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280)화 (279/320)

280화

잠시 후.

딸랑.

태건과 정연미가 분식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테이블이 10개도 되지 않은 작은 규모였다.

안쪽은 내실로 연결된 구조였다.

일터이자 집인 모양이었다.

분식집 안에 손님은 커플뿐이었다.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 연령대고 뭐고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정지희가 끓이는 라면은 저들밖에 주문할 사람이 없었다.

‘라면 먹을 줄 아는 분들이네.’

태건은 무심히 넘기려 했다.

그런데 커플의 남자 뒷모습이 이상하게 낯익었다.

‘한 대 콱 쥐어박고 싶게 생긴 뒤통수를 어디서 봤더라.’

떠올려봤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이내 태건은 정지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정지희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두둥.

그렇게 오랜만에 서로를 마주했다.

“형수님……. 저 왔습니다.”

“지희 언니. 오랜만이에요.”

정연미가 아련한 시선으로 첫마디를 꺼냈다.

“…….”

정지희의 표정이 점점 떠 싸늘하게 식어갔다.

태건은 이미 단단히 각오하고 찾아온 길이었다.

“꼭 뵙고 싶어서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 왔습니다.”

“……그래요.”

“형수님, 저희도 라면 좀 끓여 주십시오.”

태건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당차게 부탁했다.

그건 태건의 입장에서나 당찬 모습이다.

정지희에겐 불청객이란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몰랐다.

그런데 의외로 정지희는 화를 내지 않았다.

뒤적, 뒤적.

끓이던 라면을 마무리하며 무심하게 물어왔다.

“이럴 거면 그냥 같이 들어오지 왜 따로 들어와요?”

“따로라니요? 이렇게 같이 들어왔는데요.”

척.

태건은 정연미 손을 붙들며 입을 열었다.

그 소리에 정지희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지금 제가 연미 씨를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다른 분이라면 저쪽에……. 설마?”

순간 태건은 익숙한 뒤통수를 어디서 봤는지 번쩍 떠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태건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오더니 불쑥 태건에게 어깨동무했다.

처억.

“이야. 누가 라면 아니랄까봐, 넌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라면부터 찾냐.”

너무도 친숙한 목소리는 역시나 오광휘 단장이었다.

태건이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단장님?”

“어? 어, 어…….”

정연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러나 오광휘 단장은 수더분한 얼굴로 정연미에게 먼저 인사했다.

“연미 씨 이렇게 인사 나누는 건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전에도 멀리서 눈인사만 했었어요.”

“오늘도 날개는 떼어 놓고 오셨군요.”

엉뚱한 오광휘 단장의 화법을 정연미는 낯설어했다.

“네?”

“미운 우리 새끼를 건사해주시는 연미 씨야말로 천사 아닙니까.”

“무슨 말씀을.”

배시시.

그래도 칭찬은 듣기 좋았는지 정연미가 부끄러워했다.

태건은 순간 어이가 없어 정연미에게 한 소리 했다.

“연미야. 지금 그거 아니야.”

“어? 어.”

정연미도 아차하며 얼른 표정 관리를 했다.

그 사이 태건은 오광휘 단장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단장님이 도대체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그건 내가 물어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냐?‘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태건이 반박하자 오광휘 단장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이 녀석 봐라. 천사와 함께 찾아왔다고 너까지 천사가 되는 줄 알아?”

“그, 에휴……. 할 말이 많지만 일단은 생략하겠습니다.”

“쫄리면 그냥 쫄린다고 말해.”

오광휘 단장이 계속 거침없이 말하자 결국 태건이 눈치를 줬다.

“크흠, 흠흠.”

그 신호에 오광휘 단장도 아차 싶었는지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하.하.하. 우리 라텔에서 가장 기특한 녀석인 태건이도 오랜만에 제수씨 보러온 모양이구나.”

“소금 뿌리실까 봐 연미도 데려왔는데. 다행히 그러시진 않을 거 같네요.”

스윽.

태건은 대답하며 슬쩍 정지희를 다시 바라봤다.

정지희는 힘 빠진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단장님도 비슷한 말씀 하셨는데요.”

“그렇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까 일행이 있으시던데요.”

태건은 잠시 잊혔던 오광휘 단장 동행인에 대해 물었다.

오광휘 단장은 바로 그쪽으로 손짓하며 닭살 돋는 호칭을 내뱉었다.

“자기야. 이리 와.”

“자, 자기?”

“너만 자기 있냐. 나도 자기 있다, 왜?”

퉁!

오광휘 단장은 태건을 향해 뻔뻔하게 배를 튕겼다.

그때 오광휘 단장의 동행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척.

태건은 때맞춰 그쪽을 바라봤다.

이내 어떤 여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조용한 느낌을 주는 인상의 분위기에 귀여운 얼굴이 특징이었다.

뭔가 어색할 거 같았지만 실제로 보면 의외로 잘 어울렸다.

그때 오광휘 단장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적당히 쳐다봐라. 그러다 닳아버리면 네 살 떼다가 붙일 거니까.”

“혹시 저분이 그 ‘퍼스트러브’입니까?”

“어허, 이 불성실한 호칭은 뭐야. 이 자식이, 제대로 서서 정식으로 소개하지 못할까, 네 이노옴!”

오광휘 단장의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태건은 이 상황이 조금 당혹스럽고 어이없었지만 일단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새로운 형수님이시라고요. 라텔 부단장 강태건입니다.”

“한유정이에요, 광휘한테 아니, 광휘 씨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어째 험담이 대부분일 거 같네요.”

태건이 미소 띤 얼굴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한유정은 농담으로 듣지 못했다.

“네? 어, 그게. 꼭 그런 의미는 아닌 거 같던데…….”

“…….”

찌리릿.

태건의 가늘어진 눈이 바로 오광휘 단장에게로 향했다.

오광휘 단장은 벌써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이야, 가게 아주 깨끗하고 정갈하네. 우리 제수씨, 마음 같다고나 할까나. 휘휘.”

스윽.

태건은 다시 한유정을 바라봤다.

이제 통성명을 했지만 이후의 대화는 미뤄야할 거 같았다.

“크흠. 우선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정을 내린 그 각오를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네? 일단 감사한데……. 대체 뭐가요?”

“그건 나중에 말씀드려도 될까요. 제가 참 좋아하는 분을 오랜만에 어렵게 다시 만난 자리라서 말입니다.”

태건이 정중하게 부탁하자 한유정은 바로 알아들었다.

“저는 자리로 가 있을게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대화 나누세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수님.”

태건은 조금 이른 호칭으로 부르며 감사를 표했다.

잠시 후.

분식집은 두 팀으로 나뉘었다.

한 팀은 태건과 오광휘 단장, 그리고 정지희가 둘러 앉아 있었다.

그리고 또다른 팀은 정연미와 한유정이었다.

정연미와 한유정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언니라고 불러도…….”

“저는 연미 씨라고…….”

간단히 호칭부터 정리하더니 그 뒤로는 자신들만의 대화 세계에 빠졌다.

내심 신경 쓰여 지켜본 태건이 싱긋 미소 지었다.

“한시름 덜었네.”

“내 말이 그 말이야.”

옆에 자리한 오광휘 단장이 똑같은 심정이 느껴지는 말을 했다.

그때 정지희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미 씨는 지적이고 싹싹하고, 유정 씨는 서글서글하고 살가운 성격 같아요. 그럼 쉽게 친해질 수 있어요.”

“크흠. 그나저나 당진은 어떻게…….”

태건이 운을 떼려하자 정지희가 먼저 눈치채고 답했다.

“고향이에요. 이 가게는 부천 전셋집 뺀 돈으로 구한 거고요.”

“그러셨군요.”

“처음 내려올 땐 그래도 좀 여유가 있었어요. 그건 잠깐이었고, 어느새 이런 꼴이네요.”

스윽.

정지희가 돌아보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태건과 오광휘 단장의 표정은 축 가라앉았다.

“뭐, 깔끔하고 정갈한 게 좋은데요.”

“내 말이. 제수씨가 워낙 꼼꼼하고 부지런한 분이란 걸 저희가 잘 알잖습니까.”

괜히 이런저런 말을 덧붙였다.

그 어색함을 정지희는 눈치 챈 모양이었다.

물컵을 매만지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사실 조만간 찾아오실 거 같단 생각은 했었어요.”

“혹시 SNS 영상 보셨습니까.”

“네. 부단장님 별명 생겼던데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광휘 단장이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골라맨.”

“…….”

빠직.

태건은 강태영이 오버랩되어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그 변화에 오광휘 단장이 슬쩍 눈치를 봤다.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이미 소문 쫙 퍼져 있었어.”

“그게 아니라 아침에 혈압 솟구친 일이 생각나서요.”

“그건 네 혈압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촤악!

오광휘 단장이 칼 같이 선을 그어버렸다.

태건은 따질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정지희에게 물었다.

“그런데 세찬이가 안 보이네요. 유치원 갔습니까?”

“아니요. 서울 친척집에요. 제가 어제 보냈어요.”

“정말 저희가 올 줄 아셨나 봅니다.”

“…….”

정지희는 말없이 가만히 바라봤다.

분위기가 짐짓 가라앉자 태건과 오광휘 단장도 그 변화를 바로 눈치 챘다.

구구구.

두 사람의 침묵이 더해져 분위기는 더 깊이 가라앉았다.

이내 정지희가 말했다.

“다시 도망치거나 숨을 생각은 없어요. 이젠 뿌리내리고 정착하고 싶거든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건 분명히 하고 싶어요.”

정지희가 무겁게 단서를 달았다.

태건과 오광휘 단장도 장단 맞춰 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우리들 사이에 청산해야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건…….”

태건이 반대 의견을 말하려 했다.

그런데 정지희가 한 박자 빨랐다.

“있다고 해도 그건 애 아빠와 일이에요.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서 저와 세찬이를 얽지 말아주세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는데, 죄송합니다.”

태건이 거부하자 정지희 표정이 서서히 차가워져갔다.

“태건 씨, 나중 일은 생각해보셨어요?”

“나중이요?”

“지금 어려워서 도움을 받는다고 쳐요. 앞으로 5년, 10년 후에는 요. 결국 모든 걸 여러분들에게 의지하게 될 거예요.”

정지희는 그런 자신의 미래가 두려운 모양이었다.

태건도 어떤 심정인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해줄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저희가 여러분들에게 짐이 되고 족쇄가 될 거라니까요.”

“그럼 더 좋네요.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잖습니까.”

태건의 대답이 어딘지 모르게 벽창호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정지희가 답답해했다.

“태건 씨.”

“팀장님은 제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 무려 두 번이나요.”

처억.

태건이 손가락 두 개를 내보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정지희는 살짝 놀랐다.

“정유공장 말고…….”

“또 있었습니다. 설사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해도 전 똑같이 결심하고 행동했을 겁니다. 아니, 그렇게 할 겁니다.”

“대체 왜요.”

“이채용 팀장님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두 분이니까요.”

태건이 답하자 오광휘 단장이 한 마디 덧붙였다.

“제수씨와 세찬이는 그래서 행복해야 합니다. 좋은 일과 즐거움만 가득해야 합니다.”

“…….”

“채용이가 그날 모두를 지키고 떠나갔으니, 저희가 그 빈 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우는 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오광휘 단장이 마음먹고 말하니 분위기가 너무도 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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