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곧 정희성이 점장실 소파에 자리했다.
태건은 그 옆에 단정히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섰다.
“아버님, 제대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스윽.
예의를 갖추며 서서히 자세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런 태건을 정희성이 다소 무뚝뚝한 목소리로 막아섰다.
“지금 절하는 건 오버 아닌가?”
“오랜만에 뵙는 어른에겐 이렇게 하는 게 도리라고 배웠습니다.”
“받는 내 입장은 편하지 않아. 그만 하고 우선 앉아.”
정희성이 딱딱하게 소파를 가리켰다.
태건은 밀어붙이지 않고 그 말에 따랐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건 약소하지만 건강 챙기십사하고 준비했습니다.”
처억.
테이블에 가져온 선물을 올리며 소파에 자리했다.
그러나 정희성의 시선은 태건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1년 하고도 반년은 넘은 거 같아.”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렇게 됐습니다.”
“그간 바빴더군.”
툭 던진 말을 태건이 얼른 받았다.
“제 소식에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한 생각은 마. 귀가 있어서 들은 거뿐이니까.”
“저는 방금 언급하신 그 이상한 생각 때문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태건은 대뜸 묵직한 말을 건넸다.
너무 직설적인 의미라 정희성이 살짝 멈칫했다.
“뭐라.”
“연미랑 지금도 잘 만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다음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분명 그만하라고 했을 텐데.”
정희성이 무겁게 불쾌함을 내보였다.
그러나 태건은 그 시선을 마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
“아직도 제가 아니, 제 직업이 탐탁지 않으십니까?”
“그……. 흐음.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는 존경해. 하지만 내 딸아이의 아빠로선……. 뭐라고 말하기 어렵군.”
“숱한 현장 출동 속에서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더 보여드려야 합니까?”
태건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희성의 대답이 전처럼 강경하지 못했다.
“증명해 보였어. 자네가 한 말을 지키고 있는 걸 나도 알아.”
“그럼…….”
“하지만 지금까지 일이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 지 모르지 않나. 난 그 걱정을 놓을 수가 없어.”
투욱.
대답하는 정희성의 날카로움이 한결 뭉뚝해졌다.
태건은 한층 강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그만 둘까요?”
“음?”
“모든 걸 놓고 연미를 택하길 바라십니까?”
“그야 물론……. 흐으음.”
정희성은 의외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등받이에 깊게 등을 기댔다.
라텔, 그리고 강태건.
당장 소방 일을 등지라고 하기엔 끈끈한 연관성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말도 쉽게 꺼내지 못했다.
긴 침묵 끝에 정희성이 말했다.
“인륜지대사를 이렇게 당사자도 없이 결정할 수 있나.”
“저희 뜻은 언제나 하나였습니다.”
“내가 다시 한 번 연미 입장을 들어보겠다잖나. 그 얼마간의 시간도 할애할 수 없나?”
정희성이 꾸짖듯 물었다.
확실히 전과 같은 단호한 거절은 아니었다.
태건도 이쯤에서 한 발 물러나는 게 예의였다.
그러나 맨입으로 물러날 순 없었다.
“얼마나 기다리면 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거 사람 참. 급하기는. 내가 연락 한다면 연락하는 거지.”
“그때까지 또 몰래 만나야 한다면 그건 싫습니다.”
“언제는 몰래 만났나? 연미 친구가 갑자기 아프다지 않나, 우리도 다 해 봤어……. 크흠.”
정희성이 툭 쏘아붙이다 아차하고는 헛기침으로 무마했다.
태건은 그 말을 듣고야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 아픈 친구 사연은 다시 들어도 참 애석한 거 같습니다.”
“어디서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찌릿.
정희성이 대뜸 흘겨봤다.
그 눈빛 속에도 전과 같은 날카로움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제야 태건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5부 능선은 가볍게 넘었네.’
조만간 적절한 때가 올 거란 확신이 들었다.
잠시 후.
태건과 정희성이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정희성이 먼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조만간 연락하지.”
“언제든 모시러 오겠습니다.”
꾸욱.
태건은 그 손을 정중히 맞잡았다.
이런 악수, 첫 만남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 행동 하나만 봐도 전보다 부드러워진 사이란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인사까지 끝낸 후였다.
스윽.
매장을 보니 조금 전보다 손님이 늘어 있었다.
정희성은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슬슬 고객들이 몰리는 시간이 됐어.”
“더 방해하지 않고 가보겠습니다.”
“가봐야지. 가야지 말고, 그런데……. 거, 크흠.”
정희성은 같은 말을 뱅뱅 돌리며 직원들을 눈짓했다.
바로 알아챈 태건은 흔쾌하게 응했다.
아니, 먼저 제안했다.
“감사한 분들에게 잠시 인사를 좀 드려도 될까요?”
“그야, 뭐 하고 싶은 대로 해.”
“허락 감사합니다.”
태건은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을 직원들은 물론 고객들도 두 눈 가득 지켜봤다.
반짝반짝.
기대감으로 가득 물든 표정들이 압권이었다.
이후 태건은 간단히 사인도 하고 기념촬영도 했다.
“하하.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팬서비스는 유독 밝고 활기차게 이어갔다.
그날 저녁.
SNS소식은 너무도 빨랐다.
그걸 일렉마트를 통해 다시 한 번 경험했다.
“우와, 벌써?”
태건은 하나둘 올라온 후기를 보며 적잖이 놀랐다.
-솔직히 싼 건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강태건 단원 얼굴 하나 보고 샀습니다.
-강태건 단원하고 악수하는 분이요. 여자친구 아버지에요.
-아버님이라고 할 때 딱 느낌이 왔다니까요. 저는 내일 다시 방문할 예정입니다.
-우리 집에 전자레인지가……. 망치가 어딨더라…….
다소 과격한 내용도 있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구매와 구매의향을 밝힌 내용이 많았다.
태건은 살펴보면서도 조금 어리둥절했다.
“이게 진짜 되네.”
그로 인해 여자친구가 있단 사실도 밝혀졌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살펴보던 중 정연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어떻게 된 거야?”
“아버님 뵌 지 오래돼서 인사드리러 간 거야.”
“아니잖아. 일부러…….”
정연미의 뒷말이 크게 흔들렸다.
태건은 잔잔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난 너의 웃는 얼굴이 참 좋아.”
“…….”
“앞으로도 웃을 일만 가득할 거야. 우리 연미……. 오빠 믿지?”
슬쩍 짓궂은 말을 곁들였다.
곧 정연미의 목소리가 한층 안정되게 들려왔다.
“응. 손만 잡고 잔단 말 빼고는 다 믿어.”
“그럼 손도 잡고 잘게.”
“됐네요. 그만 끊을게. 오빠…….”
뚝.
정연미가 말꼬리를 흐리더니 갑자기 전화가 끊어졌다.
“뭐야?”
태건이 눈을 끔뻑거릴 때였다.
카톡.
메시지 알림음이 울려 확인해본 태건이 싱긋 미소 지었다.
하트 가득한 이모티콘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뭘 더 바래.”
부스럭.
그대로 침대에 누운 태건은 미소 가득한 얼굴로 서서히 잠들었다.
태건은 일렉마트 방문이 일회성 이벤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태건의 커다란 착각이었다.
며칠 후.
저녁 무렵 라텔 2호 헬기가 본부 건물 옥상에 내려앉았다.
그릉.
슬라이드 문을 열자 온몸이 시꺼멓게 변한 단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 태건이 먼저 내려섰다.
“으쌰, 어윽!”
삐끗.
순간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태건이 조원들에게 말했다.
“다들 좀 쉬고 계세요. 보고 드리고 오겠습니다.”
터덕.
태건이 기능이 상실된 방화복을 벗으며 돌아섰다.
그와 동시였다.
“하아아.”
털썩, 철푸덕.
뒤에서 쓰러지는 소리와 더불어 한숨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그렇게 부단장조 모두가 옥상에 널브러졌다.
전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지친 모습들이었다.
잠시 후.
태건은 그을음 가득한 얼굴로 본부장실에 들어와 있었다.
척.
“라텔, 부단장조 복귀 완료 했습니다.”
태건의 경례에 박규영 본부장이 마주 경례했다.
“라텔, 현장 소식은 청주소방서장에게 들었어. 다들 괜찮나?”
“잠깐 아찔했지만 다행히 다들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그게 그렇게 웃으며 말할 일인가. 일단 앉지. 어서 앉아.”
박규영 본부장은 서둘러 착석을 권했다.
곧 두 사람은 응접소파에 자리했다.
어느새 따뜻한 커피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 사이 태건의 출동 현장 상황에 대한 설명도 끝나갔다.
“……그렇게 요구조자 네 명을 긴급후송했고, 다른 세 분은 응급처치 후 병원 검사를 권했습니다.”
“사망자는 다행히 없다지?”
“네, 천만다행히도요.”
태건이 지친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를 그렸다.
박규영 본부장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단 듯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다들 정말 고생했어. 하필이면 채석장에서 발파하는 날에 기계 오작동이 일어나다니.”
“위에선 불벼락 떨어지지, 사방엔 부서진 돌덩어리에 낙석에, 지상까지는 몇 백 미터 높이고, 아무튼 아찔하긴 했습니다.”
“그 속에서 다들 무사할 리가 있나.”
“지치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습니다.”
태건은 차분하게 답했다.
그러나 박규영 본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원래 교통사고도 당시엔 모를 때가 더 많아. 안 그런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한숨 돌리고 다시 한 번 단원들 건강상태 파악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도록 해.”
박규영 본부장은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 자체가 조금이라도 더 쉬게 하려는 배려였다.
태건도 알기에 수더분하게 말했다.
“그럼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물 받아 놨으니까 잠깐이라도 온탕에 몸 좀 담가. 그래야 긴장도 빨리 내려갈 테니까.”
“그건 꼭 성실 이행하겠습니다. 라텔.”
척.
태건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돌아선 그때 박규영 본부장이 아차한 얼굴로 말했다.
“아참, 예비 장인어른에게 좋은 소식이 들리더군.”
“……본부장님 기혼 아니셨습니까?”
“내 장인어른 말하는 줄 아나.”
찌릿.
박규영 본부장 표정이 대뜸 퉁명하게 변했다.
멈칫한 태건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제 예비 장인어른이요. 지치긴 지쳤나, 생각이 잘 안 되네요.”
“쯧. 얼른 가서 쉬기나 해.”
“실례하겠습니다.”
종종.
태건은 본전도 못 찾고 잰걸음으로 본부장실을 나섰다.
복도로 나온 태건은 휴대폰을 들어 먼저 노주민에게 전화했다.
“에? 부단장님, 어디신데 전화를 하십니까?”
“1층.”
“설마 올라올 기력도 없으십니까. 그래도 안 됩니다. 여기 모시러 갈 사람 없습니다. 대충 자리 깔고 쉬세요.”
노주민은 딱 잘라 거절부터 했다.
빠직.
태건의 이마에 힘줄이 살짝 돋아났다.
“피곤해 죽겠는데 이상한 말로 열 뻗치게 하지 마라.”
“그럼 왜 전화하셨는데요.”
“물 받아 놨단다, 뜨신 물에 몸이나 담그자.”
뚝.
대충 용건을 말한 태건은 전화를 끊었다.
동시에 1층 중앙복도 반대편으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