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휴대폰을 내린 태건은 통화내용을 곱씹다 이내 갸웃거렸다.
“그래서 아버지는 왜 전화하신 거지?”
괜히 혼나기만 하다 끝났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전화한 의도를 정말 모르는 건 아니었다.
벌러덩.
평상에 누운 태건은 조금 황당함을 느꼈다.
“도대체 내 개인정보가 어디까지 새어나간 거야.”
부모님을 찾아 연락한 사람들이 대단하단 생각까지 들었다.
마음이 뜨끈뜨끈했다.
이 엄동설한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더 열심히 일하자. 더 열정적으로 구하자.”
태건이 이 고마움을 돌려 줄 수 있는 방법은 그거 밖에 없었다.
이제 조용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가족이 결국 등장했다.
태건과 강태영이 자취방 근처 야외 카페에 마주 앉아 있었다.
태건은 빨대로 음료를 가볍게 저으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달그락.
“갑자기 왜 찾아왔는데?”
“형이 동생 보러 오는데 꼭 일이 있어야 오냐?”
강태영이 수더분하게 넘어가려 했지만 태건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일이 있어야 찾아오잖아.”
“짜식, 형한테 그렇게 각박하면 못 써. 안 그래도 쌀쌀한데 꽁꽁 얼어붙게 만드네.”
강태영은 손까지 내저으며 좋게 말했다.
그래도 태건의 두 눈은 여전히 가느다랬다.
이내 태건은 번뜩 지난 일이 떠올랐다.
“맞다. 겨울인데 왜 감감무소식이야?”
“훗, 녀석. 안 그래도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다 준비해 왔지.”
차락.
강태영은 기세 좋게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자연스레 옆자리로 옮겨오기까지 했다.
태건이 힐끗 쳐다보며 목소리를 깔았다.
“왜 이래?”
“있어봐. 자, 지금부터 강태영 펀드매니저의 포트폴리오 브리핑이 있겠습니다.”
“형, 직장 옮겼어?”
태건이 처음 듣는 소리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강태영은 울컥하다 이내 억지 미소로 바꿔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니. 처음 들어간 회사에 아직 잘 다니고 있단다.”
“갑자기 펀드매니저 타령해서. 아무튼 결론이 뭔데?”
“시작도 안 했다. 일단 들어주는 게 예의 아니야?”
“응 아니야. 거두절미하고 결론만……. 아니다. 내가 그냥 보는 게 속 편하지.”
스윽.
태건은 그래프 가득한 종이와 거리를 좁혔다.
그 타이밍 맞춰 강태영도 동일선상에 위치하며 손으로 가리키기까지 했다.
“자자, 이거 봐봐. 내가 투자한 회사가 여기, 여기…….”
이내 자연스럽게 강태영이 그간 주가변동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태건은 의외로 잠자코 듣고 있었다.
사실 강태영이 이런 상황을 유도한 걸 진즉 눈치 채고 있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란 사실도 간파했다. 저쪽, 길 건너에 전문가들이 쓰는 카메라를 든 누군가가 있었다.
예전에 한 번 인사를 나눈 형의 직장동료였다.
거기까지 파악한 태건은 강태영을 바라봤다.
강태영은 아무것도 모른 채 설명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딱 이 지점까지 곤두박질 쳤다가. 여기, 바로 여기서 반등…….”
조잘조잘.
각종 주식용어를 뒤섞어가며 열심히 브리핑했다.
그러나 태건의 눈엔 허점이 가득 보였다.
강태영이 오버하는 손짓과 필요이상의 행동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뭘 해도 이렇게 어설플 수가.’
하지만 겉으로는 일절 티내지 않았다.
아무리 얄밉고 사고뭉치에다 고집 더럽게 센 강태영이지만 그래도 형이었다.
동생 덕 좀 보겠다는데 각박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이내 태건은 촬영하기 좋은 구도로 몸을 슬쩍 돌렸다.
거기에 적당한 제스쳐까지 더 했다.
스윽.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손실을 만회하기 시작했단 거잖아.”
“그렇지. 그 자세 딱 좋아. 아니, 그렇게 경청하는 자세가 투 플러스란 거지.”
“내가 소고기냐. 아무튼 그래서. 계속 해 봐.”
“여기서 왜 치고 올라갔냐. 그건 이 시기에 A기업에서 중대한…….”
슥슥.
강태영은 세상 진지한 얼굴로 손짓까지 해가며 썰을 풀었다.
태건도 가벼운 고갯짓이나 종이를 집어 가며 맞장구쳐줬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보면 뭔가 엄청 중요한 대화를 나누는 걸로 보일 터였다.
잠시 후.
대하드라마 급의 장황한 설명이 끝났다.
그런데 강태영의 표정이 어느 순간부터 불편해 보였다.
양심에 찔리는 모양이었다.
결국 강태영이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동생아, 사실은 말이다.”
“촬영 잘 됐대?”
“그래. 촬영……. 너 알고 있었어?”
강태영이 화들짝 놀라 바라봤다.
태건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대놓고 연기를 하는데 어떻게 몰라.”
“아…….”
“의좋은 형제 컨셉이야? 아니면 회사 홍보하는 컨셉이야?”
태건은 촬영의 방향을 꼬집어 묻기까지 했다.
강태영은 쓴 입맛을 다시며 답했다.
“그냥 너도 우리 회사에 관심이 있다 정도.”
“관심은 있지.”
“정말 있어? 제대로 투자설명 할까?”
“아니, 강태영 주임이 대리를 다는 게 빠를까, 잘리는 게 빠를까에 대한 관심. 후후.”
태건이 짓궂게 말하자 강태영이 삐쭉거렸다.
“요즘 좀 잘 나간다고 콧대 세우기는.”
“아무튼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야.”
태건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런 태건을 바라보던 강태영도 멋쩍게 웃었다.
“고맙다. 이걸로 보너스 받으면 한 잔 쏠게.”
“그건 마셔야지. 기대할게.”
“오냐. 짜식.”
강태영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잠시 후.
강태영이 직장 동료와 먼저 떠나갔다.
혼자가 된 태건은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접고 있었다.
“부모님, 형, 주미, 연미, 그리고……. 이제 없지?”
한 번 더 곱씹어보고야 태건은 마음을 놓았다.
그 중견 연예인의 인터뷰가 옳았다.
주변에 좋은 소식들로 가득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걱정과 고민에서 해방되자 남은 건 오직 소방 일밖에 없었다.
“누구든 걸리기만 해. 아주 다 살려버릴 테니까.”
꾸욱.
주먹을 쥐며 각오를 더욱 견고히 다졌다.
그 좋은 일들은 태건에게만 일어나지 않았다.
* * *
출근 길.
태건이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보통 출근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빨랐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라 거리는 한적하기만 했다.
“한가하니 좋네.”
출근 시간을 바꾸자 횡단보도 건너편을 둘러볼 여유가 생겨났다.
그때 네 명의 남자가 태건을 둘러싸듯 다가섰다.
스윽.
그 중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몸을 밀착시키며 스산하게 말했다.
“형씨, 어디 좋은데 가시는 길인가?”
상당히 위협적인 말투였다.
그런데 태건의 얼굴엔 전혀 긴장감이 엿보이지 않았다.
외려 어이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현 선배, 선배는 그거 안 어울린다니까요.”
그 소리에 상대가 모자를 훌렁 벗었다.
깔끔하고 단정한 고수현의 얼굴이 가득 들어났다. 말투도 평소 같이 약간 가볍게 변했다.
“그치. 이건 대산 선배가 어울리지?”
“대산 선배가 그러면 누구라도 긴장할 겁니다.”
“역시 이 준수한 외모엔 이런 음침한 설정은 어울리지 않아.”
스윽.
가볍게 턱을 쓸며 자화자찬했다.
태건은 그런 그를 외면하고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성 선배, 안녕하십니까. 강우, 주민, 너희도 방가.”
다른 조원들에게 먼저 인사했다.
그 인사도 각자 개성대로 답이 들려왔다.
“어제 본 얼굴인데 안녕하게 뭐 있어.”
“선배님 좋은 아침입니다.”
“너무 추워져서 이불 밖으로 나오기 힘들었습니다.”
가볍게 인사말이 오갔다.
그런 태건은 지금도 히죽거리는 고수현을 가리키며 이지성에게 물었다.
“수현 선배 텐션이 오늘 따라 엄청 높은 거 같지 않습니까?”
“몰라?”
“뭘요?”
“얜 또 왜 이래……. 송강우, 네가 알려줘라.”
스윽.
이지성은 손짓하며 떠넘겼다.
바로 그때 고수현이 나섰다.
“기왕이면 내가 말하는 게 좋지.”
“그래서 뭔데요……. 아, 신호 바뀌었습니다.”
저벅저벅.
파란불이 들어오자 다 같이 걸음을 옮겼다.
고수현은 태건과 나란히 걸으며 밝은 얼굴로 말했다.
“증평에 쪼까 일이 있지.”
“고아원에요? 어떤 소식입니까.”
“지자체에서 보조금 늘려준다고 하고. 직업전문학교에서 특별입학 제의 소식도 있고…….”
고수현이 말하는 소식에 태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말이요?”
“아직 안 끝났어. 사회로 나간 애들도 하나 둘씩 취업하고 있대.”
“우와. 그 친구들 취업이 어렵다 했잖아요.”
태건도 사정을 알아 맞장구치자 고수현이 헤벌쭉한 얼굴로 덧붙였다.
“우리 고아원 출신이라니까 좋게 봤나봐.”
“축하드립니다.”
“뭘 축하는, 그리고 또 있는데, 이건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고…….”
고수현이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 끝에 있던 송강우가 덧붙여 말했다.
“여러 기업에서 선물도 들어오고, 봉사도 나온답니다.”
“어떤 대기업에선 건물을 새로 짓잔 제의도 들어왔다던데요.”
노주민이 덧붙여 말했다.
그 말에 태건이 깜짝 놀라 고수현을 바라봤다.
“헤에, 정말입니까?”
“아직 의논 단계긴 한데, 뭐 그렇다고는 해.”
긁적.
고수현은 쑥스러운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태건은 아니었다.
“이야, 우와. 선배 숙원사업이었는데, 정말 엄청 축하드립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런데 동생들이 소방관하고 싶어하기는 하더라.”
멋쩍어하면서도 슬쩍 자기자랑을 얹었다.
태건은 거기에 맞장구쳤다.
“선배가 현장에서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내가 뭘. 다들 하는 건데 뭐, 쪼금 더 뛰어다니긴 했지.”
“그럼요. 제가 알죠. 라텔 에이스가 누군지는 제가 확실히 압니다.”
척.
태건은 엄지까지 들어보이며 확실히 띄워줬다.
그때 이지성이 툭 한 마디 끼어들었다.
“가장 중요한 소식은 왜 씹습니까.”
“뭐가 또 있습니까?”
“여러 복지원에서 선배 부모님 찾는 걸 돕겠다나봐.”
이지성이 시큰둥한 얼굴로 답했다.
하지만 태건은 아무렇지 않게 들을 수가 없었다.
터억!
반사적으로 고수현의 손을 붙들기까지 했다.
“수현 선배, 잘 됐습니다. 조만간 무조건 좋은 소식 들릴 겁니다.”
“그, 그렇지? 하하. 좀 쑥스럽구먼.”
“무슨 말씀을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 출동하자.”
이상한 결론에 태건이 멈칫하며 바라봤다.
“갑자기요?”
“라텔의 에이스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 보여드려야지. 아, 에이스의 숙명이란.”
절레절레.
고수현은 자신에게 도취되어 안타까움까지 내비췄다.
태건은 그 모습이 싫지 않았다.
‘승모근에 힘 만땅이네.’
큰소리치는 얼굴에 활기와 열정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