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더 거리를 좁힌 단원들은 이내 확신을 굳혔다.
‘장난전화였어.’
순간 허탈감이 밀려왔다.
“하아.”
터더덕.
인지한 순간 두 다리는 걷기 시작했다.
솔직히 너무도 힘이 빠졌다.
온몸이 뻑뻑하게 굳어질 정도로 긴장하며 날아온 모든 게 무색하게 되어버렸다.
두 다리에 힘이 탁 풀릴 거 같았다.
이내 라텔은 아이와 가까이 섰다.
아이는 기대 가득한 얼굴로 얼른 물어왔다.
“아저씨들 라텔이죠. 라텔 맞죠?”
“그래. 그런데 네가…….”
신고했냐고 물어보려던 그때였다.
척.
아이가 대뜸 손가락으로 한 명씩 가리키며 말했다.
“황대산 단원 소방관 아저씨, 오광휘 단장 소방관 아저씨.”
“엥”
“어?”
바로 자신을 알아보자 황대산과 오광휘 단장이 조금 놀라워했다.
아이는 남은 세 단원도 마저 가리키며 이름을 불렀다.
척, 척.
“고수현 소방관 아저씨, 이지성 소방관 아저씨.”
“…….”
“그리고 강태건 소방관 아저씨! 저기 위에 유중헌 소방관 아저씨죠, 그쵸?”
슥슥.
유중헌을 언급할 땐 손가락을 하늘로 쿡쿡 찔러 보였다.
태건과 단원들은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하나는 알아봐준데 대한 고마움이었다.
‘여기서도 알아보네.’
‘이 어린 애가 우릴 어떻게 알고.’
정말 고마운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고 씁쓸했다.
‘얼굴 보자고 신고 전화한 거였어.’
‘하, 얘야. 이건 좀 아니지 않니.’
조카였다면 꿀밤 작렬 각이었다.
지금도 허탈함에 주먹이 울었지만 신고자라서, 정말 그 이유로 꾹꾹 눌러 참았다.
다들 나설 생각이 없어보였다.
오광휘 단장까지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더 가까워지려 하지 않았다.
…….
다들 멀뚱히 서 있었다.
아니, 두 눈으로 태건을 떠밀고 있었다.
‘빨리 상황종료 때리고 복귀하자.’
‘우린 성격이 뭐 같아서 립서비스가 안 돼.’
눈빛도 갖가지였다.
그렇게 변명과 핑계를 잔뜩 눈에 담고 있었다.
결국 태건이 나섰다.
‘후우. 화내지 말고, 차분하게. 애야, 애.’
울컥하는 속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이내 마저 다가간 태건이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가까이서 보니 입술이 약간 어두운 빛을 띠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인데, 아프다고 단정 짓기는 좀 그렇고…….’
슥슥.
그 외에 육안으로 빠르게 스캔했지만 별다른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살펴보며 태건은 첫 마디를 꺼냈다.
“안녕, 그런데 우리를 어떻게 알았어?”
“제가 최고로 좋아하는 소방관 아저씨들이라서 딱 보는 순간 알았어요.”
“그렇구나.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지?”
태건이 자상하게 묻자 아이는 바로 손가락을 펴며 답했다.
“저는 한유빈이고 7살입니다.”
“씩씩하네. 그런데 우리 유빈이는 어디가 아파서 119에 전화한 거야?”
“……이, 이제 괜찮아졌어요.”
한유빈의 대답이 순간 어색하게 변했다.
거짓말이다.
너무 티가 나서 속아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태건은 마지막 미련까지 훌훌 털어버리려 했다.
그런데 저 짙은 입술색이 살짝 마음에 걸렸다.
‘흠.’
뭔가 하나 석연치가 않았다.
그 부분을 넘어갈 수 없어 넌지시 한유빈에게 물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팠는데?”
“어?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고…….”
한유빈의 대답이 흐지부지 흩어졌다.
묵직한 태건의 시선을 슬쩍 피하기도 했다.
그 모습으로 직감한 태건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유빈아. 혹시, 정말 혹시 우리가 보고 싶어서 아프다고 한 거니?”
“어, 어, 그게…….”
“우리 라텔은 거짓말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
“……그, 그랬어요. 잘못했어요.”
푹.
결국 실토한 한유빈이 고개를 떨궜다.
조용히 듣고 있던 단원들의 표정이 일순간 우락부락하게 변했다.
“아니, 그…….”
“저, 저런…….”
불도 씹어 먹을 성깔들이 들쭉날쭉 솟구쳤다.
진짜 달려들지도 몰랐다.
처억.
범상치 않음을 직감했는지 오광휘 단장이 손을 뻗어 막고 오더했다.
“빅, 핸썸, 둘이 주변에 위험요소가 있는지 둘러봐.”
“둘러보라니요. 당장 철수해야죠.”
“여기까지 왔는데 매정하게 그냥 가냐. 좀 둘러보면서 서비스도 하고 그래야지. 뭐해. 빨리 움직여.”
“네네. 갑니다. 가요.”
황대산과 고수현이 쓴 얼굴로 돌아섰다.
드륵.
방화헬멧의 전면부를 열어 찬바람으로 열을 식혔다.
오광휘 단장은 우두커니 선 이지성을 힐끗거렸다.
“뭐해, 일 안해?”
“뭔 일이요.”
“구조출동이고 요구조자가 앞에 있잖아.”
슥.
가볍게 턱짓을 곁들였다.
일단 가서 건강상태를 확실히 확인하란 의도였다.
이지성은 살짝 날이 선 얼굴로 말했다.
“태건이가 하고 있잖습니까.”
“가서 돕기라도 해.”
“쯧.”
이지성은 짜증을 팍팍 뿌려가며 이동했다.
같은 시각.
태건은 한유빈을 무서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빈아, 그러면 돼, 안 돼?”
“안 돼요. 잘못했어요.”
“그……. 흐음. 그런데 여기 혼자 있는 거야?”
태건은 질문의 방향을 억지로 돌렸다.
계속 아이에게 뭐랄 순 없는 노릇이다.
이런 상황을 방치한 부모에게 책임을 묻는 게 더 이치적으로 옳았다.
그때였다.
처적.
이지성이 옆에 도착하더니 구급가방을 내리며 퉁명하게 말했다.
“바이탈이라도 한 번 재. 확실히 해야지.”
“잠시만요.”
“크흠.”
이지성은 뭘 기다리냐란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가 억지로 삼킨 헛기침을 뿌렸다.
그 사이 한유빈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엄마하고 아빠랑 같이 왔어요.”
“어디 계셔?”
“지금 저쪽 산에…….”
스윽.
한유빈이 손을 들어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이었다.
산비탈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남녀가 보였다.
거친 산행에 걸맞은 질긴 옷감의 옷차림들이었다.
촤자작, 촤자작!
“이게 무슨 일이야!”
“헬기가 왜 오두막 위에. 유빈이, 유빈아!”
소리치며 다급히 내려왔다.
태건은 그들을 바라보며 한유빈에게 물었다.
“부모님이니?”
“……네.”
“이걸 어쩌나. 우리가 어떻게 왔는지 말씀드려야 하는데.”
“합!”
턱.
한유빈이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건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유빈의 표정이 두려움으로 급격히 물들었다.
혼날 모습이 훤히 그려지는 모양이다.
그 사이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얼마나 다급히 내려왔는지 여기저기 넘어지고 쓸린 흔적이 가득했다.
차자작.
“유빈아, 유빈……. 저기 저분들, 설마?”
“소방관이야. 헬기, 그럼 라텔? 도대체 저들이 왜!”
부부는 다가올수록 혼란이 가중됐다.
그때 태건의 어깨를 짚으며 지나가는 인물이 있었다.
“애 좀 한 번 싹 봐봐. 저쪽은 내가 갈게.”
스윽.
오광휘 단장이었다.
덕분에 태건은 심적부담감이 줄어들었다.
“뭐라고 하나 걱정했는데.”
“…….”
한유빈은 아무런 말도 못했다.
태건은 개의치 않고 이지성에게 물었다.
“선배, 바로 시작해도 됩니까?”
“물론, 여기 간이혈압측정기.”
휙.
무뚝뚝한 목소리와 함께 불쑥 손목부착형 의료기기가 다가왔다.
그걸 받아든 태건은 바로 한유빈의 손목에 채웠다.
“잠깐만 그대로 있으면 돼. 그렇지.”
“…….”
한유빈은 꼼짝도 못한 채 인형처럼 서 있었다.
덕분에 바로 부착하고 측정까지 진행했다.
띡.
수치를 확인한 태건이 한유빈을 바라보며 쓰게 미소 지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데, 콩닥콩닥한 가봐.”
“많이 혼나겠죠?”
두려움 가득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저쪽에서 들려왔다..
“뭐라고요? 유빈이가 119에 아프다고 신고를 했다고요. 내 이 녀석을 그냥!”
“정말 죄송해요. 저희가 저 아래 사는데, 유빈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데려왔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너무너무 죄송해요.”
“제가 이렇게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중요한 일 하시는 분들을 이런 괘씸한 일로 찾아오시게 해 면목이 없습니다.”
“저희가 잘못 가르쳤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할게요. 어후, 이걸 어째.”
한유빈의 부모님은 고개를 조아리다 못해 절절하게 빌었다.
그럴수록 한유빈의 고개는 아래로 떨어져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닌데.”
희미한 투정소리가 툭 흘러나왔다.
그 뇌까림은 가까이 있던 태건의 귀에 쏙 들어왔다.
불쾌감보다 의아함이 앞섰다.
‘흠, 반항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먼저 잘못을 시인한 거와 조금 다른 반응이 갸웃거리게 했다.
그 사이 태건은 바이탈을 한 번 더 체크했다.
띡.
“이번엔 쑥 가라앉았네. 편차가 심한데, 한 번만 더 해보자.”
“…….”
“흠. 두 번째가 맞나봐. 두 번째랑 비슷하게 나왔어.”
“네.”
한유빈의 목소리가 축 가라앉았다.
그 사이 태건은 구급가방을 정돈했다.
보호자들이 왔으니 한유빈의 건강에 대해 설명하고 철수하면 될 터였다.
“그럼 정리부터.”
“뭐 쓴 것도 없는데. 대충 쑤셔 넣어.”
이지성의 목소리가 오늘 따라 훨씬 삐딱했다.
상대가 아이라서 인내하는 중이었다.
그때 한유빈의 부모가 헐레벌떡 다가왔다.
차자작.
“정말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저희가 잘못 가르쳤습니다.”
다가오자마자 고개부터 숙여 사과했다.
태건과 이지성은 쓴 얼굴로 마주 예의를 차렸다.
“아닙니다. 그래도 유빈이가 별일 없어서 다행입니다.”
“데려오셨으면 애를 좀……. 크흠. 아이를 데리고 다니셔도 좋을 거 같네요.”
이지성의 삐딱한 대답이 방향을 억지로 돌렸다.
태건이 슬쩍 팔꿈치로 건드린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