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곧 오광휘 단장이 병실 한가운데 섰다.
그리고 대표이사가 준비해온 판넬을 같이 나눠들었다.
판넬 가득 내용이 적혀 있었다.
- 특수소방단 라텔에 평생 최고급 타이어 무상 교체 및 경정비 서비스 제공.
- 외상치료 전문 병원과 연계해 부상 치료비 전액 지원.
거기서 그치지 않고 대표이사는 금일봉까지 건넸다.
“약소합니다만 저희 마음입니다.”
“아니, 이렇게까지 하실 게…….”
“저희는 회사가 풍비박산 날 수 있었던 위기였습니다. 그런 위기에서 구해준 여러분께 이거밖에 해드리지 못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대표이사가 자신을 낮춰 정중히 예의를 차렸다.
태건은 그런 대표이사를 향해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식적이라도 저렇게 나와 주면 우리도 뛰어다닐 맛 나지.’
짝짝짝.
박수까지 치며 마음 뿌듯함을 표현했다.
그때 오광휘 단장이 힐끗 태건을 바라봤다.
가느다란 눈으로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
그 모습, 모종의 꿍꿍이를 꾸밀 때 나타나는 특유의 표정이었다.
‘왜요. 뭔데요. 괜히 사고치지 마요.’
그걸 본 태건은 갑자기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태건의 마음속 외침은 안타깝게도 오광휘 단장에게 닿지 않았다.
이내 오광휘 단장이 대표이사에게 말했다.
“대표님, 사실 제가 이 영광을 받는 게 계면쩍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게 부담되신다니요.”
“오늘의 영광은 제가 아니라 저희 부단장이 받아야 마땅하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부단장님이라면…….”
대표이사가 병상을 둘러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 말꼬리를 오광휘 단장이 바로 낚아챘다.
“네. 역시 대표님도 저희 부단장이 라면이란 걸 알고 계셨군요.”
“네?”
“크흠. 콜사인이 ‘더 라스트’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사나이, 그가 바로 강태건 부단장입니다.”
스윽.
오광휘 단장이 한껏 부풀려 소개하며 손짓까지 했다.
그 손짓을 따라 대표이사의 시선이 태건에게로 향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휘휘휙!
기자들의 카메라 앵글이 일제히 태건을 담았다.
그렇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태건에게 집중됐다.
찰칵, 찰칵.
“이번에도 강 단원이 한 건 한 거야?”
“안에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단장님이 괜히 저런 말씀하시겠어. 그리고 단장님은 후발대로 도착했다며.”
“선발대는 강태건 부단장이 지휘했다고 했어.”
기자들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 사이 대표이사가 한달음에 태건의 병상으로 다가왔다.
처적.
“부단장님, 제가 자세한 내막을 이제야 들었습니다. 먼저 찾아뵀어야 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슨 말씀을요. 다시 한 번 깊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터억.
대표이사는 태건의 손을 먼저 붙들며 진한 감사의 눈빛을 더했다.
태건은 솔직히 이런 순간이 달갑지는 않았다.
‘단장니이임.’
찌리릿.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를 오광휘 단장에게 쏘았다.
그러나 오광휘 단장은 짓궂은 미소로 그 레이저를 당당히 튕겨냈다.
‘큭큭큭.’
남몰래 입을 가리는 시늉까지 하며 웃었다.
태건은 도와줄 거라 기대도 하지 않았던 터라 실망도 크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벌어진 판이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대신 대표이사에게 확실한 사실을 말했다.
“저희만의 노력으로 이뤄낸 게 아닙니다. 현장의 모든 소방관들이 뜻을 모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겸손하시고 말씀도…….”
“대표님,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저희에 대한 관심이 너무 감사하지만, 함께 기뻐한다면 더 좋을 거 같습니다.”
태건이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대표이사는 화끈한 성격인지 바로 입을 열었다.
“출동해주신 모든 소방관분들을 두루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그분들도 웃게 해드리겠다고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해지네요.”
“마음이 편해지셨다니 저도 이제 미소가 지어집니다.”
꾸욱.
태건과 대표이사가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손을 묵직하게 맞잡았다.
찰칵, 찰칵.
그 화기애애한 모습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생생하게 저장되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갔다.
태건은 병동 휴게실에 이강찬 기자와 자리해 있었다.
기지개를 켠 태건이 쓰게 말했다.
“끄응. 이틀 병원에 있었더니 몸이 다 굳는 거 같습니다.”
“평소 운동량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보다 이번에도 열정적으로 취재해 주시고, 덕분에 이번 일도 크게 알려져 감사하네요.”
태건이 예의를 차리자 이강찬 기자는 넉살 좋게 말했다.
“기자가 기삿거리 쫓아다니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감사할 일도 많으십니다.”
“누구나 기사를 쫓지만 아무나 현장을 뛰진 않죠.”
태건의 말속에 가볍지 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강찬 기자는 계면쩍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기자라서 하는 얘긴데, 다들 많이 뛰어다닙니다. 매번 성과를 낼 수 없으니 꼼수를 좀 부리긴 하지만요.”
“사건 하나 발생하면 온 방송사에서 몰려간다면서요.”
“그러니 같은 내용만 주구장창 내보내는 겁니다. 후후.”
이강찬 기자가 쓴웃음을 흘리며 내심 이해를 바랐다.
태건도 몇 번 들었던 내용이라 수더분하게 받아들였다.
“그나저나 조만간 연락드릴까 했는데, 이렇게 만나서 더 좋네요.”
“그때 그 술 약속?”
“내심 기대하고 계셨던 모양이네요. 이거 부담스럽네요.”
이번엔 태건이 넉살을 부렸다.
같이 미소 짓던 이강찬 기자가 슬그머니 수첩을 꺼내며 말했다.
사락.
“부담을 줄이시려면 저한테 독종 하나 주시면 아주 깔끔하게 해결될 텐데 말입니다.”
“다 취재하셨던데, 궁금한 게 더 남으셨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날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때 구조한 분들 다 인터뷰했으니까 어설프게 말씀하시면 다 걸립니다.”
이강찬 기자는 은근슬쩍 으름장까지 놓았다.
태건은 얼른 두 손을 들며 항복을 표현했다.
“아이쿠. 그럼 솔직하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현장 도착부터 시작할까요?”
“암담했죠.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연기가 보였으니까요.”
“그다음은요?”
“도착하자마자…….”
태건 현장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시간 순서에 맞춰 말했다.
딱히 비밀로 숨길 일도 아니거니와 이강찬 기자에게 굳이 숨길 이유도 없었다.
몇 시간 후.
저녁 무렵이 되자 태건은 환자복을 벗고 기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오광휘 단장, 황대산, 김지수, 노주민까지.
총 5명이 퇴원 확정된 인원이었다.
그들은 떠나기 전, 옆 병실을 찾아갔다.
라텔로서 끈끈함……. 이 아닌, 단순히 놀리기 위함이었다.
이런 순간엔 오광휘 단장이 발군이었다.
“우헤헤헤, 우리는 집에 가지롱, 룡룡 죽겠지. 베에에.”
환자들이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봤다.
그 중 이지성이 차가운 얼굴로 냉소를 뿌렸다.
“부단장, 단장 임명 전에 지능지수 검사는 안 했냐?”
“저 자식이, 우씨!”
오광휘 단장이 주먹을 불쑥 내보였다.
그런 그의 옆에서 태건이 차지게 대답했다.
“단장 임명은 우석진 과장님 전권이라 전 관여한 적이 없습니다.”
“우 과장, 그 인간이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든 이유가 이거였네. 사고란 사고는 다 쳐 놓고 유학은 무슨.”
“저도 따지고 싶은데 어디 있는지 몰라서 패스.”
태건과 이지성이 대놓고 놀려댔다.
입술을 달싹이던 오광휘 단장이 결국 툴툴거렸다.
“너희는 뭐 잘났어? 너희가 제일 말 안 듣고 멋대로 행동하면서 누구한테 뭐래.”
그때 고수현이 끼어들었다.
“다들 그만해요. 애들도 다 있는데, 뭘 그렇게들 싸워.”
“그래. 고수현이 말 잘했어. 주둥이만 털지 말고 한 판 뜨라니까.”
그 소리에 오광휘 단장이 황대산을 노려봤다.
“황대산이. 너 지금 나랑 쟤들이랑 싸우라고 종용하는 거냐?”
“아니, 뭐 맨날 얼굴 보면 뭐라고 하니까 하는 말입니다.”
“너랑 지수만 할까.”
오광휘 단장이 툭 던지자 김지수가 손을 번쩍 들며 대답했다.
“네! 저 여깄어요.”
“……지금 너 찾은 거 아니야.”
“그럼 이제 찾아주시면 돼요.”
김지수의 마이웨이 화법에 오광휘 단장이 울컥했다.
“아……. 저 차원이 다른 엉뚱한 아이, 하아아.”
오광휘 단장은 급히 숨을 고르며 자신을 다독였다.
보다 못한 이지성이 다시 나섰다.
“갈 사람은 빨리, 빨리 좀 갑시다. 정신 사나워서 나을 것도 안 낫겠네.”
“니가 뭐 그렇게 대단한 부상자라고.”
“거참, 말 많네!”
“알았어, 간다니까. 어떻게 단장 말에 단 한 마디도 순순히 ‘네,’ 하는 녀석이 없어!”
오광휘 단장이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말이 오갈 때면 꼭 나타나는 인물이 있었다.
역시나 김지수였다.
“네!”
“너 말고, 짜샤!”
오광휘 단장이 윽박지르자 황대산이 발끈했다.
“왜, 대답 잘하는 애한테 짜증이십니까!”
“넌 왜 나한테 짜증부리냐!”
투덕투덕.
결국 사소한 입씨름이 말싸움으로 변질되어갔다.
매번 이러는 게 질리지도 않는지 똑같이 반복됐다.
가운데 낀 태건은 편두통이 지끈거렸다.
‘그 속에서 우린 대체 뭘 느낀 걸까.’
분명히 느꼈다.
백화를 저지하며 생명이 경각까지 내몰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분명 마음 깊은 감정을 공유했다.
그러나 그새 다 까먹었나 보다.
‘에휴, 내 인생아.’
이 투덕거림이 언제 끝이 날지 기약이 전혀 없었다.
태건은 이 병실에 더 남아있을 자신이 없었다.
이건 대단하고 엄청난 용기와 인내심을 요하는 문제였다.
‘난 아직 멀었어.’
이 숨 막히는 단원들 사이에서 빠져나가고픈 마음밖에 없었다.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천천히 나오세요.”
스윽.
태건은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병실을 나왔다.
뒤에선 여전히 단원들의 투덕거림이 계속됐다.
“황대산이, 단장 알기를 말이야. 어! 그렇게 우습게, 어! 그러면…….”
“맨날 그놈의 단장만 찾지 말고, 좀 어울리는…….”
“중헌 선배는 또 뭐하고 있어요. 지금 혼자 돌아앉아서 종이학을 왜 접고 있는데요!”
“나, 난 신경 쓰지 마.”
“조용히 좀 합시다!”
“왜 내 말에 아무도 대답 안 해!”
“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티격태격이 네버엔딩급으로 계속됐다.
홀로 복도로 나온 태건은 이제 좀 두통이 가라앉는 거 같았다.
“우린 멀었어. 아주 멀었어.”
단결, 단합, 협동.
이런 아름다운 단어들이 생에 찾아올 수 있기나 할까 걱정까지 됐다.
그렇게 복도에 서서 고개를 저을 때였다.
“어머, 이렇게 입고 계시니까 이제 라텔 같네요.”
“그러게. 아침까지만 해도 머리에 까치둥지 분양 중이던데, 호호.”
친근하게 건네 오는 대화에 바라보자 간호사들이었다.
때론 업무에 지쳐 형식적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이서 보살펴준 이들이었다.
태건은 미소를 지으며 넉살좋게 말했다.
“이제 가짜 환자들 쑥 빠져나가서 속 시원하시겠습니다.”
“좋기도 한데, 더는 가까이서 못 보니까 아쉽기도 한데요?”
“라텔의 미남들은 다 남아있는데요.”
“수현 씨하고 지성 씨가 잘 생기긴 했는데, 태건 씨도 나름의 매력은 있어요.”
장난 섞인 칭찬에 태건도 수더분하게 받아쳤다.
“저도 가끔 그런 느낌을 받긴 합니다.”
“……어후. 확실히 퇴원하실 때 됐네요. 얼른 가세요. 얼른요.”
“이제 진짜 가야죠. 아, 그 전에 잠시만.”
휘익!
여운을 남긴 태건이 순식간에 간호사들에게서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