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이내 태건은 다시 발걸음을 이어가려 했다.
“이제 집에 가서 특식도 먹고 쉬어야지?”
강아지들을 앞세워 보금자리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걸어가려던 그때였다.
처적, 처적.
골목 가득한 주택들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올게.”
“잘 다녀와요.”
학생부터 직장인, 배웅하는 이들도 함께였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엇, 라텔에 이순이랑 삼식이다!”
그와 동시였다.
휘휘휙!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됐다.
“누구라고?”
“어디?”
“저기다!”
우르르.
금세 알아본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태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 이런.”
그런데 태건만이 아니었다.
-끼잉.
강아지들의 눈빛도 가늘게 흔들렸다.
그런 당혹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
태건과 강아지들은 인파에 묻혀 사라져버렸다.
시간이 지난 후.
주택 옥상에 태건이 강아지들과 함께 도착했다.
터덕, 터덕.
힘없이 평상에 다가간 태건은 그대로 쓰러졌다.
“허어어. 퇴근 한 번 요란하게 한다.”
스으윽.
지친 태건은 리드줄을 흘렸다.
그 순간 강아지들은 저쪽에 있는 개집으로 내달렸다.
쏙!
단숨에 안으로 들어간 강아지들은 쉽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곁눈으로 확인한 태건이 애써 미소 지었다.
“사랑도 많이 받으니까 벅차지, 요놈들아.”
싱겁게 읊조리며 이 순간의 적막함을 즐겼다.
* * *
그날 저녁.
정연미가 강아지들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호호. 이제 사람들 많은 데는 별로 안 좋아하겠네.”
“모르지. 익숙해져서 좋아할 수도 있어.”
“이렇게 귀여우면 다들 만져보고 싶지. 그렇지?”
정연미는 강아지들 얼굴을 번갈아 한 번씩 매만져줬다.
얼굴에 웃음이 걸려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가만히 관찰하던 태건이 나지막이 물었다.
“무슨 걱정 있어?”
“무슨 걱정?”
“…….”
태건은 말이 아닌 눈빛을 보냈다.
그 묵직한 시선에 정연미가 멈칫하며 쓴 미소를 지었다.
“오빠는 눈치가 너무 빨라.”
“한 사람에게만 특화된 눈치지.”
들썩.
태건은 덧붙여 말하며 느끼하게 눈썹을 들썩거렸다.
“…….”
정연미는 그 시선을 피하고는 강아지들을 더욱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헥헥.
강아지들은 대번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조용해지자 태건이 다시금 물었다.
“내가 모르는 게 좋은 일이야?”
“그런 게 어딨어. 사실 요즘……. 아니야. 그냥 오빠가 모르는 게 좋겠어.”
정연미는 멈칫하더니 말을 돌렸다.
태건은 깔끔하게 수긍했다.
“언젠가 말해주겠지, 뭐.”
“응. 그럴게.”
대답하는 정연미의 목소리가 묵직했다.
강아지들을 쓰다듬고 예뻐하며 밝아 보이려 했지만 그늘이 쉽게 걷히지 않았다.
‘뭐지?’
태건은 자그맣게 걱정이 서렸다.
정연미는 끝까지 태건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이유로 밝혀졌다.
늦은 밤.
태건이 작은 방에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끼익.
문을 열자 소파에 자리한 정연미의 통화소리가 들려왔다.
“응, 엄마……. 아니야, 곧 간다니까. 아빠는? ……또 술 마셨어? ……응, 나 잠깐만.”
스윽.
정연미는 태건을 보자 슬그머니 큰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빈 소파에 태건이 자리했다.
꿀렁.
“술 끊으셨다더니…….”
뭔가를 짐작했는지 태건의 표정이 깊게 가라앉았다.
잠시 후.
정연미가 운전석에 앉아 출발준비를 마쳤다.
부릉부릉.
“일찍 자고, 내일 출근 잘해. 출동하면 너무 무리하지 말고.”
밝게 인사하는 정연미 표정에 무거움이 엿보였다.
태건은 내색하지 않고 짓궂게 답했다.
“시간도 늦었는데, 어여쁜 여성분이 혼자 이렇게 운전하고 그러면 위험하지 않나?”
“응. 안 위험해. 갈게.”
정연미가 얕은수는 어림없단 단호함을 보였다.
그래도 장난이 통했는지 어두운 기색이 조금은 옅어졌다.
그걸 보고야 태건도 가볍게 인사했다.
“조심해서 가.”
“도착해서 톡 할게.”
부웅.
정연미가 서서히 차를 출발시켰다.
태건은 골목을 떠나갈 때까지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슬슬 헤어지기 싫어지네.”
의미모를 말을 읊조리며 몸을 돌렸다.
* * *
며칠 후.
비번 날이 돌아왔다.
태건은 승용차를 운전해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다.
부웅!
“급하게 샀는데 성능 괜찮아.”
얼마 전 퇴근길에 곤혹을 치르고 다급히 마련한 차량이었다.
출퇴근은 여전히 걸어서 하지만 그 외에 외출할 땐 가급적 차량을 이용했다.
덕분에 곤란한 상황을 많이 모면할 수 있었다.
태건이 달리고 달려 도착한 장소는 성남시 모란역 인근이었다.
그 중 대로변에 자리한 전자제품 판매점이 유독 시야에 크게 들어왔다.
“일렉마트. 오랜만이네.”
간판의 상호를 읽은 태건은 그쪽으로 차를 몰아갔다.
잠시 후.
태건은 일렉마트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 건강보조식품 상자가 곱게 들려 있었다.
매장 내부는 널찍하고 회사별, 품목별로 전자제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어서오세요. 일렉마트입니다.”
인사하는 직원의 목소리 끝이 약간 가라앉아 있었다.
그 이유는 매장 내에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이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태건은 방금 인사한 직원에게 마주 인사하며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점장님 계십니까?”
“약속하셨나요?”
“아니요. 개인적인 일로 찾아뵌 겁니다.”
“잠시만요.”
직원은 양해를 구하고 잠시 자리를 떠났다.
그 사이 태건은 좀 더 집중해 매장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전시된 제품들의 간격이 상당히 널찍했다.
무엇보다 신제품이 많지 않았다.
‘약주 찾으실만 하네.’
이렇게만 둘러봐도 경영난이 엿보였다.
그때 직원이 다가와 태건에게 말했다.
“점장님께서 지금 통화 중이라 조금 기다리셔야 될 거 같아요.”
“그럼 좀 둘러봐도 될까요?”
“네. 그럼요.”
“실례하겠습니다.”
태건은 양해를 구하며 매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면.
방금 대화한 직원이 갸웃거렸다.
“저 사람 어디서 봤는데……. 어? 어라, 어머나, 설마, 진짜?”
누군지 눈치챘는지 직원의 눈이 점점 크게 떠졌다.
같은 시각.
태건은 매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전시품을 쭉 살펴보자 자신의 추측에 확신이 섰다.
“그때 소개 받았던 신제품이 확실히 적어.”
얼마 전 집을 꾸몄기에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둘러만 보는 건 아니었다.
슬쩍슬쩍 다른 손님들 곁을 지나치기도 했다.
“실례합니다.”
“아, 네. 지나가세요.”
손님들은 화답하며 길을 열어줬다.
스윽, 슥.
옷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를 좁혀 지나갔다.
모두 태건의 의도된 행동이었다.
그렇게 둘러보는 태건을 어느새 다른 손님들이 힐끔거렸다.
“저 사람……. 맞지?”
“잠깐만, 며칠 전에 찍힌 사진을 내가 찜해 놨는데……. 어, 진짜 비슷해.”
“비슷하긴, 딱 그 사람이지. 그런데 여기까지 무슨 일일까?”
수군수군.
손님들은 하나둘 태건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태건은 지금 그 시선을 너무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제가 강태건입니다.’
속으로 자신을 알아봐달란 부탁을 읊조리기까지 했다.
평소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 태건이지만 오늘은 이유가 있었다.
그때 저쪽에서 놀랍게도 정희성이 나타났다.
정연미 아버지.
눈꼬리가 올라가고, 입꼬리는 내려온 그 모습이 예전과 똑같았다.
“손님이 오셨다더니…….”
스윽, 스윽.
매장을 크게 둘러보며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찾았다.
이곳 일렉마트는 그가 운영하는 매장이었다.
그런 그를 태건이 먼저 발견했다.
‘가자.’
가볍게 주먹을 쥔 태건은 지체 없이 다가갔다.
성큼성큼.
빠르게 거리를 좁혀가자 손님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리고 정희성도 이내 태건을 알아봤다.
“음? 자네가…….”
놀란 얼굴이 설핏 떠올랐다.
그 사이 태건은 정희성 앞에 도착했다.
처억.
당찬 모습으로 선 태건은 깊이 고개 숙이며 크게 말했다.
“아버님,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쩌렁쩌렁.
매장이 들썩일 정도로 씩씩한 인사였다.
순간 모든 손님들의 귀가 쫑긋거렸다.
‘아버님?’
아무에게나 입에 담는 호칭이 아니었다.
특별한 관계여야 가능했다.
‘그렇다면?’
번쩍, 번쩍!
손님들의 눈빛이 여기저기서 밝게 빛났다.
그뿐이 아니었다.
찰칵, 토도독.
젊은 손님들은 신속히 휴대폰을 꺼내 빠르게 놀렸다.
그 소리가 태건의 귀에도 생생히 들려왔다.
‘후. 쪽팔려.’
말만 그럴 뿐이다.
정연미를 위해서라면 더 한 일도 할 수 있었다.
한편 정희성은 주변의 변화에 적잖이 당황했다.
더불어 모두가 주시하는데 인사를 안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그래. 자네 왔나.”
“더 일찍 찾아뵀어야 했는데, 일이 바쁘단 핑계로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크흠.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지.”
스윽.
정희성이 먼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직원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원망의 눈빛을 읽었다.
‘왜 말씀 안하셨어요.’
‘점장님 나빠요.’
‘가기 전에 사인만이라도…….’
꾸욱.
어느새 챙겨든 종이를 움켜쥐며 애절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
정희성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를 태건이 정중한 자세로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