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예전 라텔 전용구역이었던 장소다.
지금은 지원팀 사무실과 식당, 체력단련실, 휴게실 등으로 개편되어 있었다.
그 중 샤워실과 목욕탕은 건재했다.
드륵.
태건은 가장 먼저 샤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내 태건은 자연의 모습으로 목욕탕 속에 자리해 있었다.
아직 아무도 내려오지 않아 혼자였다.
그런 태건의 손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무슨 소식인데 좋은 소식이란 거지?”
토도독.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조작했다.
이내 ‘일렉마트’와 관련한 게시물들이 검색됐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전자제품 관련 블로그 들이었다.
-일렉마트 탐방기.
-일렉마트엔 특별한 게 있다? 없다?
포털사이트에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들의 방문기로 보였다.
그 아래엔 각종 동영상 플렛폼의 영상들이 자리했다.
-화제의 일렉마트(feat, 라텔 강태건 대원)
-일렉마트 점장님과 독점 인터뷰.
몇몇 이름들은 태건도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었다.
각종 전자제품 리뷰로 꽤 유명한 이들이었다.
“오, 이 사람들이 움직였네.”
신뢰 있는 인플루언서들이 방문했다면 일렉마트에 확실히 도움이 될 터였다.
지쳤던 몸이 살짝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태건은 관련 기사를 발견했다.
“기사? 왜?”
깜짝 놀라 얼른 눌러봤다.
꾹.
“…….”
심각하게 내용을 쭉 훑어봤다.
이내 서서히 굳은 얼굴이 부드러워지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깜짝 놀랐네. 그런데 이게 사회뉴스야, 연예뉴스야.”
태건은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기사는 일렉마트에 유명 연예인들이 방문했단 소식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름만 말하면 알만한 대형 스타들이었다.
그 중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어느 중견 배우의 인터뷰가 눈길을 끌었다.
-라텔 소식을 접할 때마다 감사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무거웠습니다. 진정 그분들이 일에 몰두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심하던 차에 강태건 단원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분들 주변이 안정된다면 어떨까하는 제 짧은 생각으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태건은 그 인터뷰 내용을 보고 또 훑어봤다.
어느새 마음속에 묵직함이 들어앉았다.
이내 조용히 읊조렸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왠지 살벌무시한 불구덩이도 가뿐하게 느껴지네요.”
직접 전할 수 없지만 이렇게라도 마음을 보냈다.
그런 태건의 눈에 최근 기사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일렉마트 인산인해? 이게……. 헙.”
기사 속 첨부 사진을 본 태건이 헛숨을 들이켰다.
일렉마트 입구를 기준으로 대기줄이 만들어진 장면이었다.
그리고 매장을 나서는 이들 손엔 크고 작은 상자들이 들려 있었다.
사람들이 웃는 얼굴과 인터뷰도 짤막하게 실렸다.
-저렴하지 않다고 소문났는데 아니었어요. 특가행사 품목이 상당히 많아요.
-점장님이 직접 안내도 해주시고, 이렇게 사은품도 챙겨주셨어요.
-몇 달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엄청 바뀐 거 같습니다.
다들 좋은 말로 인터뷰 해줬다.
사람들 얼굴의 미소가 태건에게 그대로 옮겨와 있었다.
“이게 규모의 경제란 거지.”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본사에서 엄청 밀어주는 모양이다.
이건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가 만족할 일이다.
그래서 태건은 자신이 작정하고 벌인 일이지만 양심이 따갑지 않을 수 있었다.
태건은 이내 휴대폰을 목욕탕 턱에 올려놨다.
“어후. 물이 뜨뜻하니까 굳은 몸이 많이 풀어지네.”
가볍게 목과 팔을 돌리며 스트레칭을 겸했다.
왠지 없던 기운이 솟구치는 듯 했다.
그때 목욕탕 문이 열렸다.
드르륵.
“아으으. 아으으.”
단원들이 앓는 소리를 내며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들어왔다.
격한 현장출동의 여파가 가득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태건은 얼른 손짓했다.
“다들 빨리 들어오세요. 뜨신 물이 최곱니다.”
권하는 태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어느 날.
태건은 말쑥한 차림으로 식당 내실에 자리해 있었다.
옆엔 정연미가 다소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상황을 천천히 둘러보니 예전 일이 오버랩 됐다. 커피숍에서 식당으로 장소만 바뀐 듯 했다.
태건이 정연미의 손을 감싸며 여유롭게 물었다.
“그날의 속편인가?”
“지금 그런 속편한 소리가 나와?”
“다 잘 될 거야.”
태건은 짐짓 점잖게 다독였다.
그래도 정연미 표정은 썩 나아지지 않았다.
“아빠가 안 웃었어. 오빠 만나자고 하면서 한 번도 안 웃었단 말이야.”
“그래, 그래.”
태건은 침착하게 어리광을 받아줬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커흠.”
그 소리에 정연미가 살짝 굳어졌다.
“아빠다.”
“다 잘 될 거야.”
태건은 한 번 더 다독여 줬다.
곧 정희성까지 세 명이 내실에 자리했다.
분위기가 뭔지 모르게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다 대뜸 정희성이 물었다.
“식사부터 할 텐가, 대화부터 할 텐가?”
“말씀부터 듣겠습니다.”
태건이 나지막이 답했다.
그러자 정희성의 시선이 바로 정연미에게 향했다.
“연미, 너!”
“네?”
흠칫.
정연미가 화들짝 놀라 눈을 끔뻑거렸다.
정희성은 단호하게 말했다.
“친구 핑계 대는 건 이제 그만 해.”
“…….”
“나이가 몇인데, 그냥 태건이랑 있다고 하면 될 걸 말이야.”
“응……. 응?”
정연미는 순간 정희성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태건이 바로 눈치 챘다.
“앞으로는 마음 편히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버님.”
“그건 둘이 알아서 하고, 자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명심해. 그건…….”
정희성이 비장하게 밑밥을 깔았다.
그 순간 태건이 먼저 선수쳐 말했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단 약속은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하겠단 약속도 어렵겠습니다.”
태건의 이어진 말에 정희성 표정이 확 굳어졌다.
“뭐라고, 지금 날 면전에 두고 내 딸 몸 고생, 마음 고생시키겠다고 선전포고하는 건가?”
“살아가면서 희로애락을 빼놓을 수 있습니까.”
“…….”
“대신 그 모든 순간을 함께 하겠습니다. 절대 연미 혼자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투둥.
태건은 가슴 속 가장 깊은 진심을 꺼내 보였다.
“오빠.”
그렁.
정연미가 가슴 찡한 얼굴로 눈시울을 붉혔다.
태건은 가늘게 미소 지으며 정연미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한 정희성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그리고 너는 뭘 또 찔끔거려?”
투박한 꾸중이 툭 튀어나왔다.
진한 여운이 감돌기도 전에 와장창 깨져버렸다.
태건은 조금 억울했다.
“제가 일생을 두고 다짐한 약속이었는데…….”
“누가 니들 결혼시켜준다던?”
“네?”
“사귀는 거 인정해준다잖아. 그럼 됐지. 뭘 더 바래!”
턱.
정희성이 테이블까지 두드려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정연미가 불쑥 나섰다.
“아빠는 왜 그래. 우리 오빠가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건데!”
“이 녀석이, 아빠한테 어디 목소리를 높여?”
“너무하잖아. 이건 심하잖아. 마트가 성행하는 것도 다 우리 오빠가 해준 건데. 고맙단 말 한 마디도 안 하잖아.”
정연미가 그간 섭섭한 걸 모두 터트려버렸다.
그런데 정희성은 오히려 더욱 열을 냈다.
“이 녀석이. 마트 잘 되는 걸 내가 왜 고마워해야 하나.”
“아빠 너무 한다.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러기는, 나중에 다 너한테 갈 건데 홍보도 하고 그러는 게 맞지!”
정희성이 반박하자 정연미가 멈칫했다.
“아빠, 뭐라고?”
“그걸 내가 천년 만년 가지고 있을까. 때가 되면 나도 물러나야지.”
씁쓸해하는 정희성의 푸념에 정연미가 울상을 지었다.
“그, 그런 말을 지금 이렇게 하는 게 어딨어!”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
정희성은 말을 싹뚝 잘라 버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태건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아버님, 지금 은퇴를 말씀하기엔 너무 이른 거 같습니다.”
“크흠. 그렇지. 아무튼 이제부터 편안하게 만나도 돼.”
“저는 교제가 아니라…….”
태건이 다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정희성이 끼어들었다.
“어허.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
“…….”
“그리고 교제를 허락해 줬으면 됐지. 어딜 감히 결혼을 넘봐. 내가 어떻게 키운 금지옥엽인데!”
정희성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가만히 들어보던 태건은 이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 정희성은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억지를 부리는 거였다.
간파한 태건은 수더분하게 답했다.
“그럼 이제부터 하나씩 천천히 진행해 가겠습니다.”
“결국 내 딸을 달라는 건가. 어림도 없지.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야.”
정희성은 고개를 홱 돌리기까지 했다.
날카로움이나 경계심은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빠의 투정’이었다.
태건은 낯선 감정이지만 조금은 이해가 됐다.
‘주미가 누굴 데려온다면 아버지도 저러시겠지.’
여동생을 대입해보니 바로 수긍됐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식사 준비 됐는데, 들여도 될까요?”
그 소리에 정희성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들여 주십시오……. 내가 알아서 주문했으니까 그냥 먹어.”
태건을 향해 퉁명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잠시 후.
텅텅 빈 테이블에 격변이 일어났다.
반찬 놓을 자리가 없어 그릇을 이중으로 겹쳐야 했다.
그런 엄청난 진수성찬에 태건과 정연미가 놀랐다.
“이거 엄청나네요.”
“이걸 누가 다 먹어.”
그러나 정희성은 시큰둥하게 답했다.
“뭐 별로 차린 것도 없네. 그냥 속이나 채운다고 생각하고 먹어.”
한 마디도 곱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속내를 간파한 태건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잘 먹겠습니다.”
“먹든가, 말든가.”
정희성은 여전히 눈길도 주지 않았다.
태건은 더더욱 보란 듯이 수저를 바지런히 놀렸다.
“이거, 우와, 맛이 끝내줍니다. 이야, 이거 좋아하는데 여기서 먹네요.”
첩첩.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었다.
태건의 복스러운 식사 모습에 정희성은 틈틈이 힐끗거렸다.
그러다 무심히 물병을 밀었다.
스윽.
“뭘 대단한 거라고, 목이나 축이면서 먹어.”
“마침 목이 막히려고 했는데, 감사합니다.”
“거, 마른 거만 먹으니까 그렇잖아. 찜도 먹고, 탕도 좀 들고, 내가 이런 걸 신경써줘야 하나?”
툴툴.
정희성은 끝까지 한 마디도 곱지 않았다.
그런데 반해 태건에게 불편한 게 없는지 신경 쓰고 있었다.
참 솔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