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275)화 (274/320)

275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조금 더 분위기를 부드럽게 가라앉혔다.

그러다 태건이 아차한 얼굴로 물었다.

“아, 맞다. 그런데 본부장님. 3기는 모집 계획이 잡혔습니까?”

“또, 또, 좀 여유를 갖자니까.”

“그게 아니라 실은…….”

태건은 성지훈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처음엔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박규영 본부장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의 얼굴에 황당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부단장을 질색하게 만든 의사라. 아주 흥미로워.”

“잠깐 사이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제가 여쭙겠습니까.”

“그럼 그 의사만 특채로 뽑을까?”

박규영 본부장이 넌지시 던져 묻자 태건이 화들짝 놀라 손까지 저었다.

“절대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냥 전화로 알려주기로 해서 여쭌 겁니다. 진짭니다.”

“부단장이 질색하니까 더욱 호기심이 당겨.”

“그런데 전 왜 벌써부터 피곤할까요.”

태건이 앓는 소리를 하자 박규영 본부장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태건도 같이 미소 지었다.

여기까진 유연한 분위기를 위한 대화였고, 이제부터는 조금 진지해지기로 했다.

투둥.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은 태건이 나지막이 논제를 꺼냈다.

“사실 이번 단원들 부상으로 3기 충원을 앞당기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야.”

“그럼…….”

태건이 이어서 말하려 할 때 오광휘 단장이 슬쩍 막았다.

“부단장. 잠깐, 스톱. 거기까지.”

“네?”

“3기 충원을 말하긴 너무 일러.”

“단장님.”

태건은 막아서는 오광휘 단장을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어제 나눈 말과 입장이 180도 달라졌다.

그 부분을 오광휘 단장도 아는지 부연설명을 했다.

“그래. 다들 어제 병원 공원에 앉아서 3기 충원에 대해 대화했었어. 나도 동의했었고.”

“그런데요.”

“우리 라텔이 출범한지 얼마나 됐냐?”

너무도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첫 소집 일을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태건은 오광휘 단장이 괜히 묻는 말이 아님을 간파하고 차분히 곱씹어봤다.

‘그때가 늦봄 무렵이었고…….’

슥슥.

손가락까지 접으며 곱씹던 태건이 멈칫했다.

“어?”

“그래. 이제 불과 반년이 좀 넘었어.”

“정확히는 10개월 차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태건의 말에 오광휘 단장은 차분히 고갯짓하며 이어서 말했다.

“그래. 고작 6명으로 시작한 우리가 1년도 되지 않아 이렇게까지 급성장했단 말이지.”

“그렇죠.”

“게다가 2기 애들은 투입된 지 이제 1달 좀 넘었어.”

“……그런 지금인데 3기를 언급하는 건 확실히 좀 이르긴 하네요.”

태건은 바로 순응했다.

아무리 급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소방 체계를 온통 뒤집을 계획이 아니라면 당장 라텔의 규모를 더 확장시키는 건 무리였다.

무엇보다 운영에 있어 예산이 너무 많이 필요했다.

…….

두 사람이 조용해지자 잠자코 듣고 있던 박규영 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본청에서 라텔 확장에 대한 계획을 수립 중이야.”

“다들 계획이 있으셨군요.”

“그간 라텔의 활약상 덕분에 소방관 이미지가 많이 상승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크흠.”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동시에 헛기침을 했다.

사실 칭찬 소리가 계면쩍은 거였다.

박규영 본부장은 미소를 그리며 이어서 말했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잖아.”

“……뒤는 걱정하지 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도 같아. 뒷일은 나에게 맡기고 컨디션 회복에만 매진하도록.”

박규영 본부장이 딱 잘라 지시했다.

한 번도 어김이 없는 말이라 더욱 든든하게 들려왔다.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신뢰를 가득 담아 한 목소리로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해산하지.”

스윽.

태건과 오광휘 단장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오광휘 단장이 거수경례하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퇴근하겠습니다. 라텔!”

“라텔. 푹 쉬다 와,”

박규영 본부장도 시원하게 마주 인사했다.

잠시 후.

소식을 전하자 단원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본부장님, 역시 화끈하시네!”

“아무리 존경해도 부족한 분이십니다.”

황대산에 이어 방기찬이 아부성 발언을 내뱉었다.

그 분위기가 가열되려하자 오광휘 단장이 적당히 잘랐다.

“휴가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재정비 시간이야.”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너무 들뜨지 말고, 슬슬 움직이자.”

스윽.

오광휘 단장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가 멀어지기 무섭게 단원들은 화기가 되살아났다.

“아싸, 퇴근!”

“집에 가자!”

다들 힘차게 퇴근길에 올랐다.

어떤 이유로든 조기 퇴근은 기쁜 순간이었다.


* * *

시간이 흐른 뒤.

태건이 자취방 옥상에 들어섰다.

벌러덩.

평상에 눕자 차가운 기운이 등에 가득 퍼져왔다.

그런데 태건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그래서 뭐하지?”

갑자기 주어진 휴가라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데굴데굴.

평상을 이리저리 뒹굴며 고민했다.

그 심란한 마음을 알아주는지 하늘도 꾸물꾸물했다.

눈이라도 쏟아질 모양이었다.

그때 다시금 옥상 문이 열리며 중년의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2층에 사는 이웃사촌이었다.

벌떡.

얼른 일어난 태건이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렇지? 이 시간에 엘리베이터가 5층에 서서 설마하고 왔는데, 역시 있었네. 몸이 많이 안 좋다는데, 괜찮아요?”

아주머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태건은 얼른 양팔을 안쪽으로 당기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안 좋기는요. 이렇게 건강합니다.”

“소식 들어보니까 입원도 하고 그랬다던데요.”

아주머니는 썩 못미더운 표정이었다.

그 한마디에 태건의 건재함이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여름이었다면 알찬 근육이 도드라져 보였겠지만 겨울이라 패딩에 꽁꽁 가려져 있었다.

태건도 불룩한 패딩을 알아채고는 말로 설명했다.

“검사 받느라 잠깐 입원한 겁니다. 의사가 아주 건강하다고 바로 쫓아내던데요.”

“그럼 다행이고. 아니, 별 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니고, 날이 이래서…….:

스윽.

말꼬리를 흐리며 종이호일이 덮인 접시를 내밀었다.

살짝 열린 틈으로 하얀 김이 보이고 덩달아 고소한 기름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이 냄새!’

부침개가 확실했다.

태건은 얼른 두 손으로 받아들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뭘 또 저까지 챙기세요. 전에는 김치도 나눠 주시고요.”

“그냥 하다보니까 많이 해서 가져온 거예요.”

“그래도 매번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입맛에 맞으면 좋고, 아이고, 더 방해하지 말아야지. 그럼 쉬어요.”

사사삭.

아주머니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고는 얼른 옥상을 떠나갔다.

태건이 만류할 새도 없었다.

“어, 저, 그……. 가셨네. 그나저나 어디?”

스윽.

종이호일을 들춰보자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야채부침개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 양이 척 봐도 상당했다.

“헤에, 이 정도면 식구들 드실 거 전부 가져오신 거 같은데……. 어디.”

쭈욱. 우물우물.

얼른 한쪽을 크게 떼어 입으로 쏙 집어넣었다.

몇 번 씹기도 전에 태건의 두 눈이 번뜩 뜨였다.

“우와, 와, 이야……. 이걸 이렇게 먹는 건 예의가 아니지!”

차자작.

태건의 발걸음이 갑자기 바빠졌다.

잠시 후.

태건은 자취방 식탁으로 옮겨와 있었다.

식탁 위엔 이웃사촌의 정성이 들어간 부침개와 막걸리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우선 한 사발 시원하게 비웠다.

탁.

“크으. 여기에 부침개를 더하면?……캬아, 이 맛이야!”

태건의 입에서 탄성이 계속 터져 나왔다.

무료하게 보낼 줄 알았던 갑작스런 휴가 첫날은 다행히 이웃의 정과 함께 했다.

다음날.

아침부터 다세대 주택 현관에서 망치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망치질을 할 때마다 커다란 소리와 미미한 진동이 주택 전역에 퍼져갔다.

잠시 후 공동현관에 빨간 나무상자가 하나 설치됐다.

빨간 상자 가운데 용도가 정확히 명시되어 있었다.

-소화물품 보관함.

끼익.

뚜껑을 들춰본 태건이 미소를 지었다.

그 속에는 폼형 스프레이, 소화볼, 숨수건 등 화재용품들이 담겨 있었다.

누구라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소방용품들이었다.

“라텔이랑 한 지붕 아래 사는데, 이 정도는 있어야지.”

그건 표면적인 핑계였다.

이웃들이 베풀어준 선의에 보답하고자 하는 의미가 더 컸다.

또한 최소한의 대비를 해 놓으니 태건 또한 혹시나 하는 우려마저도 덜어낼 수 있었다.

보람찬 일을 마친 태건은 이내 옥상으로 올라왔다.

“흥흥.”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값비싸고 거창한 걸 나눈 게 아닌데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뭘 해야 할 지 하나씩 떠올랐다.

“역시 사람은 뭐든 우선 마음이 편해야 돼.”

그렇게 중얼거린 태건은 어딘가로 전화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끼익.

안으로 들어가는 사이 상대가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아, 기자님, 오늘 시간…….”

터억.

현관문이 닫히며 태건의 밝은 목소리도 사라졌다.

그날 저녁.

오랜만에 평상에 화로가 올라왔다.

지글지글.

시뻘건 숯 위에 고기가 맛깔스럽게 익어갔다.

태건이 고기를 뒤집자 기름이 떨어져 불이 솟구쳤다.

척, 치이익.

그 모습을 마주앉은 상대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지켜봤다.

그 상대는 다름 아닌 이강찬 기자였다.

이내 옥상을 크게 둘러본 이강찬 기자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 지어졌다.

“이야. 서울 속에 무인도라고 해야 하나요. 여기 정말 최고의 아지트입니다.”

“옥탑방의 최고 매력이죠. 자, 고기가 마침 다 익었네요. 드시죠.”

처억.

태건이 큼지막한 고기를 건네주자 이강찬 기자가 또 한 번 감탄했다.

“크으. 이거 라텔 부단장님이 숯불에 구워준 고기라. 이렇게 언밸런스하게 맛깔스런 경우가 또 어딨겠습니까.”

“제가 불만 보면 달려들긴 하죠. 고기 굽는 불은 의미가 좀 다르지만요.”

“초대해 주셔서 너무 감사한데, 거처를 이렇게 공개해도 되는 겁니까?”

이강찬 기자가 묻자 태건은 표정 변화 없이 답했다.

“저 여기 사는 거 동네 사람들 다 압니다.”

“다 안다고요?”

이강찬 기자의 말이 끝난 바로 그때였다.

끼익.

옥상 문이 열리더니 2층 아주머니가 자그마한 반찬통을 들고 올라왔다.

“아이고, 손님이 계셨네.”

“네. 손님이 좀. 그런데 어쩐 일로…….”

태건이 얼른 일어나며 살짝 말꼬리를 흐렸다.

2층 아주머니는 슬그머니 거리를 좁혀와 반찬통을 건네며 말했다.

“1층에 그건 또 언제 걸어놨대. 으이그, 이거 같이 먹어요. 그럼 식사 맛있게들 들어요.”

스윽.

2층 아주머니는 반찬통을 쥐어주고는 또 바람 같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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