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태건은 다시 발끝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툭, 툭.
“다들 기다립니다. 얼른 가보세요.”
“이거 하나만 더. 내가 상담하다 맘 약해져서 결정을 번복한다면?”
오광휘 단장이 짐짓 묵직하게 물었다.
태건은 지체 없이 바로 답했다.
“기꺼이 따라야죠.”
싱긋.
잔잔한 미소도 곁들였다.
그런데 그 미소가 오광휘 단장의 신경을 자극했다.
“……어디까지가 네 시나리오냐.”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럼 이게 다 애드리브라고?”
지잉.
오광휘 단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을 품었다.
그럼에도 태건의 표정은 태연했다.
“성철이가 다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단장님이 출동 보류라고 할 줄은 또 누가 알았고요.”
“저렇게 뺀질거리니까 더 헷갈리네. 일단 간다.”
오광휘 단장은 끝까지 미심쩍은 눈빛으로 흘겨보며 떠나갔다.
다른 단원들도 함께였다.
탁.
문이 닫히고 대기소엔 태건 홀로 남았다.
쭈욱.
길게 기지개를 켠 태건이 부르르 떨며 말했다.
“아으, 이걸 어떻게 예상합니까.”
오늘 벌어진 일들이 묘하게 맞아 떨어졌을 뿐이다.
그건 확실했다.
특수소방단 본부 곳곳에서 상담이 진행됐다.
펜스 앞.
오광휘 단장이 훌쩍이는 최성철의 어깨를 다독여 줬다.
야외 휴게소.
황대산이 팔짱을 낀 채 김지수의 말을 진중하게 들었다.
옥상 1호 헬기.
유중헌과 노주민이 나란히 걸터앉아 차분히 대화했다.
영내 휴게실.
고수현이 움츠린 송강우를 일방적으로 야단쳤다.
주차장.
이지성과 방기찬이 서로 인상을 푹푹 쓰고 삿대질했다.
노을이 지는 시간.
태건이 옥상 난간에 팔을 얹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외 휴게소에 모든 단원들이 모여 있었다.
음료수를 하나씩 든 표정들이 썩 나쁘지 않았다.
“얘기가 잘 됐나보네.”
분위기만으로도 어느 정도 감이 왔다.
태건은 곧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복잡했다.
정작 본인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고민이 있었다.
-채용이하고 성규가 왜 널 살렸는지 생각해 본적은 있냐.
얼마 전 오광휘 단장이 던진 화두였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그 화두가 24시간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틈날 때마다 답을 찾으려 했다.
빨갛게 물든 노을이 넓게 펼쳐진 불길처럼 느껴졌다.
정말 그렇게 변해갔다.
화르륵.
이내 아직도 생생한 그 장면이 겹쳐 보였다.
떠올린 그 순간.
“흡.”
파르르.
태건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몸서리쳐졌다.
태건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건 ‘소방관의 기도’였다.
신이시여!
열심히 훈련했고 잘 배웠지만 나는 단지 인간 사슬의 한 부분입니다.
지옥 같은 불 속으로 전진할지라도 신이시여,
…….
갑자기 읊조리는 이유가 있었다.
이채용 팀장의 충고였다.
-태건아 정말 두려운 순간이 오면 소방관의 기도 알지?
-그걸 외워. 아마 약간은 견딜 만할 거야.
그날부터 생긴 버릇이다.
중얼중얼.
태건의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이렇게나 두려웠다.
이내 태건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허어억, 헉헉.”
뚝, 뚝.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그 숨소리가 가라앉고야 태건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빛에 서글픔이 짙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왜 저만 나가라고 한 겁니까. 대체 왜.”
태건은 대뜸 원망을 쏟아냈다.
그러나 저 노을 너머 흐릿하게 떠오른 이채용 팀장과 박성규 얼굴엔 미소만이 가득했다.
그때 옥상으로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차자작.
그걸 들은 태건은 얼른 자신을 다잡았다.
“크흐흠.”
지하까지 파고들 거 같은 무거운 분위기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자신의 어둠.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옴과 동시였다.
터덕.
오광휘 단장과 1기 단원들이 옥상에 도착했다.
태건이 선 위치를 본 순간 오광휘 단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짜식, 거기 딱 서서 지켜보고 있었냐?”
태건은 태연한 태도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누워 있으려니까 좀 쑤셔서요.”
“귀 간지러워서 뛰쳐나왔겠지.”
“그렇다고 치고, 상담은 잘하셨습니까?”
태건이 화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 순간 오광휘 단장이 손가락 세 개를 내밀었다.
척.
“3일. 3일 후 본부장님 입회아래 재평가 실시하기로 했다, 이 말씀!”
“잘됐네요.”
태건은 놀라지 않고 덤덤하게 답했다.
그 반응에 오히려 고수현이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 들었어?”
“이 거리에서 들으면, 그게 개지 사람입니까?”
“이지성, 또 시비냐?”
카르릉.
고수현과 이지성의 대화가 대뜸 날카로워졌다.
그런 둘을 뒤로 하고 황대산이 나섰다.
“강태건이, 예상했단 그 미적지근한 반응은 뭐야?”
“정에 약하신 우리 단장님 성품이라면 그럴 거 같았습니다.”
태건이 슬쩍 칭찬을 했다.
듣기 좋았는지 오광휘 단장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크흠. 내가 좀 인품적으로다가 훌륭하긴 하지.”
“그보다 다들 바빠지시겠네요.”
“이젠 씹냐. 어쨌든 내 훌륭한 인품이 다들 바빠지는 거랑 뭔 상관?”
오광휘 단장이 갸웃거리자 태건이 수더분하게 답했다.
“1대 1로 과외하실 거 아닙니까?”
“뭐, 그거야……. 휘휘.”
오광휘 단장은 멈칫하더니 고개 돌려 휘파람을 불었다.
“크허험.”
“험험!”
다른 단원들도 정곡을 찔렸는지 괜스레 헛기침했다.
그럼에도 태건은 미소를 지었다.
“재평가 준비는 제가 전담하겠습니다. 후후.”
가느다란 웃음은 덤이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새벽녘부터 특수소방단 여기저기서 악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빨리, 강태건이가 뒤에서 쫓아온다고 생각해!
-아아악!
-뭐하는 거야. 태건이가 이 정도로 오케이 할 거 같아!
-끄아아아!
그 소리는 훈련장에서 재평가를 구상 중인 태건의 귀에도 들려왔다.
“뭐야, 타도 강태건이야?”
그래도 누군가의 목표가 된다는 게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싱겁게 미소 지은 태건은 구상을 이어갔다.
3일 후.
특수소방단 훈련장에 또 한 번 불길이 솟구쳤다.
화르륵!
그 주변에 몇 대의 소방차들이 대기 중이었다.
소방호스가 준비되어 있었고, 본부 대원들이 방화복을 갖춰 입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이혜지 행정팀장과 김여훈 지원팀장도 방화복 차림이었다.
“오랜만에 입으니까 불타오르네요.”
“행정직도 현역이란 걸 증명해 보여야죠.”
둘 다 소방관으로서 본능이 꿈틀거리는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훈련장이 훤히 보이는 장소에 박규영 본부장이 자리했다.
독특하게도 그의 앞엔 여러 대의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걸 서정민이 조작하고 있었다.
차자자작, 착!
“연결됐습니다.”
그의 기세 좋은 외침과 동시였다.
팟, 팟팟.
모니터에 하나 둘 영상이 떠올랐다.
-투다다다.
헬기소리가 각 모니터 스피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울렸다.
그리고 헬기에 자리한 서로의 모습을 비췄다.
오늘 재평가 받는 라텔 2기 단원들이었다. 그들 가슴께에 걸린 건 액션캠이 아닌, 스마트 폰이었다.
박규영 본부장이 각 화면을 보며 조금 놀라워했다.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더니, 허허.”
“다중영상통화를 응용한 겁니다. 세팅이 번거롭지, 이 자체는 기술이라고 말하기 민망한 수준입니다.”
“아닙니다. 정민 씨 덕에 이렇게 좋은 걸 알았습니다.”
칭찬 일색인 박규영 본부장의 감탄은 진짜였다.
그때 오광휘 단장이 무전기를 들고 옆으로 다가섰다.
척.
“본부장님, 재평가 준비 완료 됐습니다.”
“이번에도 1기 단원들이 요구조자가 되기로 했다지?”
“맞습니다. 그리고 제한시간도 똑같이 15분으로 적용했습니다.”
오광휘 단장이 덧붙여 말하자 박규영 본부장이 가볍게 눈빛을 반짝였다.
“짧은 기간 동안 어떤 발전을 이뤘는지 궁금하군.”
“한 말씀만 해주시면 바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진행시켜.”
투둥.
박규영 본부장의 묵직한 한 마디가 떨어졌다.
그 순간 오광휘 단장이 무전기를 누르며 통보했다.
띠릭.
“라텔캡 송신. 라텔 2기, 모조리 씹어 먹어.”
무전이 끝난 바로 그때였다.
- 투다다다!
어느새 다가온 헬기가 머리 위를 지나 훈련장으로 날아갔다.
같은 시각.
태건은 훈련장 내부의 어느 방에 위치해 있었다.
-띠릭. 라텔캡 송신. 라텔 2기, 모조리 씹어 먹어.
재평가 시작 무전이 들려왔다.
완전 무장을 갖춘 태건의 주변에는 불길이 가득했다.
화르륵!
대략 10미터 정도 여유거리가 있어 딱히 위협적이지 않았다.
안전장치는 그뿐이 아니었다.
소화볼과 대형소화기, 이산화탄소 소화기까지.
불상사 방지를 위한 철저한 대비책이 강구되어 있었다.
벽에 기댄 태건은 이내 초시계를 눌렀다.
띡.
“족집게 과외 위력 좀 볼까.”
읊조림을 멈추자 바로 침묵이 찾아왔다.
후르륵. 화륵.
그 침묵을 이리저리 몰려가는 불길이 흩트리고 있었다.
연기까지 짙어 불길 외에는 암흑이었다.
어느새 태건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불길을 따라갔다.
후우우!
‘넌 좌에서 우로.’
푸루룩!
‘치고 올라가다 막혔고.’
푸슈슝, 퐈악!
‘얼씨구. 지들끼리 치고받네.’
제각각 움직이는 불길의 흐름을 하나씩 읽어갔다.
좀 더 선명해진 감각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