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식사를 마친 후.
태건은 배가 불룩해져 식당 밖으로 나왔다.
“어휴휴, 숨도 안 쉬어져.”
“그러게 너무 많이 먹더라. 적당히 먹지.”
“이런 날엔 원래 최선을 다해 목 끝에 찰 때까지 먹어야 예쁨 받아.”
슥슥.
태건은 남산만 해진 배를 쓸며 말했다.
그때 정희성이 식당 밖으로 나왔다.
“어흠.”
“아버님, 잘 먹었습니다.”
“음식을 내가 했나. 왜 나한테 인사야.”
정희성이 여전히 튕기자 결국 정연미가 눈을 흘겼다.
“좀 좋게 받아주면 안 돼요?”
“내 마음이다.”
“유치해.”
정연미가 가볍게 도리질 쳤다.
이젠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정희성은 개의치 않고 태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대뜸 봉투 하나를 꺼내 불쑥 내밀었다.
“이건 그냥 차비야. 기름값 해.”
“네? 이걸…….”
“아, 팔 떨어져. 빨리 받아. 받으래도.”
휙휙.
정희성은 시선을 반대로 하고 봉투만 대충 흔들었다.
태건은 고민하지 않고 변죽 좋게 넙죽 받았다.
“어른이 주시는 용돈은 받아야지요. 감사히 잘……. 어?”
사락.
인사하던 태건이 심상치 않은 봉투 두께에 멈칫했다.
그걸 예상했는지 정희성이 얼른 선수 쳤다.
“그럼 볼일 다 봤으니까 난 그만 가지.”
“아버님. 이거 너무…….”
“어허, 받았으면 끝이지, 뭔 말이 많아.”
휙.
귀찮단 얼굴로 말하며 몸을 돌렸다.
이어서 정연미에게 툭 한 마디를 던졌다.
“괜히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고 적당히 놀고 들어와. 그럼 간다. 커흠!”
턱. 턱.
정희성은 팔자걸음으로 멀어져갔다.
태건과 정연미는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그러다 정연미가 먼저 어이없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 아빠 저러는 거 처음 봐, 진짜 웃겨.”
“오랫동안 반대하셨다가 갑자기 허락하려니까 멋쩍으신 거겠지.”
“그건 그렇고, 아빠가 얼마나 챙겨줬어?”
정연미가 눈빛을 반짝이며 궁금해 했다.
태건은 아예 봉투째 건넸다.
“봐봐.”
“어디 우리 아빠 통이 얼마나 큰지 좀 볼까……. 헤에!”
내용물을 확인한 정연미가 헛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만큼 용돈이라고 보기 어려운 거액이었다.
태건이 대신 잘 갈무리하며 말했다.“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오빠, 한 달에 한 번씩 마트에서 팬사인회 하자.”
“갑자기?”
“내가 이율 좋은 걸로 묶어 놓을게. 딱 5년만 적금식으로 부어도 이자가 얼마야. 그러니까…….”
척, 척.
정연미는 손가락까지 접어가며 이율 계산에 심취했다.
태건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직업병 나오네.”
그런 읊조림도 잠깐이었다.
저 멀리 정희성이 차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몇 년 동안 앓던 이가 빠진 거 같았다.
그 정도로 가슴 속이 시원했다.
그러자 정희성에 대한 이미지도 다르게 다가왔다.
‘다 입장이 다른 거지.’
완고한 그의 마음을 돌렸단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
그런데 일렉마트로 시작된 일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파급력은 태건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계속 커져만 갔다.
얼마 후.
정연미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빠, 자꾸 고객님들이 우리 지점으로 저금을 옮기고 있어.”
“무슨 소리야?”
“우리 지점 실적이 올라가고 있단 얘기야.”
정연미는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건은 그 불안함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좋은 거 아니야?”
“그런데 그게 나, 나 때문이래. 내가 오빠 여자친구라서 내 실적 올려주시겠다고 이관한단 분이 많아.”
“그래?”
“응. 나 좀 전에 VIP라운지 들어갔다가 왔어. 사모님인데 과장님한테 나 좀 잘 부탁한다고……. 나 좀 부담스러워.”
정연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제야 태건은 정연미가 불안해하는 이유를 눈치 챘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 물거품처럼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는 거였다.
잠시 생각한 태건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거 사라지는 거 아니잖아. 그렇지?”
“그런 건 아니지.”
“그럼 감사하다고 대신 인사드려 줘. 앞으로 더 좋은 모습으로 보답하겠단 말도 같이 전해줘. 그러면 돼.”
태건이 침착하게 답하자 정연미의 목소리도 조금 진정됐다.
“오빠한테 부담 주는 거 아니야? 난 그런 거 싫어.”
“그런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 일찍 승진하겠네?”
“놀리지 마. 난 부담스럽단 말이야.”
“후후.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 곤두세우지 않아도 돼.”
태건은 그렇게 정연미를 위로했다.
이내 전화를 끊은 태건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어윽, 난 부담시려. 왜들 그러세요.”
얼굴도 모르는 상대를 찾아갈 수도 없어 난처하기만 했다.
며칠 후.
이번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띵동.
차임벨 소리에 문을 열자 강주미가 서 있었다.
“혈육 투, 하이.”
“이젠 연락도 안하고 그냥 막 쳐들어 오냐?”
“있으면 얼굴 보고, 없으면 그냥 두고 가려고 했지.”
그릉.
강주미가 큼직한 캐리어를 하나 끌고 들어왔다.
태건은 그걸 보며 갸웃거렸다.
“님, 그거 뭐임. 월세 못 내서 쫓겨남?”
“헛소리 노노. 그쪽 선물.”
“네가? 나한테? 오늘 지구 최후의 날이냐?”
태건이 믿지 못하자 강주미 표정이 확 굳어졌다.
“내가 주냐, 난 심부름꾼이야.”
풀럭.
대답하며 바로 캐리어를 펼쳤다.
그 속엔 각종 면세품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우르르.
얼마나 꽉 찼는지 풀자마자 쏟아져 내리기까지 했다.
태건은 정색하며 휴대폰을 들었다.
“동생, 우리 자수해서 광명 찾자. 그래도 혈육이니까 사식은 넣어줄게.”
“자꾸 이상한 소리하면 꼬집는다.”
챙!
강주미는 대뜸 손톱을 세우며 경고했다.
태건은 그런 강주미를 향해 오히려 툭툭 쏘아붙였다.
“기내 면제품을 싹 쓸어온 거 같은데 선물은 뭔 선물타령이야.”
“이보세요. 전에 우리가 혈육이란 걸 공개적으로다가 인증하지 않았습니까.”
“빼박켄트로다가 태극항공사 SNS에 인증했지.”
태건이 인정하자 강주미가 바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요즘 비행하면 고객님들이 절 알아보신답니다.”
“설마 너 실적 올려줌과 동시에 나한테 선물하라고 했단 건 아니지?”
“어디서 보고 있었어? 그럼 좀 나와서 말리지. 내가 요즘 비행 때마다 얼마나 난감한 줄 알아?”
강주미는 억울하단 듯이 버럭버럭 따지고 들었다.
태건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
“내 일도 바쁜데 네 비행까지 쫓아다니겠냐.”
“아무렴 그럴 위인이 절대 아니지. 아무튼 난 전달했고, 이제 갈 거고. 바이.”
사락.
강주미는 인사와 동시에 쿨하게 돌아섰다.
그 순간 태건이 손을 뻗어 붙들었다.
턱.
“어딜 토껴. 갈 때 가더라도 어지른 건 치우고 가.”
“우와. 님 양심 어쩔. 내가 이렇게 무료배송 서비스까지 해줬는데!”
“내 덕에 승진한다며. 아니야?”
태건이 핵심을 정확히 짚자 강주미가 움찔했다.
“그건, 그렇지.”
“그런 이유로 왔으니까 기왕이면 청소 좀 해라. 커튼도 좀 빨고, 창문도 좀 닦고. 오케이?”
“……내가 보자보자 하니까 보자기로 보이냐!”
챙!
결국 강주미가 손톱을 꺼내들었다.
태건은 그 날카로운 흉기를 이리저리 피하며 소리쳤다.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잖아!”
“아, 열 불 터져. 이리 와. 오라니까!”
“너 같음 가겠냐? 메롱.”
우다다다!
한껏 놀린 태건은 계속 도망쳤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었다.
“으아아악!”
태건의 비명소리가 집을 넘어 옥상을 울렸다.
괜히 장난치다 된통 당하는 버릇은 어렸을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날 저녁.
태건이 평상에서 쌀쌀한 날씨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 평화로움과 달리 팔뚝은 아직도 욱신거렸다.
“손만 매워서, 그 성질을 누가 받아줄지 벌써부터 불쌍하다, 불쌍해.”
강주미가 없기에 태건은 소리 높여 비난했다.
그때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휴대폰이 크게 울었다.
삐리릭!
“헉! 허어. 깜짝이야.”
괜히 놀란 가슴을 움켜쥔 태건이 통화 상대를 확인했다.
-아버지.
상대 이름을 보고, 또 보고, 심지어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봤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 전화였다.
삐리릭.
벨소리가 두 번 울리자 태건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둘째입니다.”
“잤냐?”
“아니요.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혹시 집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태건의 목소리가 걱정으로 가득 물들었다.
그 순간 아버지의 날선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게 걱정되면 먼저 전화하지 그랬냐.”
“몇 번 전화했는데, 안 받아주셨습니다만.”
“평소에 잘했어야지.”
아버지의 화법은 언제나 일변도였다.
그래서 태건은 할 말이 없었다.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알면 됐고, 그나저나 넌 도대체 뭔 일을 어떻게 하고 다니는 게야?”
“저야 소방 일하고 있지요.”
태건은 무슨 일인지 몰라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대뜸 아버지의 구박이 들려왔다.
“그런데 왜 내 꿀을 내놓으라는 거냐!”
“누가요?”
“내가 어떻게 알아. 갑자기 전화 와서 꿀 있냐고 물어보는데.”
“이 한겨울에요?”
휘이잉.
때마침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살짝 몸이 움츠러들 정도였다.
양봉은커녕 꿀벌이 벌통 밖으로 얼굴도 안 내밀 시기였다.
태건의 의아함에 아버지는 더욱 역정을 냈다.
“저장 꿀이라도 내놓으라지 않나, 내년에 짤 꿀을 미리 선결제하겠다지 않나. 이게 뭐하는 거냔 말이야.”
“판로도 시원치 않은데 잘됐네요.”
“이놈아. 그렇게 사겠다면 내가 허투루 할 수 있겠냐.”
아버지의 엉뚱한 불만에 태건이 빙긋 미소 지었다.
“판매와 상관없이 늘 정성이셨죠.”
“그게 내 맘 같지 않아. 겨울엔 꽃이 없어서 설탕물 먹여야 되는데, 이 상황에 그게 되겠냐고.”
“그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니까.”
태건이 좋게좋게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건 아버지의 꾸중이었다.
“예끼! 안 되면 화훼농장이라도 알아봐야지. 그렇게 건성건성 할래?”
“아니요. 잘못했습니다.”
태건은 뭔가 이상했지만 일단 사과했다.
아버지의 푸념은 끝이 아니었다.
“이거 계속 꿀 사겠단 연락이 계속 오니, 미리미리 벌통을 늘려야 되나.”
“제가 벌통이라도 좀 사서 보낼까요?”
“이 애비 벌에 치여 다른 세상 가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냐?”
아버지가 대뜸 화를 내자 태건은 얼른 부정했다.
“절대 아닙니다. 고민하시는 거 같아서요.”
“안 그래도 이장하고 민구 아빠하고 찾아왔어. 같이 좀 하자고 말이야.”
“아아……. 그러셨군요.”
태건이 할 수 있는 건 대답 밖에 없었다.
이내 아버지는 툭 내려놓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어쩌겠냐. 내 새끼 얼굴 보고 사겠단 분들인데, 내가 꼼꼼히 둘러봐야지.”
“아, 네.”
“기업생활 청산한지가 언젠데 다시 QC(품질관리)를 하게 될 줄이야. 에잉, 끊는다.”
뚝.
갑자기 전화가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