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그런 순간에도 태건의 장사는 계속 됐다.
놀라운 건 사람들이었다.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다가왔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다.
북적북적.
포목점 앞은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몇 시간 후.
포목점은 마치 태풍이 쓸고 간 듯 가판이 텅텅 비었다.
판매된 물건들은 형형색색의 지폐로 바뀌어 종이상자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태건은 상자를 채우고도 삐쭉 튀어나온 지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게 다 얼마야.’
솔직히 모른다.
워낙 많이 판데다 가격도 제각각이라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상당한 금액이란 부분이었다.
처억.
태건은 돈 상자를 그대로 김순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어머니, 여기요.”
“흐음. 저기, 태건아.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김순자의 말이 길어질 조짐이 보였다.
태건은 이런 상황까지도 미리 생각해둔 상태였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태건이 갑자기 화들짝 놀란 표정과 저쪽으로 손짓하며 외쳤다.
“……어머니, 저기!”
“왜, 무슨 일이니?”
휙!
얼른 돌아본 김순자였지만 아무런 일도 없어 허탈해했다.
“갑자기 무슨 장난을……. 태건아? 어머, 어디 갔어. 태건아, 태건아!”
“…….”
태건은 그 자리에 없었다.
정말 감쪽같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김순자는 태건을 소리쳐 부르며 찾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띠링.
김순자의 휴대폰에 태건이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
-다음에 다 같이 찾아뵐게요. 그때 상다리 부러지게 맛있는 거 해주세요. 그러니까 어머니, 그때까지 꼭 건강하셔야 해요. 아들이.
푸욱.
김순자는 휴대폰을 가슴 깊이 끌어안았다.
“…….”
그 모습 그대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날 저녁.
화성에서 사라진 태건은 놀랍게도 본부장실에 자리해 있었다.
그런데 태건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티테이블에 종이를 놓고 펜으로 뭔가 작성하고 있었다.
슥슥.
“그러니까……. 그래서…….”
태건의 표정이 살짝 굳어져 있고, 자세도 딱딱했다.
그건 상석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노려보고 있는 박규영 본부장 탓이었다.
“…….”
부들부들.
그의 볼살이 가늘게 미동했다.
그러다 갑자기 박규영 본부장이 팔걸이를 내려쳤다.
탁!
“이게 말이 되냔 말이야!”
“헙!”
태건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박규영 본부장은 격앙된 얼굴 그대로 쏘아붙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단장이!”
“크흐흠.”
“왜 손이 멈췄나. 계속 써!”
“넵.”
슥슥.
태건은 군소리 없이 다시 펜을 놀렸다.
그 사이 박규영 본부장은 인상을 푹푹 쓰며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겸직금지조항? 그런 건 내 눈에 보이지도 않아!”
“크흠. 네.”
“영리업무금지조항. 아르바이트 하루 정도야 할 수 있지. 그런데!”
쾅!
팔걸이가 작살나는 소리가 생생히 울렸다.
그 벼락같은 소리에 태건은 어깨를 움츠리며 더욱 빠르게 펜을 놀렸다.
슥슥슥.
“그래서 저는…….”
그런 태건에게 박규영 본부장의 쓴소리가 계속 됐다.
“그런데 지금 부단장이 왜 시말서를 쓰는지 아나!”
“그건, 제가 시장에서 장사를…….”
“뭐? 내가 겨우 그거 때문에 이런다는 건가!”
박규영 본부장이 으르렁거리자 태건이 얼른 대답을 바꿨다.
“아닙니다. 제가 품위유지의무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아? 알고서 그랬단 거야!”
우르릉.
태건의 귀에 천둥이 쳤다.
“흠흠.”
할 말이 없어 헛기침으로 대신했다.
박규영 본부장은 그래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더 쏟아냈다.
“그 영상은 뭐냔 말이야. 골라골라? 그걸 지금……. 어휴!”
“제가 그러려는 건 아니었는데…….”
“조용히 쓰기나 해!”
“…….”
슥슥슥.
태건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순순히 시말서 작성을 이어갔다.
그런 태건이 지금 반성 중인가?
그건 아니었다.
‘어떻게 써야 반성하는 걸로 보일까.’
이 와중에도 잔머리를 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후.
태건이 작성한 시말서를 박규영 본부장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내놔!”
탁!
박규영 본부장이 낚아채 가져갔다.
태건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한 번 더 어깨를 움츠렸다.
‘곧 나갈 거니까.’
그때까지 반성의 기운을 아낌없이 팍팍 쏟아냈다.
그런 태건의 귀에 생경한 소리가 들려왔다.
촤아악, 촥촥.
무언가를 찢는 소리였다.
‘이 소리가 왜 들리는 거지?’
궁금해진 태건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봤다.
그런 태건이 마주한 건 박규영 본부장의 번뜩이는 눈이었다.
“헙!”
삭!
태건은 찔끔해 얼른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그때 박규영 본부장의 어이없단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반성하는 척은 왜 하고 있는 건가?”
“정말 진심으로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발끝 까딱거리면서?”
“에?”
태건은 얼른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봤다.
톡톡톡.
정말 발끝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얼른 감춘 태건이 어색한 얼굴로 너스레를 떨었다.
“이 녀석이 왜……. 크흠. 타이어 연구소 화재 이후로 가끔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부작용이 좀 생긴 거 같습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고 있나.”
“그건 아닌데. 어? 그건…….”
머쓱해하던 태건은 박규영 본부장 앞에 놓인 종이쪼가리들을 보며 멈칫했다.
흘깃 보이는 글씨체가 분명히 방금 자신이 작성한 시말서였다.
의아해하는 태건을 박규영 본부장이 나지막이 불렀다.
“부단장.”
“네, 본부장님.”
“다음엔 ‘골라골라’까지는 하지 마.”
그 소리에 태건이 눈을 끔뻑거렸다.
“네?”
“내가 다른 건 다 커버 칠 수 있으니까 거기까진 가지 말란 소리야. 알아들어?”
“제가 허가 받지 않고 장사한 건 괜찮은 겁니까?”
태건은 영문을 몰라 반문했다.
박규영 본부장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선배 어머니 일이야. 그거 좀 도와드린 걸 누가 뭐라고 하나. 그런 파렴치한이 세상에 어딨어!”
“그, 그렇죠? 그건 문제라고 볼 수가 없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뭐냔, 말이야. 이게!”
불쑥.
박규영 본부장은 아예 휴대폰을 내밀었다.
SNS의 짧은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태건이 가판에 올라 삐딱하게 서서 손뼉 치며 호객하는 장면이었다.
짝짝짝.
-자, 골라골라. 일단 골라잡아.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
그걸 본 박규영 본부장의 얼굴이 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고르긴 뭘 골라. 쭉 펼쳐놓고 감사합니다. 인사하면 되는 걸, 이게, 이게, 어휴휴!”
“크흐흠. 장사는 알바 후로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다음에는 라텔 부단장에 걸맞은 최소한의 격식을 갖추도록 해. 내가 봐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박규영 본부장이 한껏 으름장을 놓았다.
그 포인트가 세상의 관점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태건이 박규영 본부장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넵. 본부장님 명령을 받자와 다음엔 기필코 품위를 유지하며 장사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됐어. 가 봐.”
축객령에 벌떡 일어난 태건이 절도 있게 거수경례했다.
“라, 텔!”
“에휴.”
툭.
박규영 본부장은 한숨을 내쉬며 형식적으로 손을 올리고 말았다.
이내 태건이 본부장실 밖으로 나왔다.
탁.
조심히 문을 닫았다.
그 순간 태건의 진지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헤벌쭉 미소 지었다.
“아싸, 넘어갔으. 오예!”
타다닥.
환호한 태건은 신난 얼굴로 달려갔다.
늦은 밤.
태건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리저리 몸을 뒤집으며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뒤척뒤척.
“풋, 후후.”
태건이 갑자기 웃음을 흘렸다.
지금도 가슴 속에 뿌듯함이 가득 오른 탓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잘했다.
더 늦지 않게 찾아가길 잘했다.
아무리 곱씹어도 이번만큼은 자신이 벌인 일이 자랑스러웠다.
계속 미소를 머금고 있던 태건은 이내 하품을 했다.
“하암.”
스륵.
태건은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오늘처럼 잠드는 순간이 설렌 게 언젠지 몰랐다.
“후후.”
낮은 웃음을 흘린 태건은 서서히 잠들었다.
고로롱.
깊이 잠든 태건의 얼굴엔 흡족한 미소가 오래오래 걸려 있었다.
시간이 흘러 해가 떠올랐다.
잠든 태건의 입가에는 지금도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좋은 꿈을 꾸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행복한 아침을 산산이 조각내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빠라밤!
귀를 강타하는 벨소리에 태건은 인상을 가득 찌푸렸다.
“으윽. 누구야…….”
부스스.
억지로 몸을 일으킨 태건의 표정에 심통이 잔뜩 차올라 있었다.
그리고 상대를 확인한 순간 머리 뚜껑이 들썩였다.
-강태영.
“으으, 하여간 내 인생의 오점 같은 인간!”
태건은 불만을 한가득 투덜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턱.
“아침부터 왜, 뭔데!”
“골라맨!”
빠직!
순간 태건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튀어나왔다.
“그 말 하려고 전화한 건 아니지?”
“아뉜뒈, 놀리려규 존하환곤뒈.”
강태영은 작정하고 전화했는지 아주 쥐어뜯어버리고 싶게 놀려댔다.
그 도발에 홀라당 넘어간 태건의 이마에 튀어나온 힘줄이 두 개로 늘어났다.
빠직, 빠직.
“이 인간이, 아침부터…….”
“큭큭. 우리 둘째가 그렇게 뻔뻔한 아이였는지 이 형은 이제야 알았지 뭐니.”
“……그냥 끊자. 내가 정신 차리기 전에 끊는 게 형 신상에 좋아.”
태건은 잠에 취했단 핑계로 마지막 남은 한 톨의 형제애를 끌어 모아 인내했다.
그러나 강태영이 알아줄 리 만무했다.
“너 엄연히 재정비 중이라며. 그런데 그렇게 막 퍼져 있고 그럼 못 쓴다.”
“남, 이, 사.”
“우리가 남이가. 짜슥이 말이야. 느그 부모님 강원도 살재. 마! 내가, 마, 다 했어! 아무튼 다 했어!”
강태영의 이죽거림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됐다.
태건은 더 통화하고 싶지 않았다.
“끊을게.”
“야야야야, 잠깐, 자아아암깐! 중요한 일, 엄청 중요한 거야!”
강태영의 목소리가 필사적으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