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요구조자들은 그렇게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태건의 입장은 달랐다.
휙.
몸을 돌린 순간 표정부터 사납게 변했다.
“운전, 까칠, 바보. 5분 내로 탈출로 확보 부탁합니다.”
이지성의 차가운 반박이 바로 들려왔다.
-여기 지금 연쇄폭발로 난리가 났는데, 뭐? 5분 내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여긴 방금 숨수건 깠습니다.”
-아으씨. 5분 내에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지성의 괴로운 목소리는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을 상상하게 했다.
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선포합니다. 라텔 둘.”
투둥!
두 번째 라텔의 강령이 발동됐다.
그건 바로 비상탈출이었다.
태건이 두 번째 강령을 꺼내든 이유는 하나였다.
왈가왈부할 시간도 없단 의미다.
라텔이라면 자다가도 달달 외워야하는 강령이다.
그 심각성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이지성의 목소리도 대번에 착 가라앉았다.
-라텔 둘, 확인. 교수라텔, 고도 낮춰주세요. 줄 타고 건물로 다이빙할 겁니다.
이지성이 세운 계획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막무가내였다.
절대적인 라텔 강령의 위력이기도 했다.
태건은 강령 발동했다고 마냥 기다리지 않았다.
안에서도 뭔가 탈출 방법을 강구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 태건의 눈에 검게 그을린 유리창이 떡하니 들어왔다.
저거다.
눈빛을 빛낸 순간 몸을 움직였다.
그르릉!
사무용 책상을 끌어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척 봐도 내화유리다.
강도가 보통 유리의 몇 배나 된다.
‘그래봐야 유리는 유리!’
비너를 움켜쥐고 약점인 창문 귀퉁이를 후려쳤다.
파강, 부스스!
유리가 산산조각 나며 무너져 내렸다.
내화유리의 특징이다.
창문이 깨지자 건물을 타고 올라가던 검은 연기가 안으로 들이치기 시작했다.
“다들 숨수건 단단히 붙드세요!”
“…….”
터덥!
요구조자들은 재빨리 양손으로 숨수건을 사수했다.
꼼꼼히 확인한 태건은 단원들에게 소리쳤다.
“출입구 확보, 여기 아래 소방호스 배치, 그리고 굴절사다리차 이쪽으로!”
-사다리차 어딨어. 운전은 내가!
-갑자기 확보? 어디……. 저기, 그래. 연기 사이로 보여. 지금 봤어!
-소방호스 저쪽으로 집중 부탁드립니다!
저 멀리 단원들의 신속한 모습이 보였다.
사다리차와 소방관들이 몰려왔다.
에엥! 삐요!
“빨리 위치 잡아!”
“1층이 연쇄폭발지점이야. 타고 올라오는 불길하고 연기를 집중적으로 막아!”
“발수!”
촤아악!
소방관들의 고함소리에 이어 물줄기들이 공격적으로 쏘아져왔다.
그뿐이 아니었다.
투두두.
하늘 높은 곳에서 대기하던 라텔헬기도 고도를 낮췄다.
헬기 좌우에 늘어진 로프들이 그대로였다.
그걸 본 태건의 눈빛이 바로 빛났다.
번뜩!
“바보, 회수한 레펠 장비들 챙겨서 이쪽으로 올려!”
그때였다.
지이잉.
사다리차가 깨진 창문으로 사다리를 뻗고 있었다.
그리고 유중헌의 격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라텔 둘인데 써먹을 건 다 써먹어야지!
-선배 빨리 올려요. 타고 올라가게!
이지성이 사다리차 바스켓에 벌써 자리를 잡고 서서 재촉했다.
그런 이지성 옆에 송강우가 헐레벌떡 다가섰다.
타다닥!
-헥헥헥. 레펠 장비, 챙겨왔습니다!
가쁜 숨도 미루고는 머리 위로 흔들어 보였다.
그런 그들의 시선이 2층에 고정되어 있었다.
태건은 바로 이유가 짐작됐다.
라텔 둘이란 강령이 발동한 이유도 있다.
그보다 현장에서 떨어진 공백시간이 길어서 저러는 거다.
-뒤는 우리에게 맡겨라.
-지금까지 애썼으니까 조금 쉬어.
그런 의미가 더 짙게 깔려 있었다.
두둑. 두둑.
다들 지금까지 충전한 체력을 쏟아낼 강렬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여간 못 말려.’
현장에서 활약 못해 안달 나는 병은 라텔이 유일할 터였다.
곧 길게 뻗은 사다리가 창틀에 닿았다.
터엉!
그 순간을 기점으로 요구조자들의 현장 탈출이 급물살을 탔다.
이지성과 송강우는 아예 2층으로 올라왔다.
“여기서 받쳐드릴게요. 조심해서 타세요. 조심, 조심.”
“아래 보지 마시고요. 2인 탑승 완료, 내려갑니다!”
지이잉.
두 명의 요구조자가 먼저 현장을 벗어났다.
같은 시각.
태건은 레펠 장비를 갖춘 홍시현 연구원의 고리에 로프를 체결했다.
“교수라텔, 체결 완료. 이동!”
태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홍시현 연구원이 떠올랐다.
부웅.
“어어어. 아악, 아아악, 나 죽어. 안 돼!”
홍시현 연구원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버둥거렸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 특징이었다.
홍시현 연구원이 일언반구도 없어 태건도 까마득히 몰랐다.
“저 나이까지 모르고 산 것도 문제가 없진 않은데…….”
2층이란 낮은 높이라 그냥 한 쪽 눈을 감았다.
그렇게 요구조자들의 탈출이 하나 둘 진행됐다.
그러던 중 모두의 헬멧에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 라텔 하나. 반복한다. 라텔 하나.
고수현의 외침이다.
그것도 단원 총 소집령이다.
나란히 선 태건과 이지성, 송강우의 머리 위에 똑같은 그림이 그려졌다.
- 화약탱크!
동시에 표정이 격하게 구겨졌다.
“결국, 쓰벌!”
“썩을!”
“염병!”
파바박!
태건과 두 단원은 번개 같이 방화구획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사다리차 바스켓이 2층에 도착했다.
기이이이. 텅.
그 속에 완전무장한 유중헌이 탑승해 있었다.
“라텔 하나라면서 날 빼고 튀었어? 복귀만 해봐. 내 밑으로 무조건 집합이야!”
파바박!
낮게 으르렁거린 유중헌은 바람 같이 사라졌다.
같은 시각.
벌겋게 달아오른 화약탱크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터더덩!
연쇄폭발의 여파로 뭔가 영향을 받았다.
그게 지금 화약탱크가 극도로 위험해진 이유였다.
태건과 단원들의 얼굴은 초긴장 상태였다.
“다들 침착해요. 침착.”
차분히 긴장을 풀려 시도 했다.
그러나 단원들의 귀에 티끌만큼도 전달이 되지 않았다.
“저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를 땐 침착할 수 있었어!”
“내용물을 밝혀놓고, 대체 어떻게 침착하란 거야!”
“라면 선배, 합성고무라면서요. 거기 불붙으면 웬만해선 안 꺼지는 거 아시잖아요!”
송강우까지 강한 어조로 반발했다.
태건이 홍시현 연구원에게 직접 내용물을 들었다.
일반 합성고무도 아니고, 타이어를 만들기 위해 온갖 화학물을 섞어 용해시킨 고위험 물질이었다.
이게 터지면 여기 모두 다 죽는다.
타이어 공장까지 화마에 휩쓸려 진짜 재난급 화재로 거듭날 수도 있었다.
그런 끔찍한 상상은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절대로 사수해야 한다.
결심은 그랬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빨간 불길 속에서 하얀 불꽃이 넘실거렸다.
퐈르르르!
화학탱크는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불안전한 소리가 계속 됐다.
여기만 문제가 아니다.
1층 가득 차오른 불길의 기세도 심상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태건과 동료들을 불길속으로 감아둘 기세였다.
그 위험천만한 곳에 지금 태건과 부단장조가 위치해 있었다.
물론 아무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방이 절망으로 가득한 현장임에도 눈빛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죄다 쏟아 부어!”
“으아아아!”
촤아악, 퍼버벙!
두 개의 소방호스에서 화학탱크를 집중방수 했다.
소화볼이 수도 없이 날아가 터지며 분말가루를 흩날렸다.
터더덩.
폼형 스프레이 소화기는 내용물을 모두 쏟아내고 발치에 나뒹굴었다.
모두의 손이 바쁜 그때 유중헌이 도착했다.
퍼벙, 치이익!
“도착, 계속 몰아붙여!”
유중헌까지 합류해 모든 개인 소화 장비를 거침없이 쏟아 부었다.
다들 한결같은 표정들이다.
굳건한 눈빛.
악다문 입술.
비장한 몸짓까지.
그렇게 태건과 부단장조는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해 화학탱크를 방어했다.
그 처절한 사투는 효과가 있었다.
콰륵, 화르르.
화학탱크 주변 가득한 불길들이 조금 약해졌다.
흐름으로 눈치 챈 태건이 희망 가득한 발언을 외쳤다.
“효과가 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지성이 태건을 노려보며 윽박질렀다.
“닥쳐! 그런 말 하면…….”
그의 뒷말이 이어지기 전에 화학탱크 주변에서 자그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과광!
순간 백화를 품은 열풍이 태건과 부단장조에게 몰아닥쳤다.
후르르!
불길도 아니고 그냥 열기다.
그러나 백화는 그 열기부터 차원이 달랐다.
뜨겁다는 표현은 식상했다.
방화복에 한 번 걸러진 열기임에도 온몸에 가득한 땀이 순식간에 말라갔다.
“크으으으.”
“사, 살이 타, 타들어가…… 는 거 같습니다. 아으으으!”
“수분이, 물기가……. 버, 버텨. 버텨내!”
다들 이를 악물고 그 자리를 사수했다.
지독한 열풍에 휩쓸린 이 순간.
시원한 물 한 모금이 간절했다.
다 벗어던지고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켜고 싶었다.
그 사소한 행복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럼에도 굳건한 두 다리는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 우리 라텔은 최전선에 뛰어든다. 그리고 최후의 방어선이다.
언젠가부터 오간 말이다.
그 한 문장이 라텔을 너무도 잘 표현해줬다.
모두 그 한 문장을 가슴에 품고 버티는 중이었다.
그런데 시련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아직 백화의 열풍이 끝나지 않은 시점이다.
쿠궁, 콰앙!
화학탱크에 연결된 또 하나의 파이프가 터졌다.
그리고, 그 여파로 인해 발생한 두 번째 열풍이 밀려왔다.
쿠오오오!
모든 감각을 최고조로 유지 중인 태건은 그 흐름이 똑똑히 보였다.
급속도로 다가오는 거대한 열풍에 태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씨이이, 바아아아!’
질끈.
“두 번째, 온다, 버텨!”
“뭐가 또……. 크으으으!”
“아흐으으으, 씨아아앙!”
쿠우우우우!
두 번째 열풍은 그렇게 모두를 훑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