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276)화 (275/320)

276화

반찬통을 열어본 태건이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멸치볶음이네요.”

“오호. 강 부단장,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 아니지, 이웃들과 유대관계가 소방력의 원천?”

이강찬 기자가 뜬금없이 칭찬을 퍼부었다.  

태건은 슬쩍 멸치볶음을 상에 올리며 머쓱해 했다.

“그냥 청년이 혼자 사니까 딱해서 챙겨주시는 겁니다.”

“그렇다고 보기엔 상당히 살가운 분위기였습니다. 정말 동네 분들이 다 아는 모양입니다.”

“딱히 비밀이랄 것도 없습니다. 일단, 한 잔 하셔야죠.”

태건은 슬그머니 소주로 관심을 돌렸다.

이강찬 기자도 술이 고팠는지 더 캐묻지 않았다.

“자, 초대 감사합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챙.

잔을 부딪친 두 사람은 동시에 술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잠시 후.

벌컥.

현관문이 격하게 열리더니 태건과 이강찬 기자가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소파에 얼른 자리하고는 똑같이 어깨에 얇은 이불을 둘렀다.

그런 두 사람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이강찬 기자가 먼저 앓는 소리를 했다.

“흐드드. 술이 술술 들어가다가 입 돌아갈 뻔했습니다.”

“기온이 훅 떨어지니까 술을 마시는데도 깨네요.”

“겨울철 야외 고기파티, 황천길 가는 지름길이네요. 이런 타이틀로 기사 하나 써야겠습니다.”

이강찬 기자는 이 순간조차 기사로 승화시키려 했다.

태건은 그 소리에 싱긋 미소 지었다.

“진짜 프로 기자님이십니다.”

“그 와중에도 불을 철저히 꺼뜨린 분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습니다.”

“서로 직업병이 문제네요.”

“하하.”

오가는 농담 끝에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내 한기가 가시자 이강찬 기자가 수첩을 꺼내 뒤적였다.

사락사락.

“그게 어딨더라.”

“진짜 기사 쓰시려고요?”

태건이 묻자 이강찬 기자가 가볍게 고개를 젓다 이내 입을 열었다.

“아, 여깄네. 타이어 연구소 화재 건 말입니다. 구조한 분들은 건강에 큰 문제없다고 합니다.”

“전 또 뭐라고.”

“그리고 황재열 연구원은 감사패 받는다던데요.”

낯익은 이름에 태건도 바로 그를 떠올렸다.

“……혹시 그 연구 자료요?”

“맞습니다. 그 자료가 신제품 원료배합비율 같은 중요한 내용인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포상금도 두둑하게 받는다고 합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제가 꿍칠 걸 그랬습니다.”

태건이 아쉬움을 보이자 이강찬 기자가 자그마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직접 챙겨주셨다더니 이제 와서 아쉬워하십니까.”

“그런 건 줄 몰랐으니까요. 어쩐지 의식이 가물가물한데도 붙들고 있더라고요.”

“아무튼 그건 이미 떠나갔고, 대신 다른 좋은 소식은 있습니다.”

이강찬 기자가 말을 이어가자 태건이 슬쩍 만류했다.

“놀러 오셔서 뭔 일을 하고 그러십니까.”

“저는 이게 노는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걸 여기저기 알리는 걸 좋아한답니다.”

“그럼 제가 들어드려야겠습니다. 무슨 좋은 소식일까요?”

태건이 변죽 좋게 맞장구쳐주자 이강찬 기자 목소리가 좀 더 밝아졌다.

“이번 화재로 각 기업체에 화재안전교육 강화야 두말할 거 없고.”

“좋은 소식이긴 한데 크게 와 닿진 않네요.”

“이건 와 닿으실 겁니다. 아직 소수의견이지만 ‘소방병원’의 필요성을 언급하기 시작했답니다.”

“소방병원이요?”

태건의 귀가 커지며 바로 관심을 보였다.

그 이유를 이강찬 기자도 알고 있기에 알려준 소식이었다.

“라텔 전원이 병원 신세를 진 게 컸던 거 같습니다. 몇 번 더 입원하시면 소원성취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번 더 입원하라고요? 어휴!”

태건은 손사래까지 치며 질색했다.

그 격한 거부에 이강찬 기자가 웃으며 이어서 말했다.

“하하. 그만큼 영향력이 적은 사회단체의 의견이란 겁니다.”

“그런 단체가 빨리 성장해야 할 텐데요.”

사락.

그 사이 수첩을 넘긴 이강찬 기자가 다른 내용을 언급했다.

“타이어 회사 말입니다. 그때 출동한 안전센터들을 찾아가는 모양입니다.”

“그래요?”

“출장점검이란 명목으로 각종 소방차 타이어를 새 걸로 교체하고, 소정의 치료비도 전달하는 모양입니다.”

“그 대표님 정말 약속 지키셨네요.”

태건이 놀랍단 반응을 보이자 이강찬 기자가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

“절대 손해 보는 일은 아닙니다. 선의도 있겠지만 어쨌든 기업 이미지와 직결될 문제니까요.”

“그렇게 버는 돈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뭐, 더 복잡한 얘기는 생략하도록 하고요. 또 다른 건……. 여깄네.”

사락.

이강찬 기자가 수첩을 또 넘기자 태건이 물었다.

“더 있습니까?”

“최근에 라텔 단원들 친인척분들에게 좋은 소식 들려오고 계셨죠?”

“뭐, 그거야……. 감사하게도 관심을 많이 가져주셔서요.”

태건이 순순히 인정하자 이강찬 기자가 덧붙여 말했다.

“그게 사회 저변으로 넓게 퍼지고 있습니다.”

“퍼지다니요?”

“지역 소방관들의 주변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단 겁니다. 시작은 라텔이었지만 서서히 전국으로 퍼져가는 중이란 거죠.”

이강찬 기자가 전해준 소식에 태건이 잔잔히 미소 지었다.

“감사하네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살짝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물론 무조건 도움을 드리는 건 아닙니다. 그 속에서도 호불호는 갈립니다.”

그의 말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태건은 어느 정도 추측이 되는 부분이 있어 쓰게 말했다.

“많은 분들이 계시니만큼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겠죠.”

“그렇게 받아들이시는 게 스트레스 덜 받을 겁니다. 모든 게 내 맘 같지 않은 게 세상이니까요.”

“그러니까요.”

태건이 수긍하자 이강찬 기자는 또 수첩을 넘겼다.

사락.

“음. 소방유공자와 유가족의 이후 생활, 이건 기획 기사 초안이고, 그게 어디 갔지…….”

혼잣말을 읊조리며 이리저리 수첩을 넘겼다.

그런데 그가 흘린 말이 태건의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

때앵!

유가족.

그 명칭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떠오른 이들이 있었다.

태건은 아차했다.

‘이 머저리!’

비슷한 화재현장까지 경험해 놓고도 떠올리지 못했음을 강하게 자책했다.

바빴단 핑계는 어불성설이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찾아온 고마운 일에 감사하기만 했다.

뭐가 빠졌다 싶었는데, 그게 가장 중요한 이들이었음을 이제야 상기했다.

태건이 자책으로 인상을 북북 쓰고 있었다.

그런 태건을 봤는지 이강찬 기자가 수첩과 거리를 슬며시 벌리며 말했다.

“제가 너무 일 얘기만 한 거 같네요.”

“……네?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중요한 걸 깜빡해서 그런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래도 이제 그만하는 게 좋을 거 같긴 하네요.”

찹.

이강찬 기자는 수첩을 덮으며 눈치를 봤다.

태건은 얼른 자책을 뒤로 밀었다.

‘지금 당장 찾아뵐 거 아니니까 잠깐 보류.’

그리고 이내 냉장고 문을 열며 물었다.

벌컥.

“입가심으로 맥주 한 캔 하셔야죠?”

“그거 마시는데 눈치 안 봐도 됩니까?”

“이미 눈은 맥주에 머물러 계십니다.”

태건이 맥주캔을 흔들며 말했다.

이강찬 기자의 눈이 맥주캔을 따라다니며 답했다.

“좀 아쉽긴 했죠.”

“그럼 드셔야 하는 겁니다.“

“사양은 사양하겠습니다. 후후.”

챙.

맥주 캔이 부딪치며 2차전의 시작을 알렸다.


* * *

다음날.

날이 밝기 무섭게 태건은 차를 몰고 서울을 벗어났다.

부웅.

과음하지 않은 덕분에 컨디션이 쌩쌩했다.

설사 컨디션이 안 좋았더라도 어떻게든 좋게 만들었을 터였다.

어느새 화성에 다가가고 있었다.

“곧이야 곧.”

꾸욱.

운전대를 말아 쥔 태건은 남은 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화성의 어느 시장이었다.

척. 척.

시장 안으로 들어온 태건은 좌우를 둘러보며 이동했다.

박성규 어머니의 포목점이 있는 바로 그 시장이다.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가 미국에 다녀온 직후였다.

“변한 게 없네.”

시간이 흘렀단 게 무색할 정도로 시장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전에는 찾아뵙는단 생각만으로도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금도 마냥 가볍진 않았다.

그때보다 조금 나아진 정도였다.

재래시장은 역사가 있는지 사람들이 제법 오갔다.

물론 대형 마트와 편의성을 비교할 순 없었다.

그러나 대형 마트에선 볼 수 없는 다른 정겨운 모습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었다.

고민하는 손님과 상인의 실랑이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살까, 아니야, 사지 말까.”

“그냥 하나 더 해요.”

가격 흥정하는 모습도 쉽게 엿보였다.

“천 원만 깎아주세요.”

“에이, 우리도 남는 거 없다니까.”

저쪽에선 갓 쪄낸 음식을 전시했고, 또 리어카 커피장수도 보였다.

태건은 슬쩍슬쩍 한눈을 팔면서도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슥슥.

그렇게 스쳐 지나는 사람들 중 몇몇이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음? 저 사람, 엥?”

“라텔 맞지?”

“저 사람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지켜보기도 했다.

태건이 유명해서 알아보는 이유도 있을 터였다.

그만큼 얼굴이 많이 알려진 건 사실이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지금 태건은 기동복 차림이었다.

시장에 주황색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깨 견장에 새겨진 라텔 마스코트는 무려 금색이었다.

번쩍, 번쩍.

빛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어깨 견장이 번쩍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쳐다볼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태건도 자신에게 쏠리기 시작한 이목을 생생히 느끼고 있었다.

‘이건 일렉마트 때보다 더 하네.’

이럴 작정으로 왔기에 창피해 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일부러 빙 돌아서 가는 길이었다.

태건이 얼마나 작정을 하고 찾아온 길인지 엿볼 수 있었다.

잠시 후.

저 멀리 포목점이 보였다.

태건이 시장에 들어선지 무려 10분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포목점 앞엔 화려한 꽃무늬로 가득한 덧버선이나 조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속에 박성규의 어머니가 자리해 있었다.

김순자.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란 호칭이 더 친근해 사용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포목점은 썰렁했다.

지나는 사람들은 있지만 손님이 없었다.

휙휙.

김순자는 괜히 먼지 털이를 몇 번 휘저었다.

그래도 관심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내 김순자는 앉은 채로 가볍게 눈을 감았다.

아무 감정 없는 표정에 무거움이 가득 자리해 있었다.

깊은 쓸쓸함과 외로움이 풍겨 나왔다.

태건은 그런 김순자 모습에 가슴 한켠이 묵직해졌다.

‘자주 찾아뵀어야 했는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거라고 했다.

그래서 내일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려고 이렇게 한달음에 찾아왔다.

이제 만나야할 시간이다.

“웃어야지. 강태건, 웃자. 그쵸, 선배?”

빙긋.

태건은 그럴수록 더욱 밝고 힘차게 웃어보였다.

이내 태건은 포목점에 다가섰다.

척.

김순자는 누가 온 줄도 모르고 계속 졸기만 했다.

“…….”

심지어 졸고 있는 모습에 미동도 없었다.

어쩌면 오늘 하루가 이대로 흘러 지나가 버리길 바라는지도 몰랐다.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제 일어나셔야죠, 어머니.’

태건은 김순자를 깊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김순자를 깨우러 왔다.

외로움을 느낄 시간도 없게 만들기 위해 달려온 길이다.

이제 그 계획을 실행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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