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태건은 곧장 계약한 집으로 향했다.
5층 건물에 5층.
자그마한 엘리베이터까지 갖춰진 다세대주택이었다.
옥상 문을 연 순간 태건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이야, 진짜 마당이네.”
사돈에 팔촌까지 불러서 파티해도 될 공간이었다.
튼튼하고 널찍한 평상까지 존재했다.
척. 척.
태건은 감탄하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 구조는 전체적으로 넓어 개방감도 상당했다.
중개인이 호언장담한대로 어디 하나 손볼 곳 없이 깨끗했다.
“반지하에서 옥상으로 껑충이네.”
벌러덩.
태건은 거실에 대자로 누웠다.
이런 편안함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슥슥.
“히히. 좋네, 좋아.”
팔다리를 휘저으며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돈?
있다.
많이 있다.
그러나 쓸 수 없는 돈이기도 했다.
“그건 내 거가 아냐.”
중얼거리는 태건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조금씩 짙어졌다.
* * *
며칠 후 아침나절.
옥상 대기소 앞에 부단장조가 도열해 있었다.
특별하게도 모두가 평상복 차림이었다.
그 앞에 선 태건이 마주한 오광휘 단장에게 보고했다.
“부단장조 퇴근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첫 퇴근을 축하한다. 쉬는 것도 엄연히 출동준비태세의 연장선임을 명심하고…….”
오광휘 단장의 말이 길어질 뉘앙스가 강하게 풍겼다.
‘설마.’
태건과 부단장조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갔다.
고대했던 순간이 늦춰지자 초조함이 솟구쳐왔다.
그때 오광휘 단장이 반전을 걸었다.
저 멀리 힘차게 손을 뻗으며 짧고 굵게 외쳤다.
처억.
“자유를 찾아 떠나라, 이상!”
깔끔한 마무리에 부단장조 모두가 환호했다.
“……자유다!”
타다다!
누구라고 할 거 없이 동시에 뒤돌아 뛰었다.
그 선두엔 태건이 있었다.
옥상 문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뒤에서 오광휘 단장의 울컥한 외침이 들려왔다.
“짜식들아, 인사 안 하고 가냐!”
- 라텔!
구호가 멀찍이서 울려왔다.
부단장 조원들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빌어먹을 녀석들.”
오광휘 단장 혼자 투덜거릴 뿐이다.
곧 태건과 조원들이 본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물론 다른 직원들은 한창 출근시간이었다.
행정대원들이 보이자 태건이 밝게 소리쳤다.
“좋은 퇴근시간 입니다!”
그 소리에 다들 싱긋 미소 지었다.
“우린 출근이거덩!”
“아오, 진짜 얄미운데. 첫 퇴근이라 봐준다!”
“여긴 걱정 말고 푹 쉬다가 와!”
부드럽게 혹은 짓궂게 퇴근길을 축하해줬다.
웃으며 지나치던 그때였다.
차차작!
이순이와 삼식이가 기다렸단 듯이 나타났다.
출근하는 대원들에게 예쁨 받을 시간이다.
대원들도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는 원동력이었다.
“이순이, 잘 잤어.”
“삼식이. 밤새 더 컸네?”
“이거 아침 간식.”
쓰다듬기도 하고, 간식도 주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할짝.
비비적.
강아지들은 가볍게 손을 핥거나 애정표현으로 보답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화로운 모습이다.
그러나 그 속엔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태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부상조네.”
“서로 건강 체크하는 걸 알까 몰라.”
이지성도 눈치 챘는지 덧붙여 말했다.
그때 강아지들이 귀를 쫑긋거리더니 이쪽으로 달려왔다.
-헥헥!
붕붕.
꼬리의 움직임이 대원들을 대할 때와 사뭇 달랐다.
태건은 다가온 강아지들을 쓸어주며 말했다.
“집 정리 끝나면 데려갈게. 너희도 가끔은 퇴근해야지.”
슥슥.
벌써 오광휘 단장과 상의한 상태였다.
강아지들도 별로 유감이 없는 표정들이었다.
짤막한 인사를 마친 후였다.
“이제 진짜 퇴근합시다.”
“퇴근 절차 한 번 복잡하네.”
척, 척.
싱거운 농담을 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강아지들이 다가와 앞길을 막았다.
-크르릉.
-컹컹!
울음소리도 내고, 짖기도 했다.
태건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달랬다.
“가지 말라고? 내일 온다니까. 잠깐이야.”
슥슥.
다시 한 번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강아지들은 태건이 아닌 그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릉, 크르릉.
울음소리 속에 신경질이 느껴졌다.
그제야 의미를 알아챈 태건이 송강우와 노주민에게 말했다.
“어이, 후배님들 퇴근 보고 하래.”
“네? 선배님도, 차암.”
송강우와 노주민은 믿지 않았다.
그때 중간으로 불쑥 비집고 나온 고수현이 어깨를 두르며 놀리듯 말했다.
“좀 전에 성철이한테 인수인계 받았잖아.”
“……그거 장난 아니었습니까?”
“쟤들을 아직도 모르냐.”
고수현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그 타이밍을 맞춘 듯 태건이 옆으로 비켜서며 재촉했다.
“퇴근 안 할 거야?”
“빨리 해라.”
이지성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송강우와 노주민은 뭔가 아는 눈치인지 쭈뼛거렸다.
“이거 참.”
“좀 그런데…….”
갈팡질팡하며 뭔가를 망설였다.
태건은 흐르는 시간이 아까워 오래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럼 니들은 알아서 하고, 선배님들 가시지요.”
“그래 볼까나.”
척척.
태건과 고수현, 이지성은 바로 멀어져갔다.
정말 떼어놓고 가자 송강우와 노주민이 당황했다.
“선배님들!”
“같이 가요!”
터덕!
한 발을 움직인 그때였다.
이순이와 삼식이가 잽싸게 자세를 낮춰 경고했다.
-크르릉!
씰룩씰룩.
살짝 이빨까지 들어내어 위협의 강도를 높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송강우와 노주민이 잽싸게 거수경례했다.
“라텔!”
-…….
스윽.
강아지들은 인사를 받자마자 거짓말처럼 길을 열어줬다.
앞서 가던 태건이 슬쩍 돌아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저 젊은 아니, 어린 꼰대들.”
고수현이 싱거운 얼굴로 한마디 거들었다.
“기수는 엄청 따진다니까.”
“쟤들보다 일찍 들어와 천만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이지성도 거들어 말했다.
퇴근길 하나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라텔이었다.
* * *
잠시 후.
태건은 옥탑방에 도착했다.
아직 집안이 텅텅 빈 황량한 집안이었다. 보이는 건 틈틈이 가져다 놓은 옷과 개인용품들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입가에 미소가 가득 그려졌다.
“여기 오니까 진짜 퇴근한 거 같아.”
투욱.
늘 가슴 한편에 품고 있던 긴장감이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그런 순간도 잠깐이었다.
태건의 잔잔한 미소가 살짝 일그러졌다.
“물 한 잔 마실 컵도 없네.”
이건 아니었다.
휙!
태건은 숨 한 번 고르지도 않은 채 다시 밖으로 나갔다.
미리 작성한 쇼핑리스트를 펼쳐들고 폭풍 쇼핑에 돌입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여러 점포에 신출귀몰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가전제품 전문점.
스윽.
“이거 주세요.”
주방용품 판매점.
척, 척.
“이거, 이거, 이거하고, 이걸로 할게요.”
가구 전시장.
“지금 배송 되는 상품이 뭐 있죠?”
커피숍.
야외 테이블에 자리한 태건의 표정에 여유가 가득했다.
“바빠도 외출 중엔 커피 한 잔 때려야지.”
쪼옥.
볼살이 쏙 들어갈 정도로 아이스커피를 냅다 마셨다.
“으 시원해.”
태건이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쇼핑을 이어갔다.
슉슉슉.
점포를 드나들수록 태건의 양손에 짐은 무겁다 못해 벅찰 정도로 늘어갔다.
시간이 흘러 저녁이 찾아왔다.
그 몇 시간 사이 집안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비어 있던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구와 가전제품들이 채워져 있었다.
변화를 눈에 담은 태건이 흐뭇한 얼굴로 읊조렸다.
“사람이 노력해서 안 되는 건 없다니까.”
턱, 턱.
가장 고생한 두 다리와 지갑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게 태건이 나름 만족해 할 때였다.
-띵동.
차임벨이 울렸다.
태건은 놀라기는커녕 미소를 띠며 현관으로 향했다.
“왔네.”
이내 다가선 태건이 현관문을 열었다.
그르릉.
서서히 열리는 문틈으로 화장지가 보였다.
그 뒤로 깔끔한 옷차림의 정연미가 서 있었다.
태건은 가볍게 손을 들며 인사했다.
“안녕.”
잠시 바라보던 정연미는 이내 살짝 고개 돌리더니 입을 가리며 웃었다.
“……푸훗.”
“왜, 내 몰골이 말이 아니야?”
슥슥.
태건은 자신을 둘러보며 의아해 했다.
정연미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디에 있어도 오빠는 오빠구나 싶어서.”
“싱겁기는. 들어와.”
끼익.
태건은 현관문을 활짝 열어 맞이했다.
잠시 후.
태건과 정연미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정연미가 크게크게 둘러보며 소회를 밝혔다.
“집 정말 좋다.”
“구하느라 고생 좀 했지.”
은근히 자랑하는 태건의 어깨가 으쓱해져 있었다.
그런데 정연미가 계속 둘러보며 딴소리를 했다.
“소파며, 식탁이며, 신경 많이 써서 골랐나봐.”
“…….”
“그릇도 예쁘네.”
뭔가 핵심이 없는 말이 빙글빙글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