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274)화 (273/320)

274화

잠시 후.

태건은 다시 나타나 간호사실에 다가섰다.

앞서 대화하던 간호사들이 갸웃거렸다.

“어디 다녀오세요?”

“이거요. 짜잔.”

터덕.

태건은 뭔가 잔뜩 올려 놓았다.

의아하게 안을 살피던 간호사들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우와, 스타킹이다!”

“머리끈이 너무 많아. 장사해도 되겠어.”

“이게 다 뭐에요.”

간호사들이 기쁨 가득한 얼굴로 물어왔다.

태건은 당당하게 말했다.

“단원들이 사고 쳐도 예쁘게 봐달란 뇌물입니다.”

“뭘 이런 걸 다.”

스윽.

간호사들은 거절하는 뉘앙스를 풍기며 슬쩍 선물을 챙겼다.

태건은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남은 근무시간도 파이팅 하십시오.”

“고마워요. 그리고 태건 씨도 다치지 말고 파이팅 해요.”

“감사합니다.”

태건이 수더분하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때 간호사들이 아차한 목소리로 붙들었다.

“맞다. 잠깐만요. 잠깐 시간 되세요?”

“음. 데이트 신청은 번호표 받으셔야 되는데. 몇 번까지 배부했더라, 30번이었나…….”

태건이 농담을 던지자 간호사들이 변죽 좋게 받았다.

“저희는 아니고 다른 분이 데이트 신청하실 예정이에요.”

“다른 분이요?”

“잠시만요. 스케줄 먼저 확인하고요.”

간호사들은 상대를 알려주지 않고 어디론가 전화했다.

곧 전화를 끊었지만 상대에 대해선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파바박!

누군가 벼락같은 속도로 정형외과 병동에 들어왔다.

“비켜요. 다 비켜!”

휙휙.

복도에 오가는 사람들을 피하며 다가오는 상대는 가운을 입은 의사였다.

그 의사를 본 태건의 마음이 덩달아 급해졌다.

얼른 간호사들을 바라보며 다급히 물었다.

“뭐예요. 응급입니까?”

“네? 호호.”

“웃지 마시고요. 저 의사분이 저렇게 뛰어오시잖습니까. 빨리 알아보셔야죠.”

태건은 마음이 급해지는데 간호사들은 여유롭기만 했다.

쏜살같이 달려온 의사가 곧 태건의 앞에 도착했다.

불과 이틀이지만 병원을 오가며 눈인사를 나눈 의사들 중 한 명이었다.

아니, 그는 좀 더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때 검사할 때, 나중에 따로 얘기 좀 하자고 하셨던 그 분!”

“헉헉. 네. 기억, 푸후, 기억하시네요.”

의사는 가쁜 숨을 고르며 놀라워했다.

가까이서 보니 태건과 비슷한 또래로 추측되는 나이였다.

목에 걸린 출입증에 ‘외상외과 성지훈.’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태건은 의아했다.

검사실에서 잠깐 만났던 게 전부다.

이렇게까지 다급하게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성 선생님은 죄송한데 무슨 일로 저를…….”

“어떻게 하면 라텔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성지훈의 질문에 태건은 순간 잘못 이해했다.

“지인 중에 저희 쪽을 희망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아니요. 저요.”

“……네?”

태건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성지훈은 너무도 당차게 자신을 가리켰다.

“저 성지훈, 라텔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투둥.

성지훈은 굳건한 얼굴로 말했다.

반면 태건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사……. 시죠?”

“네. 레지던트입니다.”

“수련 중인 전공의라면…….”

“아, 지금 3년 차고, 곧 전문의 시험 볼 겁니다.”

성지훈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반대로 태건의 말이 턱턱 막혔다.

“외상외과 전공의가, 그러니까 곧 전문의가 된단 거네요.”

“네.”

“아니, 제 말은 의사가 왜 소방관을 하겠단 거냐고요.”

“소방관 말고 라텔 할 겁니다.”

도돌이표 같은 성지훈의 대답에 태건은 순간 편두통이 확 몰려왔다.

지끈!

‘얘는 또 왜 이래.’

침착성을 끌어올린 태건이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이제 탄탄대로가 펼쳐진 분이 왜 3D인 소방관을 하겠다는 거냐고요.”

“에이, 의사라고 다 돈 잘 버는 거 아닙니다.”

“네?”

“요즘은 성형외과나 피부과 아니면 꽝이에요. 그냥 월급쟁이죠.”

성지훈의 심드렁한 대답을 태건은 가볍게 들을 수가 없었다.

“저희는 그 월급도 못 받는데요.”

“상관없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건 의사니까요.”

성지훈이 환한 얼굴로 답했다.

그러나 태건은 대화를 나눌수록 속이 꽉 막혀왔다.

‘이 사람 진짜 뭐지?’

한 번 더 마음을 다듬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니까 그 의사를 하세요.”

“네. 그러니까 라텔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또 똑같은 대화였다.

결국 참고 참은 태건이 터졌다.

“이봐요.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의사라며. 그냥 계속 의사하시라고!”

“그러니까 의사한다니까요. 그래서 라텔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니까요!”

“의사를 왜 라텔에서 찾냐니까!”

“환자가 거기 있으니까!”

이젠 성지훈도 버럭 소리쳤다.

태건도 존대고 뭐고 때려치우고 맞섰다.

“거기, 어디!”

“현장! 응급환자들! 당신들도 실려 왔잖아!”

성지훈이 속을 꺼내듯 복도가 떠나가라 소리쳤다.

그 소리에 태건이 멈칫했다.

‘엥? 잠깐만.’

띠리릭.

머릿속으로 방금 대화를 재빨리 한 번 더 정리했다.

그러자 뭔가 감이 왔다.

“그러니까 성 선생님, 현장에서 발생하는 응급환자를 그 자리에서 응급처치하고 싶어서 라텔에 지원하신다고요?”

“이제 좀 알아들으시네!”

“……언제 그렇게 말했는데, 내가 정리해주니까 그제야 맞는다고 하면서!”

태건이 따졌지만 성지훈은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말했다니까!”

“와, 강적이다.”

태건은 순간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이건 또 무슨 성격이란 말인가.

당최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혼자 생각하고 그 생각대로 말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는 아예 말하지 않았다.

이런 유형의 성격은 태건도 처음이었다.

‘나 퇴원할래!’

이 순간 태건은 빨리 병원 밖으로 탈출하지 않은 자신을 후회했다.

*  *  *

한 시간 후.

특수소방단 소속 미니버스가 서울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부우웅.

그 속에 태건과 퇴원한 단원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태건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경치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성지훈이라고 했지.’

부르르.

떠올리자 몸이 절로 반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집불통에 집착까지 심했다.

태건은 라텔 3기 모집 시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몇 번이고 설명했다.

그래도 성지훈은 당장 지원하겠다고 생떼를 썼었다.

얼마나 끈질겼던지 그 얼굴만 떠올려도 지긋지긋했다.

휙휙!

태건은 재빨리 머리 위에 떠오른 성지훈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그때 오광휘 단장이 슬며시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스윽.

“아까 그 의사, 이름이 뭐였지?”

방금 지워버린 얼굴이 또 다시 떠오르자 태건이 흠칫했다.

“헉!”

“왜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고 그러냐?”

“만나 보셨잖아요. 앞뒤가 꽉꽉 막혀서 숨도 안 쉬어지는 그 답답함 말입니다.”

태건이 머리부터 흔들자 오광휘 단장이 꽤나 흥미롭게 바라봤다.

“네가 이러는 반응은 오랜만인데?”

“오죽하면 이러겠습니까. 성격 진짜…….”

절레절레.

태건은 더 말하지 않고 도리질로 대신했다.

그런 태건을 바라보는 오광휘 단장의 입이 이상하게 다물어져 있었다.

“…….”

너무 조용하자 태건이 힐끗 쳐다보고는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요새 들어 우리 주변에 이상한 사람들이 자꾸 모여드는 거 같아. 그렇지 않냐?”

“…….”

순간 태건이 가만히 바라보자 오광휘 단장이 미간을 좁혔다.

“그 불성실한 시선은 뭐야?”

“뭔가 느낌이 오신다면 아마 그 기분이 맞지 않을까요.”

“결국 내가 문제란 거냐. 이게!”

꽈악.

오광휘 단장은 재빨리 손을 뻗어 헤드락을 걸었다.

태건에겐 당연히 고통이 찾아왔다.

“아악.”

“입 다물어. 그리고 내가 뭘 어쨌는데, 특이한 걸로 따지면 네가 더…….”

조잘조잘.

오광휘 단장은 억울한 심정을 일장연설로 풀어냈다.

태건은 머리를 조여 오는 압박과 동시에 귀가 함께 아파왔다.

“으으으.”

서울로 되돌아가는 길이 태건에겐 고난, 그 자체였다.

오후시간.

본부장실에 태건과 오광휘 단장이 나란히 자리했다.

박규영 본부장이 찻잔을 내리며 첫마디를 꺼냈다.

탈칵.

“그래서 입원한 대원들은 다음 주는 되어야 퇴원한다는 건가?”

“그렇게 될 거 같습니다.”

“그럼 라텔 운영을…….”

박규영 본부장의 목소리에 깊은 고민이 느껴졌다.

예상했던 부분이라 태건이 슬쩍 손을 들어 의견을 냈다.

“안 그래도 입원 중에 생각해본 부분입니다만.”

“그 말에 뒤끝이 느껴지는 건 단순히 내 느낌인가?”

스윽.

박규영 본부장이 눈동자만 옮겨 태건을 흘겨봤다.

똑같이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피한 태건이 헛기침과 함께 답했다.

“험. 아무튼 입원한 인원을 제외하고 남은 단원들로 임시 출동팀을 꾸리는 게 어떨까 합니다.”

“저도 부단장과 생각이 같습니다.”

오광휘 단장이 고갯짓을 곁들여 동의했다.

그런데 박규영 본부장이 반대했다.

“둘 다 급하게 생각지 않도록 해.”

“그럼 업무에 공백이 생기게 됩니다.”

“나도 잘 알지. 하지만 잠시 여유를 갖자고.”

계속된 밀어냄에 태건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휴식은 출동대기를 하면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건 내가 아니라 위에서 내려온 지시야.”

스윽.

박규영 본부장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답했다.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오광휘 단장이 진지한 얼굴로 나섰다.

“위……. 라고 하시면?”

“청장님.”

“네? 청장님 지시라고요?”

삐끗.

오광휘 단장은 얼마나 놀랐는지 순간 표정이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박규영 본부장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라텔의 부재로 소방업무에 큰 구멍이 생긴다면 그것도 문제 아닌가?”

“그건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기왕지사 넘어진 김에 신발끈을 다시 단단히 조인다고 생각하도록 해. 나무보다 숲을 보자고.”

박규영 본부장의 지시는 단호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그런 의미라면 무조건 반대하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마음을 정리한 오광휘 단장이 얼른 대답했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재정비하고 더 힘차게 뛰겠습니다.”

태건이 뒤를 이었다.

조용히 듣던 박규영 본부장이 손짓으로 흩트렸다.

“사람들 참.”

“크흠. 긴장 풀겠습니다.”

스륵.

오광휘 단장과 태건의 어깨가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그제야 박규영 본부장도 자그맣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렇게 풀어진 순간도 필요해. 그럼 차부터 마저 들자고.”

탈칵.

박규영 본부장이 권하며 찻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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