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서두르던 태건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터덕, 턱…….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 앞에 거대한 불덩이가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중간보스네.”
괜한 소감이 아니었다.
- 화르르. 화르륵.
불이 사방으로 뻗어가는 모습이 마치 춤을 연상케 했다.
기다란 꼬리를 늘어뜨리며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것들을 시뻘건 불꽃으로 삼키며 자신을 키워갔다.
- 푸구구콰광!
그 불길은 역동적이고 현란했다.
지독한 섬뜩함 속에 형용키 어려운 아름다움이 엿보였다.
후르르륵.
거대한 불길은 계속 태건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같이 놀자고.
자신과 하나가 되자고.
그렇게 집요하게 유혹했다.
그 불바다를 태건은 똑똑히 마주하고 있었다.
피이잉-.
두 눈은 시리도록 차가운 한기로 가득했다.
저 불바다 너머에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다.
다른 계단은 멀리 돌아가야 한다.
그 말은 곧, 불바다와 정면으로 부딪쳐 뚫고 가야 한단 의미였다.
그래서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중이다.
쿠르르.
태건은 넘실거리는 불바다를 향해 싸늘하게 읊조렸다.
“내가 널 좀 알지.”
방심하는 순간 불이 흉측한 아가리를 벌려 공격해 올 게 분명했다.
태건이 냉소를 흘린 그때였다.
퐈르르르!
유혹하던 불길의 기세가 급변했다.
마치 계략을 들킨 듯 격렬한 기세로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결국 불길은 목적은 하나다.
-내 먹잇감이 돼라!
콰과, 쿠과과과!
순식간에 불길이 들이쳤다.
들이친 불길은 순식간에 태건을 감쌌다.
화르르륵!
정확히는 피할 장소도, 물러설 시간도 없었다. 눈 깜빡할 새도 없이 불길에 삼켜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속에 있는 태건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
치익, 치이이.
방화복의 방화기능이 격렬하게 반항했다.
뚫리지 않단 듯이 한 줄기 불길도 용납하지 않았다.
후르륵!
불길이 마치 작전상 후퇴란 듯, 잠시 물러났다.
그렇게 태건은 불길 속에서 당당히 버텨냈다.
하지만 무탈할 순 없었다.
치이익.
방화복 곳곳에서 하얀 김이 올라오고, 검은 흔적들이 생겨났다.
한 번은 버텼다.
그러나 두 번은 장담할 수 없었다.
“음.”
태건이 묵직한 탄성을 내뱉었다.
동시에 차가운 눈빛에 고요한 파동이 일었다.
‘이 정도라면…….’
시도해볼 만했다.
모종의 계산이 얼추 맞아떨어진 느낌이다.
이후 셀 수 없이 불길을 뚫고 나아가야 했다.
그러기에 방화복은 너무도 연약한 보호장비라 충분히 자신을 보호할 수가 없었다.
이내 태건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불에 휩싸였던 순간조차 가볍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이렇게 질척거리니까 널 싫어하지.”
가득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툭. 툭.
이어서 방화복에 새겨진 검은 흔적들을 가볍게 털어냈다.
그런 말투하며 행동까지.
태건이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마치 이 순간을 즐기는 느낌마저 풍겼다.
아니, 즐기고 있었다.
“후우우. 그래, 이 압박감이었어. 이걸 다시 느낄 줄이야.”
혼잣말 속에 ‘그리움’이란 감정이 섞여 있었다.
위기의 요구조자들.
사선에서 싸우는 동료들.
진퇴양난의 자신.
그리고 제한된 시간까지.
그 모든 게 합쳐진 지금, 그간 잠겨 있던 본능을 일깨웠다.
지이잉!
어느새 태건의 눈빛이 살벌함으로 가득 물들었다.
- THE LAST.
미국 소방계의 최정예 스모크점퍼.
그들의 히어로.
콜사인, 더 라스트.
바로 그 모습이었다.
변화한 태건에게 또 다시 불길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콰과과!
왠지 불길이 성급한 흐름이다.
태건의 변화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불이 지척에 다가온 그때였다.
스으윽.
태건의 손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이 너무도 느렸다.
…….
콰르르!
결국 태건은 또다시 불길에 삼켜졌다.
심지어 이번 불길은 예사롭지 않았다. 방화복마저 녹여버릴 강렬한 열기를 내뿜으며 소용돌이쳤다.
이대로 태건을 녹여버릴 심산이 확실했다.
그때였다.
태건이 소용돌이치는 불길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처억.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심지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 했다.
“더는 놀아줄 시간 없어.”
타다닥!
이내 태건은 거친 발걸음으로 불바다를 향해 돌진했다.
그런데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방화복 위에 하얀 무언가가 잔뜩 덧칠해져 있었다.
그 정체는 바로 거품이었다.
그리고 태건이 떠나간 자리에 폼형 스프레이 소화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게 태건의 불과 맞서는 해결책이었다.
거품의 기능을 역으로 뒤집어 방화복에 가득 뿌렸다.
그 결과 열기와 연기가 침투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런 자신의 변화를 태건은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타다닥.
…….
어느새 불바다 초입까지 접근했다.
태건은 눈을 부릅뜬 그대로 돌진했다.
“비켜, 꺼져!”
파바박!
불구덩이를 향한 태건의 뜀박질이 더욱 격해졌다.
불길들이 그런 태건을 순순히 지나가게 허락할 리 만무했다.
콰르르!
후르륵!
사방에서 불길들이 성난 기세로 태건을 공격했다.
그 공격에 태건은 그대로 불길에 삼켜졌다.
화륵!
…….
그러나.
푸아악!
태건은 불길을 뚫고 나와 계속 달려갔다.
불길은 사방에서 집요할 정도로 공격해왔다.
화륵.
불길이 또 삼켜버리면.
퐈악!
태건은 거짓말처럼 뚫고 나왔다.
삼켜지고, 뚫고 나오고.
그 과정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반복됐다.
모든 걸 집어삼킨 거대한 불길이 태건을 어쩌지 못해 고군분투했다.
그렇다고 태건이 무적은 아니었다.
스륵, 스르륵.
뛸 때마다 거품이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불길을 뚫고 나오는 순간적인 기류변화에 거품이 지워졌다.
조금씩, 조금씩 방화복이 제 모습을 찾아갔다.
그 면적이 넓어질수록 태건에겐 화끈함을 넘은 고통이 증가했다.
그럼에도 태건은 티끌만한 표정변화도 없었다.
파바박!
“…….”
눈을 부릅뜬 채 불길을 뚫으며 목적지를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이내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거품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방화복으로 돌아와 있었다.
푸슈슈슈.
방화복 가득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꺼멓게 타들어간 자국들이 셀 수 없이 늘어났다.
거의 기능을 상실한 모습이었다.‘마지막엔, 휴우.’
주르륵.
호흡기 커버 속에서 땀이 가득 흘렀다.
사실 마지막 불길은 오기로 밀어붙여 통과했다.
그래서 지금 이 모양이었다.
태건은 지금 자신의 행색은 안중에 없었다.
터억!
첫 번째 계단을 디딘 그 순간 크게 말했다.
“본부 지원팀, 강영직 대원!”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강영직 대원의 응답이 헬멧 속에 울렸다.
-강영직, 송신!
“4분 타이머 작동, 30초마다 통보, 사육!
-사칠, 타이머 대기 중!
태건은 곧장 계단을 박차고 올라가며 덧붙여 소리쳤다.
타다닥!
“스타트!”
4분의 제한 시간.
그건 생명의 시간이다.
태건은 그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제약을 걸었다.
굳이 멀리 있는 강영직을 선택한 이유?
지독한 FM이다.
지금은 타협이 없는 그 철두철미한 성격이 적격이었다.
시꺼먼 연기로 가득한 복도.
- 타다닥!
발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내 검은 연기를 흩트리며 태건이 2층에 도착했다.
터억!
숨 고를 시간 따윈 없었다.
태건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더 라스트, 2층 도착!”
곧바로 유중헌의 걱정 가득한 응답이 들려왔다.
-지금 넌, 네 상태는 어때, 괜찮아?
그에 대한 태건의 대답은 매정하고 차가웠다.
“현 위치 좌측에 C3연구실, 우측에 1회의실. 이상.”
유중헌이 뭔가 눈치챘는지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후웁……. 모터사이클 연구동으로 추정. 현재 방향으로 이동하면 특수장비 연구동으로 연결.
“확인, 수색 실시합니다.”
번쩍.
태건은 플래시 빛으로 복도를 밝히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2층 복도엔 연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얼마나 지독한지 아차하다가는 방향까지 놓칠 정도였다.
번쩍, 번쩍.
플래시 빛이 태건의 시야를 밝혀줬다.
타다닥!
두 다리를 구르고 굴러 종횡무진 했다.
그러면서 손에 잡히는 모든 문을 열어젖혔다.
벌컥!
“C6 연구실……. 클리어!”
그 소리에 맞춰 유중헌이 가장 가까운 장소를 미리 알려줬다.
-반대쪽에 자료보관실!
“이동……. 자료보관실도 클리어!”
타다닥!
태건은 한 시도 쉬지 않고 다급히 움직였다.
바로 유중헌의 안내가 이어졌다.
-모터사이클 연구동 끝. 좀 더 앞으로 가면 갈림길이 나와!
스스슥.
안내에 맞춰 태건의 눈앞에 가이드라인이 생겨났다.
마음속으로 그린 가상의 선이었다.
그 선이 지금 태건에겐 칠흑 같은 어둠 속 길잡이였다.
이내 두 다리를 박찬 태건은 가상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움직였다.
유중헌의 안내는 무척이나 정확했다.
타다닥!
“갈림길 등장!”
-그 앞에 문 있을 거야. 거기가 휴게실!
벌컥!
“휴게실……. 클리어!”
태건과 유중헌의 협동 플레이가 돋보이는 신박한 수색 방법이었다.
이 시계가 극도로 제한된 환경에선 최적의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