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바로 그때였다.
스르륵.
맞잡고 있던 강주미의 손이 풀렸다.
“음?”
의아한 태건이 다시 강주미를 바라봤다.
바로 그 순간 애절하던 강주미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사악하게 물들어갔다.
간절한 목소리도 달라졌다.
“고생했어.”
“뭐?”
“이제 그쪽이랑 볼 일은 다 봤으니까, 오호호.”
차가운 미소가 입가에 가득 더해졌다.
그걸 본 태건은 뒤통수에 띵하는 충격이 울렸다.
“다, 당했다.”
“호호. 이런 순진한 혈육 같으니라고.”
“너, 너……. 내가 이대로 당하고 끝날 줄 알아?”
“왜 이래, 선수끼리……. 뭐해. 어서 안내나 해.”
강주미는 아주 대놓고 진하게 놀려댔다.
태건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내가 강주미 손에 놀아나다니.”
꽈악.
머리까지 잡아 뜯으며 절규했다.
그 순간 등짝 스매시가 날아왔다.
짝!
“뭐해, 빨리 안내하라니까.”
“너, 너어, 이 악마.”
태건은 억울함에 치가 떨려 왔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친구들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외면하고 있었다.
“와, 와아. 저기가 우면산 인가봐.”
“어머, 어머, 산이 참 예쁘네.”
괜히 산을 칭찬했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에 가까운 늦가을이었다.
휘이잉.
낙엽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그런 친구들도 결국 한패였던 모양이다.
‘작정하고 온 거였냐?’
묻고 싶었지만 따지면 속 좁은 오빠로 전락할 뿐이다.
이내 태건은 다시 안내를 시작했다.
그러나 순순한 마음은 아니었다.
‘본부장님께 네 녀석들 정체를 다 까발려주마.’
으득.
그렇게 속에 비수를 숨기며 이동했다.
잠시 후.
본부장실엔 화기애애한 풍경이 펼쳐졌다.
“본부장님, 저희가 많은 분들을 만나봤는데 정말 멋지세요.”
“뭐랄까, 인상부터 품격이 느껴요.”
“말씀도 정말 위트 있게 하시고요.”
강주미와 친구들이 온갖 칭찬을 곁들였다.
박규영 본부장은 처음 보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 사이에 낀 태건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본부장님을 믿었는데…….’
믿음의 방향이 제대로 빗나가 버렸다.
화기애애한 대화 후 박규영 본부장이 시원하게 말했다.
“사진 촬영이 뭐 어렵겠습니까. 혹시라도 더 필요한 게 있다면, 여기 강 단원에게 말씀하시면 잘 도와드릴 겁니다.”
“호의에 너무 감사드려요. 혹시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요.”
“무슨 말씀을. 저야말로 가족들의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되는군요.”
“어머, 어쩜.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생글생글.
강주미는 공손함과 예의를 모두 갖춰 답했다.
정말 어른들이 딱 좋아할 그런 모습이었다.
태건의 눈엔 180도 다르게 보였다.
‘저 악마, 끝내 본부장님까지 구워삶았어. 무서븐 것.’
부르르.
강주미의 다채로운 변신에 몸이 떨려올 지경이었다.
그 다음 행선지는 옥상이었다.
드디어 단원들이 학수고대한 만남의 순간이었다.
턱, 턱.
올라가는 태건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선배님들, 악마가 올라가요. 도망쳐요.’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지금도 뒤에서 강주미가 등을 찌르고 있었다.
쿡쿡.
“동작 굼뜬 거 봐라. 후딱, 후딱 올라가.”
“너 어쩌다가 그렇게 됐니.”
“먹고 살려면 다 이렇게 되는 거야.”
강주미가 말하자 친구들이 옆에서 동의했다.
“맞아요. 저희도 이러고 싶지 않아요.”
“팬인 건 진짜예요. 사무장님이 쪼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고요.”
미안한지 눈꼬리가 축 내려갔다.
태건은 그런 친구들의 모습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이제 나한테는 안 통해.”
“진짠데…….”
“다른 단원들에게도 그랬다가는, 다들 아주 혼날 거야.”
“진짜 촬영 허락받는 게 전부예요. 믿어주세요.”
“싫어.”
휙.
딱 자른 태건은 마저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차가움을 보인 태건이지만 속으론 씁쓸해하고 있었다.
‘녀석들, 월급쟁이가 뭔 힘이 있냐.’
사정은 앞서 강주미에게 들었다.
사악한 장난처럼 꾸몄을 뿐, 했던 말은 전부 사실일 터였다.
승진 때문에, 상사에게 등 떠밀려서.
직장인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 닥친 거다.
그걸 알기에 태건도 이렇게 계속 안내하는 거였다.
곧 옥상에 모두가 올라섰다.
옥상 문턱을 넘는 순간 푸른 인조잔디가 대기소까지 쫙 펼쳐져 있었다.
레드카펫이 아니라 그린카펫이었다.
‘이걸 기어코 깔았어? 어휴.’
태건은 유난스런 치장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굳이 도착했다고 알릴 필요도 없었다.
척척.
황대산부터 이지성까지.
4명의 단원들은 다 지켜보고 있었으면서 아닌 척 슬금슬금 나타났다.
“어? 어라? 손님들이 오, 오셨네.”
“이런, 이런. 이거 아무런 준비도 못해서 어쩌지?”
“그러면 부담스러울 겁니다. 평소대로 맞이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럴까? 그래, 그게 좋겠어.”
교과서도 저렇게는 안 읽은 거 같은 어색한 대화였다.
그리고 한껏 치장한 모습으로 인조잔디 좌우에 나누어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소개팅 한 번 제대로 안 해본 사람들 같았다.
선배들의 어이없는 모습에 결국 태건이 한소리했다.
“멋은 멋대로 내놓고 몰랐다면 말이 돼?”
“큭큭.”
강주미와 후배들은 웃음을 참기 바빴다.
그때 대기소 문이 열렸다.
끼익.
오광휘 단장은 평소 그 모습 그대로였다.
타박하는 말투도 다르지 않았다.
“강태건, 왔으면 빨리 올라오지 뭐 이렇게 느려?”
“본부장님 뵙고 왔습니다.”
“그럼 말을 하든가……. 그보다 다들 와줘서 고맙고, 자세한 얘기는 들어와서 합시다. 얼른 모셔라.”
“네. 갑니다!”
크게 대답한 태건이 동생들을 이끌었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단원들이 빳빳하게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내 다가서자 다들 기계처럼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오신걸 화, 환영 합…….”
“이쪽으로.”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려 노력했지만 역시나 어색했다.
‘됐어. 뭔 말을 해.’
태건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
* * *
곧 대기소의 문이 닫혔다.
모두 다과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았다.
…….
낯섦과 어색함으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태건이 지켜보다 못해 나섰다.
“아니, 이게 뭐 소개팅 자리인 줄 아시나.”
“크흠.”
“선배님들 뭐하십니까. 그냥 이러고 있을 거 아니잖아요.”
태건이 눈치를 붙여 보챘다.
그때 저쪽에 홀로 떨어져 있던 오광휘 단장이 손을 들며 말했다.
“단장인 오광휘입니다. 최근에 돌싱돼서 아직 현타 중이니까 나는 빼고 편하게들 노세요. 자, 됐지. 다음!”
자진해 멍석을 깔아주기까지 했다.
그 후에야 선배들이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저는 황대산…….”
“고수현이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려웠다.
주륵.
식은땀까지 흘러내릴 정도였다.
태건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떠들던 분들이…….’
절레절레.
할 말이 없었다.
다행히 강주미와 친구들은 그나마 나아 보였다.
강주미는 태건이 있기에 더욱 침착했다.
“저는 태건 오빠 동생인…….”
“저는 주미 친구…….”
그렇게 자기를 소개하며 서로 알아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간 후였다.
선배들은 아직 뻣뻣하고 어색했다.
“어, 그……. 아닙니다.”
“…….”
정말 쑥맥도 저런 쑥맥들이 없었다.
오히려 김채연과 황유리가 적극적이었다.
평소 동경했던 팬심이 있어 궁금한 거 투성이었다.
“저 문은 뭐예요?”
“여기서 생활하시는 거예요?”
“헬기 구경해 봐도 되나요?”
그 적극적인 질문에 단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긴 장비 창고인데, 가서 한 번 보시겠습니까.”
“여기서 24시간을 보내고 있고…….”
“헬기야 원하시면 얼마든지.”
이쪽으로 우르르.
또 저쪽으로 우르르.
그렇게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소개하고 구경했다.
그런 사이사이 사진도 촬영했다.
찰칵, 찰칵.
동생들은 사물 중심으로 여기저기 렌즈를 옮겼다.
쭉 지켜보던 태건은 뚱한 얼굴로 다가가 강주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주고, 저기 헬기 앞에 서 봐.”
“찍어주게?”
“기왕 사진 박는 거 제대로 해. 그리고 헬기 가까이서 본적 별로 없잖아.”
“이보세요. 공항 정비창에 가면 공항소방대 헬기가 엄청 많답니다.”
“라텔 헬기는 없을 걸.”
태건의 말에 강주미가 아차했다.
“맞다. 로고 잘 보이게 찍어줘.”
“오빠, 저도요!”
“잠깐만요!”
호다닥.
김채연과 황유리가 부리나케 강주미 뒤를 따랐다.
한 앵글에 담은 태건은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찰칵.
“일단 한 방 찍었고.”
“오빠는, 그냥 찍……. 으면 안 되지.”
울컥하려던 강주미는 얼른 주변을 인지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태건은 듣지도 않았다.
오히려 구경 중인 선배들에게 말했다.
“기념인데 같이 한 컷 찍으셔야죠.”
“어, 어? 우우우, 우리가?”
“가서 서세요. 두 번 권하지 않을 겁니다.”
태건은 대놓고 으름장을 놓았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뭐…….”
단원들은 멋쩍어하며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 타이밍 맞춰 태건이 소리쳐 알렸다.
“싹 모여서 한 번 찍어야지!”
“좋아요!”
“자자, 모이시고. 좀 가까이……. 대산 선배, 중헌 선배, 더 붙어요. 더!”
휙휙.
태건은 손짓까지 하며 지시했다.
그 수신호에 맞춰 멀찍이 자리한 단원들이 쭈뼛거리며 거리를 좁혔다.
이내 한 앵글에 모두가 들어왔다.
‘그림이 나쁘지 않네.’
속으로 삼키며 목적부터 달성했다.
“찍습니다. 다 같이, 하나 둘……. 라텔.”
“라텔!”
찰칵.
라텔 마크를 옆에 두고 모두 옹기종기 모여 거수경례한 사진이 완성됐다.
사진은 한 컷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오광휘 단장과 태건이 더해져 한 번 더 찍었다.
“여기보세요. 김치.”
“김치!”
찰칵.
각도를 달리해서도 한 컷 촬영했다.
“이번엔 이쪽에서, 다시 라텔.”
“라텔!”
찰칵.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촬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