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이지성이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목숨이 달렸는데, 기껏 종이쪼가리?”
“그 종이쪼가리 챙기려다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럼 목숨만큼 소중한 거 아니겠습니까?”
“몰라, 우린 출발한다, 넌?”
이지성이 묻자 태건이 위를 가리켰다.
“2층에 다들 모여 계신답니다.”
“너 혼자야.”
“저보다 요구조자부터 챙기셔야죠.”
힐끗.
태건이 들것을 흘겼다.
그 순간 이지성이 눈에 불을 켜며 급발진했다.
“에라, 간다. 바보, 발 맞춰, 왼발, 왼발!”
“하나, 둘!”
척, 척.
이지성과 송강우는 서둘러 발을 맞춰 멀어져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건이 가늘게 미소 지었다.
“호흡이 많이 좋아졌네……. 이런!”
여유는 순간일 뿐, 갑자기 다급해졌다.
검은 연기들이 빠르게 몰려오는 게 포착된 탓이다.
출입문을 활짝 열어놓고 들어왔으니 곧 벌어질 상황이었다.
태건이 걱정하는 건 탈출 과정이었다.
잠시 후.
연구소 내부.
태건이 두 개의 소방호스를 좌우에 붙들고 물을 난사했다.
촤아악, 차아악!
잠깐 사이 불이 들이친 퇴로를 다시 확보하는 중이다.
“크윽.”
아무리 저항이 약해졌다고 해도 소방호스 두 개를 한 번에 작동하는 건 쉽지 않았다.
덕분에 태건의 얼굴은 가득 구겨져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소방호스를 건넬 누군가가 없었다.
뒤에 이지성과 송강우가 들것을 들고 있었다.
“라면, 서둘러. 빨리!”
“왼발, 왼발…….”
다급한 재촉에 태건의 마음도 벼랑 끝까지 내몰릴 정도로 다급해져 있었다.
“이런, 물을……. 에이씨!”
휙휙휙!
결국 참다못해 소화볼의 안전핀을 뽑아 내던졌다.
날아간 소화볼들이 연쇄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퍼버벙!
폭발력과 소화가루에 불길이 움푹 팬 거처럼 밀려났다.
그 작은 틈에 다시 물줄기를 난사했다.
“꺼져버려, 이 새끼들아!”
촤아악!
태건은 감정까지 가득 실어 불길을 좌우로 밀어냈다.
그러던 중 곧 반대쪽에서 물줄기들이 날아왔다.
솨아악.
대여섯 개는 되어 보였다.
그 선두엔 유중헌이 있었다.
“으아아아, 다 비켜, 비켜 이 빌어먹을 불들아!”
요즘은 소방호스를 잡아도 성격이 변했다.
그 과격함으로 인해 단숨에 거리를 좁혀 왔다.
우르르!
“우리도 간다.”
“크아아, 뜨거, 겁나 뜨거!”
그를 선두로 뒤따라 소방관들 몇몇이 나타났다.
그리 머지않은 거리를 뚫고 왔지만 방화복 곳곳이 불에 그슬리고 타들어갔다.
서로 가까워진 순간 태건은 가타부타 설명 없이 그대로 인수인계했다.
“중헌 선배, 그대로 유턴, 다시 길 열어요!”
“나? 이제 막 왔는데?”
“요구조자 숨넘어갑니다. 서둘러야 돼요!”
태건이 다급히 재촉하자 유중헌이 눈을 부릅뜨며 돌아섰다.
“으아아아, 다들 나를 따르라. 뚫어!”
“차아아아!”
우르르.
소방호스를 앞세운 유중헌과 소방관들이 다시 퇴로를 열었다.
태건은 얼른 비켜서며 들것이 지나갈 길을 만들었다.
“선배, 강우, 어서!”
“아자자!
”차자작.
들것을 든 두 단원이 서둘러 지나갔다.
이지성이 태건을 지나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싸악.
느낌이 이상했다.
이지성은 지체 없이 외쳤다.
“태건, 너 혼자 치고 올라갈 거 아니지. 기다려. 곧 올게. 기다려, 짜샤!”
그런데 태건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 …….
대신 송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까칠 선배, 라면 선배 뛰어가는데요, 라면 선배!”
그 소리에 이지성은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네가 내 말을 들으면 그게 라면이냐, 라면땅이지. 제길!”
“어쩝니까. 저기 불구덩인데!”
“뭘 어째……. 무조건 요구조자 먼저야. 치잇!”
척, 척.
이지성은 눈에 가득 힘을 준 채 발길을 재촉했다.
같은 시각.
돌아선 태건은 소방호스를 하나로 간소화했다.
처억.
그 호스의 물줄기를 앞세워 2층으로 향하는 계단부터 찾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계산이 오가고 있었다.
‘자흡식 호흡기 최대 가용시간 30분, 신고 후 경과시간은 25분 남짓.’
남은 시간은?
5분.
그 전에 요구조자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확인할 게 있었다.
“핸썸, 현재 그쪽 상황은 어떻습니까.”
-여기? 파이프 하나, 둘……. 좌우간 몇 개 작살났어. 여기저기 수증기에 이상한 가스 뿜고 난리야!
고수현은 억지로 침착성을 유지한 목소리였다.
이젠 그 정도는 눈치 챌 사이였다.
태건은 앞서 본 화학탱크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물었다.
“어디어디가…….”
질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그때였다.
연구소 바닥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우르르.
콰과광!
이어진 거친 폭발소리.
그리고 멀리서 밀려오는 후폭풍의 열기까지.
태건의 눈이 찢어질 듯이 떠졌다.
“선배, 개똘!”
목소리가 터질 듯 소리쳤다.
동시에 가던 길을 재빨리 비틀었다.파바박.
방향을 돌리자마자 다급히 바닥을 박차며 절규했다.
“으아악, 안 돼!”
후르륵!
불길이 앞을 가로막았다.
어쩌라고!
휙!
태건은 그대로 불길을 뚫어버렸다.
그런 태건의 귀에 고수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안 뒤졌으니까 미리 보내지 마!
-개똘도 무사합니다, 아니지. 저희 쪽이 아니었습니다!
그 소리에 태건의 두 다리에 급격히 힘이 빠졌다.
터덕, 터덕.
“헉헉, 무, 무사하다고? 아무 문제 없다고!”
어느새 거칠어진 숨을 흘리며 재촉해 물었다.바로 고수현의 대답이 들려왔다.
-여기가 아니라 안쪽이었어. 타이어 연구하는데 뭐 이렇게 터질 게 많아!
-핸썸 선배님, 저기 같은데요. 2층으로 이어진 파이프가 터진 거 같습니다.
-어어. 그러네……. 와, 저거 화학탱크랑 연결된 거 아니야. 후아, 후아, 살았다.
안도하는 숨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태건도 같이 안도의 숨을 툭 내뱉었다.
“푸우. 다행히 2층이랑 연결된 파이프……. 라고?”
이제 제자리를 찾은 눈동자가 다시 거칠게 흔들렸다.
2층.
황재열 연구원에 따르면 남은 요구조자들이 모두 몰려간 장소다.
지금 태건이 향할 장소기도 했다.
이 폭발에 영향이 갔다면?
터덕!
끔찍한 상상에 태건은 방화헬멧을 빈손으로 감쌌다.
정확히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아, 씨발. 으아아악!”
파바박!
태건은 앞뒤 재지 않고 무작정 달렸다.
그의 앞을 열어주는 건 한 줄기 소방호스뿐이었다.
촤아악.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런데 그 소망마저 산산이 부서졌다.
달려가던 도중 갑자기 소방호스가 막혔다.
퉁!
“크윽, 이건 또 왜!”
아무리 당겨도 딸려오지 않았다.
원료배합실보다 출입구에 가까운 위치였다.
그럼 길이가 부족한 게 아니라 어딘가에 걸린 게 분명했다.
지금 호스를 따라가 꼬인 걸 다시 풀어낼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시간이 곧 생명이다.
다른 소방호스는 어디 버렸는지 생각도 안 났다.
‘아으, 진짜 뭐 같네, 썅!’
터엉!
결국 태건은 화를 뿌리며 소방호스를 내던졌다.
태건은 불타는 연구소 한복판에 서 있었다.
소방호스 하나 없는 빈손이었다.
믿을 건 출동용품 뿐이다.
“푸우우우.”
숨부터 길고 깊게 내쉬었다.
그나마 트윈산소통이라 호흡에 여유가 있었다.
유일한 아니, 지금 상황에선 최고로 든든한 도우미였다.
난리가 난 속을 억지로 끌어 앉힌 태건이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운전라텔, 연구소 2층 평면도 입수했습니까?”
비로 유중헌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수했어. 그건 그렇고 방금 폭발로 입구가 다시 막혔어. 이쪽에서 다시 들어가려면 시간이 필요해!
“까칠, 바보는 현 위치 대기. 곧 제가 호출할 거니까 숨 한번 고르세요. 그리고 운전 선배.”
-까드득.
대답 대신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다음 유중헌의 전전긍긍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성아, 이 좀 그만 갈아. 그러다 치과부터 가겠어……. 어어, 불렀어?
“지금부터 2층으로 진입할 겁니다. 서포터 바랍니다.”
-뭔 소리야. 혼자 2층으로 간다고? 그건 안 돼!
만류하는 소리에 태건이 눈에 불을 켜고 쏘아붙였다.
“요구조자들 2층에 있답니다. 화학탱크는 언제 터질지 모릅니다. 아니, 다른 게 터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기다리라고요. 뭘요. 어떻게요!”
유중헌이 아닌 이지성의 따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나하고 바보하고 들어간다고!
-핸썸이야. 내가 라면 쪽으로 붙을까?
고수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태건은 단호하게 지시했다.
“전 단원 현 위치 사수할 것. 부단장의 권한으로 명령합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수색은 무조건 2인 1조야. 그걸 정한 게 너잖아!
“그래서 제가 제일 많이 어겼죠. 오늘도요. 더는 이견 안 듣습니다.”
척. 척.
태건은 다부진 눈빛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에선 선배들의 따가운 걱정이 쉬지 않고 들려왔다.
-라면, 이 새꺄.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어. 5분만 서 있어. 내가 갈게!
-라면아, 일단 이쪽으로 와. 여기서 같이 화학탱크 막으면서 시간 벌자. 제발!
“…….”
태건은 한 마디도 응답하지 않았다.
그들의 걱정, 이젠 곡해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깊이 감사했다.
그러나 5분이란 그 짧은 시간.
그 시간이 7명의 생명이 오갈 중요한 시간이었다.
‘다 살릴 겁니다. 그래야 제가 고개 들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위험과 고난도 지금 태건의 걸음을 막을 순 없었다.
생명을 구하는데 있어 한순간도 주춤거려선 안 된다.
태건의 머릿속엔 하나의 그림만이 가득했다.
그건 요구조자들과 이 지긋지긋한 현장을 빠져나가 한바탕 웃음 짓는 장면이었다.
‘꼭.’
상상을 현실로 이뤄내 보일 거다.
쿵, 쿵.
태건의 묵직한 걸음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불길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