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터억.
태건의 손이 오광휘 단장을 단단히 막아섰다.
그리고 오광휘 단장보다 더 절실하고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단장님은 다녀오시기라도 했죠. 그런데 전 아닙니다. 호적상 아주 클린한 상태란 말입니다.”
“뭐라고, 짜샤?”
옆에서 오광휘 단장이 한껏 째려봤다.
지금 태건은 그 시선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다급했다.
“저는 미래를 생각하는 여자 친구도 있는데……. 그럼 안 되잖아요, 선생님.”
“진정하세요.”
“지금 진정이 됩니까!”
벌떡!
끝내 태건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너무도 쫓기는 태건의 모습에 의사가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금 그렇게 된다는 게 아니라요.”
“…….그렇죠. 크흐흠.”
스륵.
무안해진 태건이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다시 자리했다.
이내 의사가 차분히 정리해 말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근무패턴을 가급적이면 빨리 바꾸시는 게 모두에게 좋습니다.”
“흐음.”
“저도 현실적으로 어렵단 거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건강이 곧 많은 분의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싱긋.
의사는 부드럽게 분위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다각도로 신경 써주는 게 강하게 느껴졌다.
의사가 조성한 긴장감은 거기까지였다.
태건은 그런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흘리며 다른 질문을 건넸다.
“지금 부상으로 입원한 단원들 상태는 어떻습니까.”
“전체적으로 큰 부상은 아니니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우선 유중헌 환자부터 살펴보면…….”
탈칵, 탈칵.
의사는 이내 단원 개개인의 검사결과를 보여주며 설명을 곁들이기 시작했다.
간간이 되묻기도 했다.
“음. 그럼 회복 기간을…….”
“입원 기간보다 재활치료를 더…….”
각 단원 별로 검사결과를 놓고 한참 동안 진지한 대화가 오갔다.
잠시 후.
상담이 끝나고 잠시 공원 벤치에 자리했다.
태건이 의사와 나눈 대화를 짤막하게 함축해 말했다.
“결론은 일주일 입원, 퇴원 후 출동은 해야겠지만 틈틈이 재활치료 병행이란 거네요.”
“현재 부상단원들 얘기고, 우리는 이따가 퇴원할 거고.”
오광휘 단장이 덧붙여 말하자 태건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출동은 어떻게 합니까. 단원들 중 반이 입원 상태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건데, 근무를 개개인별로 바꾸는 게 좋을 거 같아.”
오광휘 단장이 타개책을 제시했다.
가만히 생각하던 태건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적인 입장을 말했다.
“그래도 크게 바뀌는 건 없을 거 같습니다.”
“3기 모집을 당기는 게 가장 좋긴 하지. 그건 올라가면 건의 드릴 생각이고.”
“그전까지는 인원을 잘게 쪼개서 근무시간을 탄력적으로 바꾸잔 거네요.”
태건이 바로 이해해 맞장구쳤다.
그런데 오광휘 단장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근무 때마다 편성 인원이 달라지는 게 문제야. 한 팀이란 의의가 퇴색되기 좋단 말이지.”
“저는 조합이 다양해져서 오히려 기대되는데요.”
“하긴 나도 바보나 개똘이랑 출동한 적이 없네. 뭐든 일장일단이 있나 봐.”
오광휘 단장이 나름 진중한 분위기를 풍겼다.
사실 지금 아무리 고민해봐야 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였다.
태건도 알기에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우리는 슬슬 퇴원 준비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래. 우린 환자복보다 기동복이 어울려.”
스륵.
뒤따라 일어난 오광휘 단장이 장단을 맞춰 답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병원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정형외과 간호사실에 높다란 목소리가 울렸다.
“퇴원이 안 된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까 진료실에서 다 얘기됐다니까요. 전화해보세요!”
태건과 오광휘 단장이 놀란 얼굴로 항의했다.
그들 앞엔 어제 태건에게 환자복을 건네준 간호사가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정확히 입만 웃고 있었다.
비즈니스 미소를 지은 채 영혼 없는 친절한 말투로 설명했다.
“선생님께서 착오가 있었다고, 오늘 하루만 더 머물고 가시라고 전화로 말씀해주셨답니다.”
“병원에는 환자가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저희의 어딜 봐서 환자입니까.”
태건이 원론을 펼치며 항의를 이어갔다.
“옳소, 태건이 오늘 말빨 죽인다. 잘한다!”
오광휘 단장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나 간호사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완강하게 거부하실 거란 말씀도 있으셨어요. 그럼 이렇게 말씀드리라던데요.”
“뭐라고요?”
“비뇨기과 협진 요청할까요?”
투둥.
순간 태건과 오광휘 단장의 표정이 어색하게 변했다.
“어, 크흠. 그. 그럴 거까진 없습니다.”
“맞아. 그분들도 힘들게 일하시는데 우리까지 찾아뵙는 건 실례라고 봅니다.”
바로 기세가 누그러졌다.
간호사는 여전히 입만 웃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그럼 하실 말씀은 더 없으신가요?”
“네에, 실례했습니다.”
“잠시만요. 독감 주사 놔드리라던데요. 누구부터 맞으실 건가요?”
“…….”
척, 척.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를 가리켰다.
잠시 후.
간호사실 안쪽에서 소리만 들려왔다.
“찌를게요. 따끔.”
“으윽!”
이내 태건과 오광휘 단장이 나타났다.
둘은 똑같이 팔을 문지르며 다시 병실로 향했다.
“괜히 항의했다가 주사 한 대 더 얻어맞았네.”
“이거 과잉진료 아니야? 이렇게 막 찔러도 돼?”
투덜투덜.
병실로 향하는 내내 투덜거렸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날 저녁.
모두 병상에 누워 있었다.
병원에 입원한지 꼬박 24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그 사이 그들이 한 거라고는 먹고, 자고, 밖에 없었다.
매일 긴장 속에 있던 단원들은 어느새 좀 쑤신 얼굴로 변해 있었다.
병상을 가득 채운 황대산이 결국 불만을 토로했다.
“입원이 아니라 사육당하는 거 아니야. 먹고, 자고, 그거 말고 하는 게 없잖아!”
“대산아, 넌 사육 맞아. 그것도 야생곰.”
오광휘 단장이 심드렁하게 답하자 김지수가 숨죽여 키득거렸다.
“큭큭, 야생곰이래.”
“야, 엉뚱. 너 지금 웃냐?”
으르렁.
황대산이 한쪽 볼을 씰룩거리며 위화감을 조성했다.
상당히 거친 분위기였다.
그러나 김지수는 해맑은 얼굴로 손까지 들며 답했다.
“네!”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지금 내가 이렇게 막 인상 쓰는데, 웃음이 나오냐고.”
“네. 선배 지금 딱 화난 야생곰 같아요.”
김지수의 대답은 고속도로처럼 막힘없이 쏟아져 나왔다.
황대산이 이마를 짚으며 어이없어했다.
탁.
“하아. 난 진짜 쟤랑 안 맞아.”
황대산은 더 대화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런 이상한 대화의 흐름에 태건이 갸웃거렸다.
‘뭐지?’
그에 대해선 오광휘 단장이 답해줬다.
“쟤들 맨날 저래. 박수도 손뼉이 맞아야 되는데, 대산이만 매번 헛스윙 날려.”
“너무 신선한 조합이네요.”
“넌 재밌겠지. 난 지겹다. 뉴스나 보자.”
띡.
오광휘 단장이 바로 리모컨을 조작했다.
TV는 뉴스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타이어 연구소 화재의 이후 소식을 방영 중이었다.
화면이 갑자기 바뀌더니 화마가 휩쓸고 간 시꺼먼 연구소 내부를 비췄다.
그리고 너무도 익숙한 기자가 핀 마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이강찬 기자네?”
오광휘 단장이 반가워하며 소리를 키웠다.
띡띡띡.
그의 목소리가 곧 병실 가득 울렸다.
-저는 지금 화재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내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내부를 설명한 후 화면이 한 번 더 바뀌었다.
시꺼멓게 그을린 화학탱크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어?”
모두가 놀라워하며 시청했다.
곧 이강찬 기자의 전문이 이어졌다.
-라텔의 부상 소식 들으셨을 겁니다. 지금 보시는 이 거대한 화학탱크를 사수하는 과정에서 부상은 입은 겁니다. 이 화학탱크 속엔 수십 가지의 화학물질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스스슥.
화면이 바뀌며 하얀 가운을 입은 노신사가 말을 이었다.
자막으로 ‘연구소장’이란 직함이 떠올랐다.
-화학탱크가 폭발했다면 생산 공장도 연쇄적으로 폭발해 이곳 산업단지 전역에 엄청난 인명 및 재산피해를…….
-이 인터뷰를 빌려 다시 한 번 라텔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
연구소장의 인터뷰 후 이강찬 기자의 마무리 멘트가 방영됐다.
-본사 측은 화재 발생 원인 파악에 적극 협조 중이며, 내일 대표가 직접 라텔이 입원한 병원을 방문하기로…….
이내 이강찬 기자가 알려주는 소식이 끝났다.
태건은 그제야 하루 더 입원하는 이유를 눈치 챌 수 있었다.
“내일 대표이사가 온다고 우리를 묶어둔 거란 거네요.”
“흐음. 대체 뭘 얼마나 요란하게 하려고 멀쩡한 사람까지 묶어두는 거야.”
“그러니까 말입니다.”
오광휘 단장과 태건이 똑같이 씁쓸해했다.
그건 그렇고 태건은 이강찬 기자의 보도 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확실히 현장파야.’
직접 연구소를 찾아갔으며, 눈으로 보고 발로 뛰어다닌 노력이 화면으로도 엿보였다.
사실 태건은 화학탱크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몰랐다.
위험하단 추측과 예측을 했을 뿐이지, 피해규모까지 가늠할 수는 없었다.
연구소장의 인터뷰에 그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제 알게 됐다.
그 부분을 파고든 기자는 이강찬 기자가 처음이었다.
금산에서 첫만남 이후 라텔과 관련된 일은 열정적으로 파고들어 속을 긁어줬다.
라텔이 유명세를 타도록 발판을 다져준 기자기도 했다.
‘조만간 술값이 한 뭉텅이로 나가겠네.’
계속 어긋났던 술 약속을 이번에는 지켜야할 거 같았다.
그리고 다음날.
정말 타이어 회사 대표이사와 중역들이 찾아왔다.
두 개의 병실 내부가 각종 먹거리로 꽉 찼다. 채우고, 채워도 모자라 정말 허리 높이까지 켜켜이 쌓였다.
선물들에 치여 서 있을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라텔 여러분의 고결한 희생으로 저희 회사가 이렇게 무사히 오늘을 맞이했습니다. 약소하니 개의치 말고 받아주십시오.”
꾸벅.
대표이사가 정중한 감사 표시와 함께 정수리가 보이도록 고개 숙였다.
그를 따라 같이 찾아온 이사들도 예의를 보였다.
“아아아.”
다들 이렇게 기업의 총수와 중역들이 찾아온 경우는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찾아온 건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이 직접 연락해 각 방송사 기자들까지 동행했다.
찰칵, 찰칵.
“여기 좀 봐주세요.”
“이쪽도요.”
사방에서 셔터가 눌러졌다.
단원들은 놀랍게도 당황하지 않았다.
일전에 경험이 있던 터라 최대한 의연한 얼굴로 사진 촬영에 임했다.
그 기자들 사이에 이강찬 기자도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