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262)화 (261/320)

262화

그런 태건의 어깨 위로 불쑥 고수현이 얼굴을 내밀었다.

“뭔데? 허, 허억……. 저, 저기 뭐야. 저거 왜, 왜 저래!”

“왜 또 요란, 백화? 하아. 뭐 같네.”

이지성은 욕조차 할 정신이 없는지 쓴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송강우와 노주민도 마찬가지였다.

“백화? 젠장, 가장 불안정한 색이잖아!”

“차라리 푸른색이던가, 아니면 빨갛던가. 흰색이 최악이라고!”

노주민의 말이 정확했다.

가장 뜨거운 불은 청화다.

그 파란 불꽃은 완전연소 상태에서만 나타나는 색이었다.

백화는 1000도씨가 넘는 고열이면서도 불완전연소 상태에서 발견된다.

불완전연소, 그 자체가 언제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단 불안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불안전의 끝은 태건이 가슴 미어지게 경험한 일이었다.

태건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동료들.’

휙!

몸을 돌려 단원들에게 서둘러 말했다.

“나가야 합니다. 다들 빨리 나가세요. 어서!”

선배들도 백화를 본 이상 아무렇지 않게 반응할 수 없었다.

“일단 나가자, 나가서 방법을 다시 강구해야 해!”

“돌아서, 얼른!”

사삭.

이내 단원들이 돌아서 출구로 방향을 잡았다.

“…….”

그런데 기다려도 태건의 출발 신호가 들려오지 않았다.

스윽.

고수현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보이는 건 태건의 얼굴이 아닌 등이었다.

떠덩!

태건의 등이 우직한 산처럼 자리해 있었다.

고수현이 멈칫하며 물었다.

“야, 라면, 너 뭐해?”

“먼저 출발하십시오. 곧 뒤따라갈 겁니다.”

“뭐?”

“다 뒤질 거 아니면 빨리 움직여요. 어서!”

휘익!

태건이 뒤로 손짓하며 보챘다.

정작 본인은 백화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무엇도 뺏기지 않아.’

으르릉.

호흡기 속 입술을 들썩이며 강한 적대감을 보였다.

솔직히 무섭다.

본능적인 두려움이다.

심지어 지금도 그날이 오버랩 되고 있다.

그때만 떠올리면 손발이 요동친다.

그러나 주저앉을 수 없다.

도망칠 수 없다.

이곳 어딘가 요구조자가 있다.

두 번 다시는 저 저주 서린 불꽃을 두고 돌아서지 않을 거다.

매일 곱씹던 그 날이.

바로 오늘이다.

“…….”

촤아악!

매서운 태건의 눈빛이 불꽃처럼 강렬한 빛을 흩뿌렸다.

바로 그때였다.

퉁, 지이잉!

헬멧에 둔중한 통증과 함께 뒤통수까지 아픔이 전달됐다.

“아, 씨, 누구야!”

“누군긴 짜샤, 라텔 에이스지. 휘우, 아주 화끈한 한 판이 되겠어. 글치?”

처억.

고수현이 태건과 나란히 서서 찡긋거렸다.

그 의미를 태건이 모를리 없었다.

“선배, 오기로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닙니다!”

“그러는 지는. 넌 뭐 대책 있어서 나대는 거냐?”

처억.

퉁명한 쏘아붙임과 함께 이지성이 나란히 섰다.

이어서 바로 뒤에 바짝 다가선 인기척들이 느껴졌다.

스윽.

그리고 송강우가 듬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화가 나타나면 무조건 도망치라는데, 발길이 안 떨어지네요.”

“백화를 제압하는 우리 모습이 싹 녹화되면 우린 대박 납니다용!”

노주민은 희열의 순간부터 그려지는지 목소리가 들떴다.

태건은 모두를 둘러보며 버럭 소리쳤다.

“지금 이럴 시간 없습니다. 빨리 나가란 말입니다!”

“그러는 넌 왜 이러고 있냐?”

“저야…….”

태건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그걸 고수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대신 덧붙였다.

“요구조자가 기다리니까.”

“그분들이 너만 기다려? 우리도 기다려.”

이지성이 별책부록 같이 한 마디 얹었다.

태건에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여기선 저도 목숨 책임 못 집니다.”

“내가 살려 달랬냐? 너, 똑똑히 들어. 쓸데없는 호의는 위선이고 거만이야.”

이지성이 냉소적으로 흘린 말이 날카롭게 태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흠칫.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었나?’

단원들 그 누구도 보호를 바라며 입단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은 뭘 신경 쓰고 있는 걸까.

곱씹을수록 이지성의 지적이 옳았다.

이내 태건의 호흡기 속에서 깊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요. 까짓것 죽고 사는 건 하늘이 결정하겠죠. 우린 그저 이 순간 최선을 다할 뿐.”

“저 그 말 알아요. 진인사대동단결!”

불쑥.

노주민이 엉뚱한 말로 끼어들었다.

그 순간 모두가 미간을 확 구기며 흘겨봤다.

“…….”

“……엇, 어어.”

스윽.

눈치로 뭔가 잘못된 걸 느낀 노주민이 슬쩍 뒤로 물러났다.

인상 쓰던 태건이 돌연 웃음을 흘렸다.“큭큭. 그래. 대동단결이다.”

“우리가 뜻을 모으긴 했으니까 말이 되긴 하네. 풋!”

“하여간 개똘.”

한 마디씩 흘리자 날이 가득 선 분위기가 한풀 누그러졌다.

그렇다고 긴장감까지 흘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온몸에 솜털이 쭈뼛 설 정도로 코너에 몰려 있었다.

이 순간 태건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가장 효율적이고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

그건…….

처억.

손을 들어 화학탱크를 가리키며 씹어뱉듯 말했다.

“핸썸, 개똘……. 탱크 사수.”

태건에겐 너무도 잔인한 지시였다.

그런데 고수현이 소방호스를 앞세워 지나가며 한 마디 했다.

“태건아, 이제 거기서 나오자. 오늘 우리랑 같이.”

“…….”

흠칫.

태건의 몸이 흔들리는 게 보일 정도로 동요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1기 단원들이야 속사정을 얼추 안다지만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줄 몰랐다.

그때 이지성과 송강우가 좌우를 비호하듯 거리를 좁혔다.

촤아악!

불길을 애써 밀어내며 이지성이 한 마디 했다.

“네 앞가림부터 단단히 하고 우리한테 잔소리해.”

“흐으음. 이제 하려고요.”

태건이 흔들리는 숨소리를 다잡고 굳게 말했다.

어느새 고수현과 노주민이 화학탱크와 거리를 좁혔다.거리가 상당히 멀어졌다.

헬멧 스피커에서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똘, 저 자식 거품샤워 시켜주자!

-좋습니다요. 어떠냐. 샤워가 얼마나 귀찮은지 맛 좀 봐라!

뽕뽕뽕뽕.

눈처럼 하얀 거품들이 뿜어져나가 화학탱크를 덮어갔다.

태건도 바로 대화하듯 말했다.

“순간적인 온도 변화로도 폭발할 수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개똘, 몸통 말고 연결된 파이프들 먼저 쏴!

-예썰!

뽕뽕뽕.

노주민이 바로 방향을 바꿔 이리저리 연결된 파이프들을 공략했다.

태건은 언제까지 지켜볼 입장은 아니었다.

솔직히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믿자.’

지금 자신이 뭘 해야할 지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걱정의 말은 건넸다.

“마지막 잔소립니다. 부풀기 시작하면 다 던져놓고 탈출하세요. 이건 부단장 명령입니다!”

-나도 안다니까. 너만 목숨 소중하냐, 나도 내 목숨 소중해!

휙!

저 멀리서 고수현이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보였다.

커버로 가려진 눈매가 가득 구겨져 있을 거다.

그러나 그런 그와 노주민의 모습은 이내 몰려온 불길과 연기에 가려졌다.

태건은 더 집착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지금까지 가늠한 걸 곱씹었다.

‘저 화학탱크, 문제가 없지 않아.’

근처에 있던 소형 화학탱크가 폭발했다.

그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리가 없었다.

거품과 물로 억제하는 건 결국 임시방편일 뿐이다.

문제는 태건도 계속 지켜보고 있지 않은 이상 언제 폭발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요점은 하나였다.

‘시간. 그것도 무조건 빨리.’

구우우.

묵직하게 결론을 지은 태건이 몸을 돌렸다.

이지성과 송강우가 확보한 공간을 유지 중이었다.

촤아악!

그런 그들에게 태건이 말했다.

“오른쪽. 뛰어!”

소리만 내지르지 않았다.

파바박!

누구보다 먼저 반응해 앞서 달려갔다.

남들이 보기엔 아무 대책 없이 불구덩이 속으로 다이빙하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가장 트러블 많은 이지성이지만 현장에선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다.

태건의 옆으로 물길이 쏘아져 갔다.

동시에 이지성의 짜증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식아, 카운트다운은 어디다 팔아먹었어!

“일일이 숫자를 언제 세고 있습니까. 여기서 좌회전!”

사삭.

방향을 외침과 동시에 태건이 몸을 틀었다.

한 번 본 연구소 1층의 구조 중 가장 중요한 부분들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걸 토대로 방향을 바꾸는 거였다.

퐈아악!

방향을 바꾸자 또 다른 물줄기가 앞길을 열어줬다.

송강우였다.

-그렇게 갑자기 꺾으시면 서포터하기 어렵습니다!

“프로는 그런 사정을 가리지 않아, 여기서 한 번 더 왼쪽!

휙!

태건이 또 한 번 급격히 방향 전환을 하자 이지성의 짜증이 귀를 때렸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새꺄, 거기 서, 당장 멈춰!

“이쯤일 텐데……. 그렇지. 이제 직진!”

-저거, 저, 저, 으씨, 바보라텔, 뭐해. 돌아가서 라면한테 밤새 잔소리 들을래!

-절대 싫습니……. 다라아랏차차!

이상한 기합소리를 내지른 송강우의 뜀박질도 빨라졌다.

정확하게는 앞이 탁 트여 뛰어가기에 최상의 위치였다.

이지성도 마찬가지였다.

스륵, 스륵.

그들이 거침없이 달려가는 사이 소방호스는 여기저기 방향이 꺾여 가고 있었다.

태건은 무작정 넓은 장소로 나온 게 아니었다.

촤아악.

뒤따라오는 단원들의 서포터를 받아가며 이내 목표한 장소에 도착했다.

“이쯤이지, 맞아!”

물길에 짙은 연기가 밀려나며 해당 장소가 나타났다.

원료배합실이다.

1층 평면도 중 유일하게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여기 있을 가능성이 높다란 거야.’

빨간색으로 크게 ‘제한구역’이라고 적혀 있었다.

테스트 제품을 만드는 기업의 핵심적인 비밀을 취급하는 장소다.

그만큼 안전에도 철저하게 대비했을 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