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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사인 (238)화 (237/320)

238화

단원들 모두 사정을 알기에 그 음료수 상자를 선뜻 받기 어려웠다.

“저희야 뭐…….”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슬쩍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이럴 때 꼭 눈치 없는 누군가가 있었다.

이번에도 고수현이었다.

덥석.

“잘 마시겠습니다.”

냉큼 음료수 상자를 받아 품으로 이끌었다.

그 행동에 단원들의 눈이 바로 매서워졌다.

“야, 지성아.”

“나 참.”

“그걸, 그렇게…….”

눈총을 마구마구 쏘았지만 고수현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뭐 음료수 한잔 가지고.”

“나중에 얘기하고 넌 뒤로 빠져 있어.”

휙.

황대산이 아예 고수현을 뒤로 빼냈다.

그 사이 태건은 부부를 바라봤다.

“좋은 소식이 병원에 파다하던데요.”

“들으셨습니까. 무슨 지원프로그램이라면서 유빈이 시술비를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한규성이 멋쩍어했다.

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환한 얼굴로 말했다.

“그거 대박이네요.”

“이렇게 도움만 받고 염치가 없어서.”

“병원에서 해준다는데 마다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태건이 옹호하자 한규성이 민망한 얼굴로 답했다.

“저희도 그냥 눈 딱 감고 받기로 했습니다.”

“잘 결정하셨습니다.”

태건은 수더분하게 답했다.

그렇게 태건이 판을 벌려 놓고 오광휘 단장에게 눈짓했다.

슥슥.

사전에 약속해둔 사인이었다.

그걸 본 오광휘 단장이 나섰다.

“유빈이 아버님, 저랑 잠시 얘기 좀 하시죠.”

“혹시 출동하신 부분에 대해 비용이…….”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우선 자리부터 좀.”

“네, 그러죠.”

한규성은 어리둥절해하며 오광휘 단장과 자리를 옮겼다.

일부러 따로 자리하려는 건 오광휘 단장의 계획이었다.

-내가 조용히 설득할게.

프라이버시를 최대한 지켜주잔 의도였다.

그들이 떠나가자 이미정은 궁금함과 어색함을 동시에 풍겼다.

그때 태건이 이지성을 툭 건드렸다.

‘선배.’

하고픈 말을 꺼낼 기회란 의미였다.

그걸 이지성도 아는지 헛기침하며 다가갔다.

충분하지 못했던 사과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크흠. 어머님, 저 산에서 제가 너무…….”

그때 이미정이 먼저 말했다.

“사과하지 마세요. 전 그런 말을 들어도 싸요.”

“네?”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요.”

“…….”

이지성은 묵직한 얼굴로 듣고만 있었다.

그에 이미정은 좀 더 자신을 자책했다.

“이 대원의 말씀을 곱씹을수록 반박을 못하겠더라고요. 정말 그런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

“유빈이 입장에서 한 번만 생각해 볼 걸, 후회도 많이 되고요.”

꾹.

이미정은 옷자락을 움켜쥐며 자책했다.

태건은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며 쓴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지성 선배는 주변을 쑥밭 내는 재주가 있다니까.’

다 떠나서 어색하고 무거워진 공기부터 바꿔야 했다.

그렇게 태건이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돌연 침묵하던 이지성의 입이 열렸다.

“이제부터 그러면 되잖습니까.”

“……네?”

“지금부터 노력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지성이 너무도 의외의 말을 꺼냈다.

듣고 있던 태건과 다른 단원들이 힐끗 쳐다볼 정도였다.

‘이 사람 누구야?’

‘쟤, 지성이 맞지?’

‘캐릭터 막 바꾸네.’

그런 표정들이 역력했다.

그의 아픈 과거를 알기에 더더욱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지성은 차가운 얼굴에 애써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어갔다.

“노력하시면 유빈이도 분명히 알아줄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물론입니다.”

대답하는 이지성의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어쩌면 상투적인 조언일지 모른다.

하지만 태건은 그 말을 가볍게 들을 수가 없었다.

“…….”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지성이 지금 그의 어린 시절을 빗대어 말한다는 걸 직감하고 있던 탓이다.

이미정은 유리창 속 한유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가 미안해. 앞으로 더 잘할게.”

자그맣게 다짐을 읊조렸다.

그 소리에 이지성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때 오광휘 단장과 한규성이 돌아왔다.

한규성이 몸 둘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태건과 단원들은 바로 직감했다.

‘잘 해결됐네.’

졸였던 마음이 살짝 풀어졌다.

그 후로 라텔은 잠시 회복실에 들어갔다.

병원 측의 배려였다.

한유빈과 사진도 찍고, 이런저런 대화도 나눴다.

“히히.”

꿈같은 시간이었는지 한유빈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 시간 중 태건이 살짝 산통 깨는 말을 했다.

“유빈아, 이제 아프면 숨기지 말고 꼭 엄마, 아빠한테 말하는 거야. 알았지?”

“네에.”

“엄마, 아빠는 네가 말하지 않으면 몰라. 그러니까 유빈이만 거짓말쟁이 됐잖아.”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한유빈이 쌜쭉해진 얼굴로 답했다.

슥슥.

가볍게 머리를 흩트린 태건이 이어서 말했다.

“좀 더 크면 본부에 놀러와. 부모님 말씀 잘 들었다고 하면 맛있는 거 사줄게.”

“진짜요? 돈가스 사주는 거예요?”

한유빈이 급변하며 기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태건은 가볍게 답했다.

“돈가스 10번도 사줄 수 있지.”

“진짜에요. 정말 사주시는 거예요.”

“약속.”

“아싸……. 흣.”

한유빈이 신나 급히 움직이다 신음을 흘렸다.

삐빅.

심전도 기계의 소리도 변화했다.

간호사가 깜짝 놀라 후다닥 다가왔다.

“이런 소리가 날 리가 없는데, 유빈아 괜찮니?”

“흐흐, 네. 따끔했는데 이제 괜찮아요. 안 아파요.”

“그래. 혹시 아프면 얘기하고.”

슥슥.

간호사는 한 번 더 살펴보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차한 그 상황에 모두의 눈총이 태건에게 쏟아졌다.

“너는 이제 회복하는 애를!”

“조심성이라고는 1도 없는 인간아.”

“어째 네가 조용하다 했다.”

“네가 문제야. 네가!”

이때다 싶은 단원들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흠흠. 조심하겠습니다.”

태건은 코가 쑥 빠진 얼굴로 답했다.

그때 한유빈이 뚱한 표정으로 크게 말했다.

“우리 강태건 소방관 아저씨한테 그러지 마요!”

“엥?”

“돈가스 사준다고 한 좋은 소방관 아저씨에요!”

한유빈이 변호해주자 태건의 기가 팍팍 살아났다.

“맞아요. 전 좋은 소방관이에요!”

태건은 얼른 한유빈 옆에 서서 그대로 따라했다.

유치찬란한 그 모습이 너무도 당당했다.

그 모습에 다들 어이없어 했다.

“얼씨구, 잘들 논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래. 좋겠다. 너만 좋은 소방관이라서.”

툴툴거리는 단원들의 표정에 약간 심통이 차올랐다.

그때 한유빈이 한 마디 더 했다.

“다 좋은 소방관 아저씨들이에요. 라텔이 최고에요.”

그 말에 모두의 표정이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우리도 좋은 소방관이야. 그뤠에?”

“우리가 좀 최고긴 하지.”

“뭐 우리가 잘났단 건 아닌데,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

“에헴.”

어느새 다들 콧대를 높였다.

아이의 한 마디에 달라지는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라텔다웠다.

잠시 후.

포천병원 위로 헬기가 떠올랐다.

투다다다.

남쪽으로 향함과 동시에 유중헌이 지원팀에 보고했다.

-띠릭. 운전라텔 송신, 현 시간부로 복귀한다. 이상.

-띠릭. 시계가 제한되니 안전 운전 바란다.

최현모 조장의 화답이 들려왔다.

그의 걱정대로 해가 저물고 어둠이 찾아와 있었다.

타다다다.

헬기는 그런 어둠 속을 유유히 날아갔다.

단원들은 긴장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탑승해 있었다.

그러다 태건이 문득 생각나 물었다.

“단장님, 그런데 한규성 씨는 어떻게 설득하신 겁니까?”

“아, 맞다. 그걸 안 물었네.”

유유자적하던 단원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때 앞에 자리한 오광휘 단장이 뒤를 돌아봤다.

스윽.

단원들을 쭉 둘러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 단장님의 위대한 업적을 이제 기억해 주는 거냐?”

“…….”

다들 빤히 바라만 보자 오광휘 단장이 뚱한 표정으로 변했다.

“한 놈이라도 대답 좀 하지.”

“빨리 말씀이나 해주세요.”

“별 거 있냐. 유빈이가 잘 컸으면 좋겠다. 뭐 그런 거지.”

오광휘 단장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말이 전부는 아닐 거다.

설핏 느낌이 왔지만 태건과 단원들은 더 캐묻지 않았다.

“어쨌든 받았으면 된 겁니다.”

“거기 다 일구고 농사지으려면 바빠지시겠네.”

“유빈이가 얼른 자라서 도와드리면 좋겠어.”

다들 가볍게 미소 지으며 싱거운 말을 한 마디씩 흘렸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또 다른 의미의 구조를 이뤄낸 덕분일지도 몰랐다.

며칠 뒤.

라텔은 다시 심신단련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 이혜지 행정팀장의 호출을 받았다.

오광휘 단장과 태건이 대표로 찾아갔다.

“팀장님, 찾으셨습니까?”

“도대체 출동 나가서 무슨 일을 어떻게들 하고 온 거야?”

이혜지 행정팀장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순간 오광휘 단장과 태건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왜요. 무슨 일 있습니까?”

“그때 말씀드린 게 전부인데, 무슨 문제라도?”

살짝 긴장까지 했다.

이혜지 행정팀장이 짐짓 굳은 얼굴로 말했다.

“후원금이 또 늘어나고 있어.”

“네?”

“후원금이 다시 들어오고 있다니까. 이거 봐봐.”

스윽.

모니터까지 돌려서 아예 입금내역을 확인시켜줬다.

정말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금액보다 늘어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탈칵.

이헤지 행정팀장이 키보드 버튼을 하나 눌렀다.

화면이 깜빡거리더니 잔액이 더 늘어났다.

“어라, 더 늘었네?”

“이거 은행에 전화해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태건은 놀라고, 오광휘 단장은 전산오류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이혜지 행정팀장이 슬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유빈이네를 라텔에서 도와줬다는 게 알려졌어.”

“음?”

“맞아. 라텔은 베풀 때도 화끈하다며, 다음에 베풀 때 보태달라고 맡겨두는 거래.”

그 말을 듣고야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팀장님도, 놀랐잖습니까.”

“뭐가 잘못된 줄 알고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했단 말입니다.”

차례로 억울함을 어필했다.

그런 반발에도 이혜지 행정팀장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좋은 일에 쓰기 전에 밥 한 끼 든든히 챙겨 먹으래.”

“…….”

“결국 보태라는 건 구실이고, 그냥 라텔 후원금이야.”

그 말에 태건과 오광휘 단장이 계면쩍어졌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닌데…….”

“다들 왜들 그러신대.”

괜히 민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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