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222)화 (221/320)

222화

그때 태건이 박규영 본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은 좀 있는 겁니까?”

“넉넉하진 않지만 당장 내일은 아니야.”

“그렇군요.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 하는 게 좋겠습니다.”

태건이 흘린 말에 박규영 본부장이 나지막이 물었다.

“무슨 방법이 있나?”

“찾아봐야죠.”

태건은 심심한 미소로 답했다.

잠시 후.

태건과 오광휘 단장이 회의실을 나섰다.

찌리릿.

태건을 향한 오광휘 단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계속 됐다.

끝내 못 참겠던지 으르렁거렸다.

“뭔 방법을 찾아. 우리가 가서 배 까뒤집고 시위라도 해?”

“그것도 방법이네요. 아, 출동대기 해야 하니까 어렵겠습니다.”

“나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 여기서 우리가 입 씻으면 머리 검은 짐승 되는 거야. 그게 어떻게 사람 새끼냐.”

이렇게 모른 척하긴 정말 싫은 모양이었다.

태건은 그런 오광휘 단장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전 이런 단장님이 참 멋진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헛소리 말고!”

“다른 건 몰라도 머리 검은 짐승은 저도 사양입니다.”

두루뭉술한 말을 흘린 태건이 방향을 돌렸다.

휙.

다른 쪽으로 향하자 뒤에서 오광휘 단장의 따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진짜 계속 삐딱하게 굴래!”

“방법 찾아본다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건물 밖으로 나갔다.

태건은 그 길로 야외 휴게소로 향했다.

이내 도착한 태건의 귀엔 휴대폰이 걸려 있었다.

“기자님, 무탈하십니까?”

부드럽게 또박또박 안부 인사를 건넸다.

곧 휴대폰에서 이강찬 기자의 넉살 좋은 화답이 들려왔다.

“뭔 출동만 하시면 후폭풍이 거센지. 덕분에 데스크에 안 쪼이고 지내고 있습니다.”

“취잿거리가 많으십니까?”

“사연이 없어서 취재를 못합니까. 너무 많아서 할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이강찬 기자의 목소리가 너무도 밝았다.

돌연 태건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좋은 대화는 좀 미루고, 부탁 하나 드리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얼마든지.”

“무전 도청 건에 대한 겁니다.”

태건은 축약해 말했다.

이강찬 기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소스가 됐는지 목소리가 확 가라앉았다.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얼마 안 걸릴 겁니다.”

뚝.

대답과 동시에 전화가 끊어졌다.

“…….”

태건은 휴대폰만 내리며 그대로 자리해 있었다.

그런 태건의 좌우에 하얀 강아지들이 쫄랑쫄랑 다가왔다.

“…….”

생각에 빠진 태건은 강아지들의 등장을 알지 못했다.

그런 태건의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이순이와 삼식이는 힐끗 눈치를 봤다.

분위기가 안 좋은 걸 직감한 모양이었다.

-할짝.

-헥헥.

이순이가 의자에 올라와 태건의 볼을 핥았다.

동시에 삼식이는 태건의 다리를 비볐다.

상념에 빠져 있던 태건은 멈칫하며 강아지들의 등장을 알아챘다.

“뭐야, 애교 부리는 거야?”

스르륵.

굳은 표정이 풀어지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기분을 헤아려주는 반려동물이 너무도 예뻐 보였다.

슥슥.

태건은 양손으로 이순이와 삼식이를 매만졌다.

“…….”

그 상태로 다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처음과 같은 딱딱하고 날카로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한결 차분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런 태건의 변화를 이순이와 삼식이는 바로 알아챘다.

-헥헥.

까딱까딱

기분 좋은 숨소리와 함께 꼬리 끝만 가볍게 움직였다.

그렇게 5분 정도 흐른 뒤였다.

띠리릭.

이강찬 기자의 전화가 걸려왔다.

태건은 상념을 흩트리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기자님.”

“그쪽이 너무 조용해서 상황이 이런 줄 몰랐습니다.”

“그쪽 입장은 뭐랍니까.”

“위험한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는 거 같습니다.”

그 대답에 태건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건 좀 아니다 싶죠. 법도 결국은 사람이 만든 건데 어느 정도 정상참작은 돼야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이 소문나면 어떤 변호사가 나타날지도 모르죠.”

태건이 하는 말을 이강찬 기자가 찰떡 같이 알아들었다.

“이런 문제 키우는 거야 인터넷 기사 한 방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니, 내가 직접 증명해 보이도록 하죠. 바빠서 이만.”

뚝.

이강찬 기자가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바로 행동으로 옮기려는 모양이다.

그 순간 태건이 진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곱씹어 정리한 걸 실천에 옮길 시간이다.

“밑밥은 다 깔았으니까 전화해야지.”

스윽.

태건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마이애미 로펌 전화번호를 찾았다.

일전에는 묵혀뒀지만 이번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헬로…….”

태건이 영어로 길게 통화를 이어갔다.

한 시간 후.

태건의 통화 상대가 바뀌어 있었다.

이번엔 유창한 한국어 아니, 토종 한국어가 들려왔다.

“……변호사 변경 신청 끝났고, 지금 서정민 씨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연락받은 지 얼마 안 되셨을 텐데요.”

“저희 법무법인 일처리가 좀 시원시원합니다. 그보다 강태건 단원이 마이애미 로펌과 인연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변호사의 질문 속에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태건은 객쩍은 미소로 말했다.

“미국에 잠시 머무를 때 인연이 닿았습니다. 그런데…….”

“당부하신대로 절대 비밀 보장하겠습니다. 아니, 이미 판을 다 짜 놓으셔서 말할 일도 없을 겁니다.”

“반응이 쏠쏠합니까?”

“이강찬 기자가 크게 때려서 빠르게 이슈 되고 있습니다. 덕분에 저희가 법률자원봉사란 명목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습니다.”

변호사의 대답에 감탄이 서려 있었다.

태건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답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별말씀을요. 그보다 부탁드린 부분은…….”

“탄원서 말씀이시죠. 전원 작성하는 대로 취합해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예의를 갖춰 인사한 태건은 곧 휴대폰을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인터넷을 검색했다.

이강찬 기자의 기사가 포털사이트 메인에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

-소방무전을 공개한 그는 범죄자. 하지만…….

제목에 여운을 두어 클릭을 유도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타이틀만큼 누적 조회 수가 엄청났다.

기사 내용은 역시나 서정민과 관련되어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리며, 그 속에 부당함을 스리슬쩍 끼워 넣은 이강찬 기자의 글빨이 잘 녹아 있었다.

“아주 달필이네, 달필이야.”

그 이슈거리에 편승한 후속 기사들도 족족 올라왔다.

-사람 먼저? 법 먼저?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

-범죄는 그릇된 선택, 그러나 누군가는 무전을 듣고 울었다.

-국민들이 뿔났다, 알 권리를 전면에 내세워.

제목만 봐도 여론의 흐름이 확실히 읽혔다.

너무 급격히 들끓는 반응에 태건이 살짝 움츠러들 정도였다.

“난 전화 한 통 했을 뿐인데.”

자신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이렇게 거대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팀장들이 회의 때 민감하게 따졌던 게 이해가 될 정도였다.

잠시 후.

태건은 한결 편한 마음으로 대기소 문을 열었다.

끼익.

안으로 들어가자 단원들의 따가운 눈총부터 받아야 했다.

“쟤가 두고 보자고 했다면서요?”

“얼마나 정확하게 예언을 하셨는지, 기자들이 발 벗고 나섰잖아.”

“변호사 전격 교체도 됐다지요. 타이밍이 진짜 기가 막히네요.”

“그걸 자기가 한 거라고 뻥치면서 콧대 세우지나 말라고 하십시오.”

험담을 아주 대놓고 했다.

태건은 강도 높은 비난에 살짝 기분이 상했다.

‘확 밝혀?’

그러기엔 너무 많은 과정을 설명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이 일에 소방관이 뒷공작을 했다는 게 밝혀지면 안 된다.

이강찬 기자도 전혀 몰랐다.

도로아미타불이 아니라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끄응.”

앓느니 죽지.

그냥 인내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태건은 애써 미소를 띠며 단원들에게 다가갔다.

“저…….”

한 마디 말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흥!”

휙, 휙.

약속이라도 한 듯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꾹꾹 인내한 태건의 인내심이 결국 터져버렸다.

“진짜 너무들 하시네요.”

“…….”

“빨리 탄원서나 써요!”

버럭.

태건이 대기소가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오광휘 단장이 뚱한 목소리로 반발했다.

“뭔 탄원서!”

“바뀐 법무법인에 전화해보니까 우리 탄원서가 있으면 도움이 된답니다. 그러니까 빨리 써서 보내자고요!”

“……정말이야?”

멈칫한 오광휘 단장이 흘겨보며 물었다.

태건은 휴대폰을 들이밀며 인상을 푹푹 찌푸렸다.

“통화목록 보여드려요? 그걸 봐야 직성이 풀리겠습니까?”

“전화 한 통 가지고 겁나 유세 떠네.”

“푸우우. 제가 무려 한 시간 동안 입 아프게 떠들고, 도울 거 없냐고 사정한 썰을 또 한 시간 동안 풀어요?”

태건이 사나운 기세로 억울함을 토로했다.

방금 대답은 철저히 준비된 답변이었다.

훅 화가 치솟아 약간 꾸며서 말했지만 분명 존재하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성질을 내자 단원들이 경계를 풀었다.

“직접 전화해서 알아봤다면 뭐…….”

“그럼 진작 그렇게 말을 했어야지.”

“쟤는 뭘 저렇게 혼자 북치고 장구치냐. 사람 민망하게.”

몰아친 게 멋쩍었는지 괜히 툴툴거렸다.

그 속엔 오광휘 단장도 있었다.

“큼, 크흐흠. 진작 시간을 좀 달라고 하든가.”

“제가 분명히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뭐, 뭣들하냐. 얼른 탄원서 쓰자.”

본전도 못 찾은 오광휘 단장은 얼른 저만치 멀어져 갔다.

태건은 좌식 책상을 하나 붙들고 자리를 잡았다.

대기소를 널찍한 마루 형식으로 바꾸며 책상을 치운 탓이다.

터억.

좌식 책상을 단단히 위치시킨 태건은 하얀 종이에 탄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서정민 씨의 행동은 분명 범죄이나, 무전 감청 중 어떠한 간섭도 없었고…….

사각사각.

차분한 손길로 한 글자씩 정성껏 써 내려갔다.

결코 무죄를 주장하지 않았다.

법이 허락하는 내에서 최대한의 선처를 바랄 뿐이었다.

‘잘못은 했으니까.’

그건 묵과할 수 없었다.

탄원서가 작성되는 건 이곳 대기소만이 아니었다.

행정팀, 지원팀, 그리고 본부장실까지.

특수소방단 전역에서 작성됐다.

그렇게 작성된 탄원서는 그날 밤에 법무법인 직원에게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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