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이혜지 행정팀장은 어느새 정겨운 얼굴로 물었다.
“힘이 좀 나?”
찡긋.
짓궂은 표정으로 변한 태건과 오광휘 단장이 넉살을 부렸다.
“힘이야 항상 넘쳐나죠.”
“이거 힘이 남아돌아서 우면산이라도 한 번 뛰어야겠습니다.”
“단장님, 진짜 한 판 뛰러 가시죠.”
태건이 본격적으로 제안했다.
동시에 오광휘 단장의 눈빛이 능글맞게 번쩍였다.
“그럴까? 그럼 라텔 하나, 집합장소는 우면산 정상.”
“콜!”
태건이 기분 좋게 외쳤다.
많은 사람들이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없던 힘도 철철 넘쳐났다.
* * *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 날이었다.
태건이 본부 건물 뒤편에서 앞쪽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 태건의 옷이 엉망진창이었다.
“이 깽깽이들, 장난이 점점 심해져.”
툭툭.
흙먼지를 털며 건물 입구로 향했다.
그러던 태건은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이곳 본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평상복의 젊은 남자였다.
거리를 좁혀가던 태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 서정민 씨?”
TV로 봤던 그 얼굴이었다.
아니, 그땐 푸석푸석했지만 지금은 윤기가 돌아 훨씬 좋아보였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서정민도 태건을 알아봤다.
“혹시 강태건 단원님?”
“이렇게 만나네요.”
다가간 태건은 손을 내밀었다.
동갑이란 걸 서정민도 알고 있었는지 바로 맞잡았다.
척.
“일전엔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희야 감사해야할 입장이죠. 그보다 이제 출근하시는 겁니까?”
태건이 묻자 서정민이 갸웃거렸다.
“출근이요?”
“지원팀에 특채……. 아닌가요?”
확신이 없던 태건이라 목소리 끝이 점점 작아져졌다.
서정민은 무슨 소린가 하더니 이내 알아챘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때 인터뷰 때문에 오해가 생긴 거 같네요.”
“…….”
“통신 분야 고문이라고 해야 할까요. 건 바이 건으로 프리랜서하기로 했습니다.”
“무전기 말씀이십니까?”
태건이 알아듣자 서정민이 보태어 말했다.
“유무선 전부요. 그리고 또…….”
그의 말이 이어지려할 때였다.
본청 건물에서 노주민이 빠르게 뛰어나왔다.
“정민 씨……. 아, 태건 선배님.”
“그래. 손에 그건 메모리카드 아니야?”
“맞습니다. 그동안 촬영분이 담겨 있는 겁니다.”
착.
노주민이 손을 펼치자 몇 개의 메모리카드가 놓여 있었다.
그걸 본 태건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그리고 곧 결론을 도출해냈다.
스윽.
다시 서정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동영상 편집도 하십니까?”
“집에서 이것저것 하다보니까, 잡기만 늘더라고요. 하하.”
“엄연히 기술인데요……. 아, 그럼 노 단원이 좀 편해지겠네.”
태건의 예상이 맞았는지 노주민이 계면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훈련하느라 동영상 업데이트가 자꾸 밀려서요. 그걸 본부장님께서 해결책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창피할 게 아니라 좋은 일이지. 노 단원은 훈련에 더 집중할 수 있으니까.”
“맞습니다. 어……. 전 이거 드리고 자리를 피해야할 거 같네요.”
스윽.
노주민은 서정민에게 메모리카드를 전달하고 바로 뒤돌아갔다.
태건은 그런 노주민의 배려가 괜히 어색했다.
“저 녀석, 자리를 피할 건 뭐야.”
“그러게요.”
“어쨌든 이제 자주 뵙겠습니다.”
“네. 그럼 또.”
서정민은 가볍게 인사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깔끔한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기술 고문이라. 불편한 게 뭐가 있더라…….”
태건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다.
기왕이면 개선점을 정확히 찾아내 도움을 받고 싶었다.
라텔에게 도움이 될 일이었고, 서정민에게도 일거리가 늘어나니 서로 윈윈할 수 있을 터였다.그 속에 자신이 뒤에서 도움을 줬단 생색은 일절 담겨 있지 않았다.
서정민으로 인해 라텔이 크게 이슈 되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응원을 받고 있었다.
‘받은 걸로 치면 우리가 더 크잖아.’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한 번 감추기로 했으면 그걸로 끝이다.
더 왈가왈부하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 * *
며칠 뒤.
우면산 초입의 공터가 깨끗하게 정리됐다.
그 공터에 박규영 본부장이 떡하니 서 있었다.
그의 앞엔 라텔 전 단원이 일렬로 줄줄이 서 있었다.
오광휘 단장이 앞에서서 보고 했다.
“라텔 전원 집합 완료했습니다.”
“2기 단원들 체격이 그새 좋아졌군. 다들 듬직해졌어.”
“정말 살 깎는 노력을 했지요.”
“그래 보여. ……그보다 다들 왜 모이라고 했는지 궁금할 거야. 그건 곧 알게 될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도록 해.”
그의 말에 모두가 한목소리로 답했다.
“네!”
“그리고 강 단원.”
박규영 본부장이 지목하자 태건이 홀로 답했다.
“네. 본부장님.”
“그때 말했던 서프라이즈야. 기대해도 좋아. 후후.”
모종의 계획에 대한 성공을 확신하는 기대감이 역력한 웃음을 흘렸다.
그 의미심장한 웃음에 태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들판에 집합시켜 놓고 무슨 서프라이즈?’
태건도 이번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을 무렵이었다.
-투두두.
하늘에서 공기를 박차는 소리가 연속해 들려왔다.
헬기 소리였다.
의아해하던 단원들은 곧 수긍했다.
그에 대해 태건이 말했다.
“유 선배가 기동 연습하는 모양입니다.”
“아…….”
끄덕.
다들 고갯짓하며 이해했다.
그때 슬쩍 몸을 앞으로 기울인 누군가 손을 들었다.
유중헌이었다.
“나, 여여, 여기 있는데.”
“네. 선배가 거기 계시……. 에? 왜 여기 계세요?”
“다 집합이니까.”
“그럼 이 소리는 뭡니까?”
태건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때 박규영 본부장이 가늘게 미소 지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오는군.”
스윽.
일제히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빠르게 다가오는 비행물체를 확인했다.
“저기……. 어라, 헬기가 날아오네요.”
“옆에 마스코트, 그럼 옥상에 있는 우리 헬기 아닙니까?”
“그건 저기 있잖아.”
“그럼 쟤는요?”
황당함에 얼떨떨한 대화가 오갔다.
그런 모두의 귀에 박규영 본부장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개하지. 라텔 2호기야.”
“네에?”
휙!
모두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 박규영 본부장을 바라봤다.
그 얼굴엔 믿지 못하겠단 표정들이 역력했다.
오광휘 단장이 얼른 소리 높여 물었다.
“정말 저희 두 번째 헬기란 말씀이십니까?”
“차관님께서 ‘자네들이 약속을 지켰으니 나도 보답해야지.’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어.”
“아아!”
라텔 1기 단원들이 일제히 탄성을 자아냈다.
김을영 소방차관의 약속을 이제야 다시 상기시킨 탓이다.
-라텔을 찾는 누군가가 있다면 계속 이어진다.
2호 헬기가 그 약속의 증표인 모양이다.
태건은 순간 짜릿함을 느꼈다.
“진짜 서프라이즈네요!”
활기찬 태건의 말에 박규영 본부장이 손가락 하나를 까딱거렸다.
“아직 놀라긴 일러.”
“…….”
태건은 놀랄 게 더 남아있단 말에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런 박규영 본부장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곧 2호 헬기가 공터에 안착했다.
영외 헬기장이란 표현이 더 옳을 듯했다.
휘이잉.
헬기가 멈추자 그 안에서 세 명의 소방관들이 나왔다.
40대 중후반으로 추측되는 인상들이었다.
“헙!”
옆에서 유중헌의 헛숨 들이켜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휙.
고개를 돌려 그에게 집중했다.
동시에 옆에 있던 황대산이 슬쩍 채근해 물었다.
“누군데 그래?”
“교, 교…….”
“헬기학 교수?”
황대산이 없는 직책까지 만들어낼 정도로 금방 알아듣지 못했다.
절레절레.
빠르게 고개를 털어낸 유중헌이 침을 꿀꺽 삼키고 선명하게 말했다.
“왼쪽에서부터 교수, 박사, 마스터라고. 전부 전쟁지역 파병경험이 있는 전역자들입니다.”
“그래에?”
“40세 이하 조종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들입니다. 3대 천왕이라고 불릴 정도로요.”
유중헌의 목소리가 한 번도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만큼 놀라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새 가까워졌다.
그리고 박규영 본부장과 먼저 인사했다.
그 후 박규영 본부장이 직접 조종사들에 대해 말했다.
“오늘부터 우리 특수소방단에 새로 배속된 기장들이다.”
그 다음으로 각자 소개가 이어졌다.
“정교현입니다.”
“박서진입니다.”
“왕지호입니다.”
이름과 별명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인상들이었다.
게다가 저들의 기동복에는 견장이 없었다.
그래서 계급을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박규영 본부장이 한 명을 호명했다.
“유중헌 단원.”
“……네!”
“앞으로.”
“…….”
척, 척.
유중헌은 긴장한 얼굴로 박규영 본부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유중헌을 세 명과 나란히 세우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위 네 명의 조종사가 1호기와 2호기의 기장과 부기장으로 활동할 거다.”
갑자기 조종사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들은 바가 없기에 모두는 갑자기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가 6명에, 2기가 5명, 조종사들까지…….”
“총 14명입니다.”
“그 인원이 한 번에 출동이라고?”
소방서 출동인원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그러나 특수소방단의 특성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많았다.
그에 대해 오광휘 단장이 말했다.
“2기가 적응훈련 마치면 7명 씩 2개 조로 운영할 예정이야.”
“네?”
휙!
처음 듣는 얘기라 모두 오광휘 단장을 바라봤다.
오광휘 단장은 끄덕도 하지 않고 말했다.
“24시간 근무는 똑같아. 맞교대 방식으로 바뀌는 거뿐이야.”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안 물어봤잖아.”
“…….”
오광휘 단장의 대답이 너무 쿨해 주변이 썰렁해질 지경이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박규영 본부장이 대신 추가 설명을 했다.
“1기는 벌써 5개월 넘게 이곳에 있었어. 입원하고 재정비 시간을 제외해도 4개월이 훌쩍 넘지.”
“…….”
그건 명백한 사실이라 다들 듣기만 했다.
박규영 본부장은 바로 이어서 말했다.
“아무리 사명감을 품고 있다고 해도 다 똑같은 사람이야. 숨을 쉴 구멍이 필요해.”
“저희는 갑작스럽습니다만.”
“이건 차장님 명령이야. 최소한의 영외생활을 보장해주란 명령.”
“…….”
다들 침묵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