 된 겁니까?”
“그게 참……. 혹시 아마추어 무선 통신사라고 아나?”
“HAM 말씀이시죠. 제 친구가 관심이 있어서 기본적인 개념은 알고 있습니다.”
태건이 답하자 오광휘 단장이 힐끗 쳐다봤다.
“뭔데?”
“간단히 말하면, 개인 기지국을 개설해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과 무선 통신을 운영하는 겁니다.”
“무선 통신 놀이?”
“그 개념이 훨씬 간단하네요.”
확실한 개념은 아니지만 짧게 설명하기엔 적합했다.
끄덕.
오광휘 단장도 어느 정도 이해한 거 같았다.
스윽.
고개를 돌려 박규영 본부장에게 물었다.
“그래서 먹지도 못하는 햄이 뭘 어쨌단 겁니까.”
날카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래서인지 박규영 본부장의 대답이 한층 편안하게 흘러나왔다.
“그 HAM을 취미로 하던 어떤 청년이 집에서 심심풀이로 주파수를 돌리다가 우연히 우리 무전을 감청 한 거 같아.”
“감청은 불법이 아니죠. 계획적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면요.”
“계획적인 건 아니지, 다만 충동적인 결정으로 방송에 송출한 건 문제가 되지만 말이야.”
박규영 본부장이 쓰게 말했다.
그런 그에게 태건이 덧붙여 물었다.
“도청한 청년은 어떻게 됐습니까?”
“전기통신법 위반으로 긴급체포 됐어. 그에 대한 기사도 꽤 이슈가 됐지.”
“그게 이슈거리가 됩니까?”
“한 번 봐봐.”
박규영 본부장이 대놓고 권했다.
기다리겠다는 걸 커피잔을 드는 행동으로 대신 표현했다.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갸웃거리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오래 검색할 것도 없었다.
포털사이트 메인 기사에 떡하니 떠올라 있었다.
-소방무전 도청 용의자 긴급체포. 그리고 그의 외침.
외쳐?
“뭘 외쳤단 거야.”
툭.
첨부된 영상을 바로 재생했다.
영상의 장소는 서울지방검찰청 앞이었다.
손을 앞으로 모은 20대 중후반의 멀쑥한 청년이 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혼자였다.
좌우에 수사관들이 포박하던 기존 영상들과 달랐다.
용의자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있었다.
심지어 발언까지 했다.
-저는 위법을 저질렀고 그에 대한 법의 심판을 달게 받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 이런 저를 보고 다른 누군가 법을 어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찰칵찰칵.
앞에 가득한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그리고 어떤 기자가 큰 목소리로 물어왔다.
-잘못된 걸 알고 생방송으로 송출했단 건데, 그럼 가중처벌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면?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 방송을 송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다들 소방관분들이 고생한다고 하는데, 어떤 고생을 하는지 아십니까? 그분들이 현장에서, 그 처절한 사투를…….
용의자의 대답은 그 뒤로 좀 더 이어졌다.
그 내용은 방금 언급한 말의 덧붙임들이었다.
영상을 보는 태건의 표정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이거 참.’
자신들의 노고를 알리고자 벌인 일이라고 한다.
그걸 나무라기엔 뭐한 사회적인 이슈로 자리한 거 같았다.
박규영 본부장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이유에 대해 이제 감이 잡혔다.
곧 태건은 휴대폰을 내렸다.
턱.
이어서 박규영 본부장에게 물었다.
“이제 이 용의자 아니, 청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적합한 법의 심판을 받겠지.”
“그런데 이렇게 인터뷰를 할 줄은 몰랐습니다.”
“검찰 측에서 특별히 인터뷰를 허락한 건 용의자의 간청 때문이었다고 하더군.”
박규영 본부장의 대답에 태건이 쓰게 답했다.
“자신의 잘못을 공표하고 모방범죄를 예방하겠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죠.”
“아니. 소방관들의 노고를 꼭 알리고 싶다고 했던 모양이야.”
“흐음.”
태건은 무거운 탄성을 쏟아냈다.
그런 침묵이 감돌자 오광휘 단장이 물었다.
“이 일로 어떤 파장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SNS나 커뮤니티에 소방관들에게 도움을 받은 일화를 올리거나, 가족들이 사연을 올리고 있어.”
“그 정도면 큰 파장이라고 하긴 애매하지 않습니까.”
“그 사연이 벌써 수만 건이 넘었다면 얘기가 다르지.”
“아!”
오광휘 단장은 이제 조금 감이 오는 듯했다.
여론이란 달리 말해 국민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런 여론이 지금 소방관들에게 긍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단 의미였다.
듣고 있던 태건이 쓰게 말했다.
“이 청년한테 뭐라고 하기가 애매하네요.”
“그렇지만 위법을 묵과할 순 없는 거 아닌가.”
“아무리그래도 이렇게 이목을 집중시킨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태건의 말에 다른 뉘앙스가 풍기자 박규영 본부장이 물었다.
“강 단원은 뭔가 다른 의견이 있나?”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만 이런 경우라면 그 형벌이 과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 단장의 의견은 어떻지?”
스윽.
박규영 본부장이 고개 돌려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