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281)화 (280/320)

281화

어떻게 따져 봐도 이치적으로, 도리적으로 옳은 소리였다.

그래서 정지희도 뭐라고 섣불리 말하지 못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가까스로 한 마디를 만들어냈다.

“그래도 채용 씨는 이런 걸 바라지 않았을 거예요.”

“아니요. 채용이가 바란 겁니다.”

“…….”

“그날 떠난 게 저였다면 채용이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그게 저희가 불구덩이에 기꺼이 몸을 던질 수 있는 이유입니다.”

쿠궁.

오광휘 단장의 강렬한 발언이 끝났다.

“…….”

정지희는 잠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서서히 눈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눈물방울은 소리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태건이 손을 내밀어 정지희 손을 붙들었다.

꾸욱.

그리고 묵직하게 말했다.

“좀 민망하지만 저희가 천금을 드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

“기회를 열어드리는 거지, 그걸 어떻게 가꾸고 키워나가는지는 전적으로 형수님과 세찬이 몫입니다.”

태건은 오해와 부담을 차분하게 덜어냈다.

정지희도 분명히 알아들었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래요. 그런 거라면 더 말하지 않을게요. 고맙게 받고 소중하게 키워볼게요.”

그렇게 정지희가 마음을 돌렸다.

결정을 내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삭.

태건과 오광휘 단장이 각자 바쁘게 전화했다.

“개똘, 촬영장비 풀세팅해서 찍어주는 주소로 와.”

“황대산이, 인테리어 업자 하나 수배해서 보내. 장소는 바로 보낼게. 그래.”

순식간에 전화가 끝났다.

놀라운 건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단 점이었다.

모든 게 즉흥적으로 진행된 거였다.

얼마 후.

황대산과 덩치 좋은 인부들이 도착했다.

“죄다 뜯어냅시다!”

“와아!”

우지직, 콰광!

분식집을 부술 듯 거침없이 들어내고 떼어내 그야말로 쑥밭을 만들었다.

분식집 크기가 작아 들어내는 건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비웠으면 다시 채우는 게 순리였다.

새로운 감각들이 돋보이는 가구로 채워지며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 되어갔다.

그날 밤.

불과 반나절 사이 분식집은 완전히 새롭게 재탄생 되어 있었다.

분식집 크기가 작아 가능한 일이었다.

“이야. 우와!”

둘러보는 한유정과 정연미는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빠진 게 없는지 꼼꼼하게 눈으로 보고, 일일이 손으로 만져가며 살폈다.

같은 시각.

태건은 오광휘 단장과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넓은 테이블 위에 여러 카메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건 노주민이었다.

“휴우. 카메라 세팅 끝났습니다.”

“총 5대라고 했지.”

“맞습니다. 한 번 찍을 때 구도 변화를 줘서 다각도로 촬영해야죠.”

“떠들면서 놀 시간에 한 번 더 살펴봐 짜샤.”

오광휘 단장이 인상을 구기고 주먹을 들어가며 재촉했다.

태건은 그 주변에 있었다.

앞치마를 점검하고, 촬영 준비상황도 한 번 더 체크했다.

“됐고, 괜찮고, 나쁘지 않아.”

척, 척.

하나씩 꼼꼼히 돌아보던 그때였다.

정지희가 하얀 셰프 옷을 입고 나타났다.

“제가 뭐라고 이런 옷을 입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보여줄 땐 확실히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습니다.”

“전 잘 모르니까 태건 씨가 하라는 대로 할게요.”

정지희는 과감하게 생각을 버리고 자신을 맡겼다.

그래서 의견차이가 일어나지 않았다.

의견이 빠르게 수렴되는 만큼 진행도 팍팍 나아갔다.

“평소 하시던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저한테 설명하신다고 생각하면 조금 더 긴장이 풀릴 겁니다.”

그렇게 태건은 정지희를 안심시켜가며 촬영 준비의 막바지에 돌입했다.

그리고 잠시 후

노주민이 손가락을 튕겨가며 신호를 줬다.

“하이, 큐!“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에 맞춰 촬영이 시작됐다.

오늘 요리할 셰프들은 정지희, 강태건, 오광휘 단장이었다.

“라면 맛있게 끓이는 법을 여러분들과 알아볼까 합니다. 우선 준비된 온갖 재료들을 썰어주세요. 그리고…….“

슥슥 삭삭.

정지희의 진두지휘 아래 촬영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게 계속 이어졌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어느새 새로운 날이 밝았다.

모든 걸 하얗게 태운 노주민이 가까스로 USB를 태건에게 건넸다.

비틀비틀.

“내, 내 죽음을 너에게 알리지 마라.”

“그렇게 내 앞에서 쓰러지면서 나한테 비밀로 하란 건 뭐야.”

“……으윽. 깨꼬닥!”

노주민은 괜히 본전도 못 찾고 죽는 척으로 마무리했다.

태건은 USB 속에서 편집된 영상을 찾아 곧장 영상 플랫폼에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그건 무려 라텔 전용 채널이었다.

이윽고 업로드 완료 되자 촬영본을 확인했다.

- 라면 맛있게 끓이는 법을…….

문제없이 재생되는 거까지 꼼꼼하게 살펴봤다.

이제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그제야 태건은 온몸 가득한 긴장감을 슬며시 풀었다.

“이제 철수하시죠.”

태건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뒤쪽은 전멸이었다.

모두 리모델링된 분식집 여기저기에 뻗어 있었다.

부스럭.

정연미가 퀭한 눈을 부비며 물었다.

“오빠, 우웅. 끝났어?”

“응. 다 됐어. 집에 가서 쉬자.”

“으응. 지희 언니, 유정 언니. 우리 이제 가도 된대요, 얼른 가요.”

흔들흔들.

정연미는 본인도 정신을 못 차리면서 정지희와 한유정을 챙겼다.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다양한 일을 함께 이겨냈는지 다정함이 듬뿍 묻어 있었다.

잠시 후 분식집 문이 닫혔다.

철컥.

아직 이른 아침이라 세상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런 적막을 뚫고 다들 서울로 올라갈 채비를 시작했다.

먼저 황대산과 노주민이 각자 차량에 올랐다.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형수님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부우웅.

바로 떠나가는 그들을 보며 정지희가 너무도 미안해했다.

“밤새 고생하셨는데, 대접한 게 라면 밖에 없네요.”

“오늘만 날입니까. 앞으로 가끔 만날 건데요. 그때 맛있는 거 해주시면 되죠.”

태건이 부드럽게 위로해줬다.

그때 오광휘 단장의 차가 옆으로 다가왔다.

스릉.

“그럼 나도 슬슬 출발하게, 유정이 지각시키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가야 될 거 같아.”

“저도 떠야죠.”

“그래. 제수씨는 이따가 서울에서 다시 뵙고, 우리 천사님은 출근 잘하시고, 그럼 빠욤.”

부웅.

오광휘 단장은 손을 흔들며 차를 출발시켰다.

이내 태건도 정연미와 정지희를 바라봤다.

“저희도 그럼 올라갈까요?”

“응. 오빠. 지희 언니, 얼른 타요.”

스윽.

정연미가 살갑게 팔짱을 끼며 안내했다.

그러나 정지희는 조금 무안하고 민망한 모양이었다.

“저까지 태워주실 거 없어요. 터미널에만 가면…….”

“가는 길인데요. 그리고 이따가 오랜만에 세찬이랑 맛있는 거 먹어야죠. 자자. 가시죠.”

태건은 아예 정지희의 등을 떠밀어 차로 안내했다.

탈칵.

“안전벨트 매셨죠. 그럼 출발합니다.”

태건은 넉살을 가득 흘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두 시간 후.

태건은 왕십리역 근처에 도착했다.

끼익.

“형수님, 그럼 오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전화하면 꼭 받으셔야 됩니다.”

“알았어요. 이제 어디도 안 간다니까요.”

“하하. 그럼.”

태건은 정지희가 더 무안하지 않게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거리에 차량이 점점 늘어나는 걸 보니 출근시간에 가까워진 모양이다.

태건은 신경이 쓰여 정연미에게 물었다.

“출근까지 아직 시간 있지?”

“…….”

정연미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의아한 태건이 힐끗 고개 돌려 바라봤다.

정연미는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태건은 갸웃거리며 조금 큰 목소리로 물었다.

“연미야, 뭔데 그래?”

“어? 아, 어…….”

가라앉은 분위기에 어색한 목소리까지 더해졌다.

마침 건널목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스슥.

부드럽게 차를 멈춘 태건이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뭔데 그래?”

“아니, 별 거 아니야.”

스윽.

정연미는 휴대폰을 뒤집으며 어색하게 답했다.

그 모습이 더욱 수상해 이리저리 생각하던 태건은 나름 진지하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게……. 일단 오빠 집으로 가. 가서 얘기해.”

“흐음. 그래.”

태건은 갸웃거렸지만 더 묻지 않았다.

…….

신호는 곧 바뀌어 다시 차가 출발했다.

그러나 차 속은 왠지 모를 어색함이 감돌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였다.

태건이 자취방 소파에 자리해 있었다.

곧 정연미가 출근 준비를 마치고 옆에 자리했다.

“옷을 몇 벌 가져다 놓길 잘한 거 같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보다 이젠 말해줄 수 있어?”

태건은 아까의 궁금증을 풀고자 운을 뗐다.

이번엔 정연미도 피하지 않고 태건을 향해 돌아앉았다.

척.

먼저 손을 붙든 정연미가 당부의 말부터 건넸다.

“오빠, 흥분하거나 화내지 않는다고 약속부터 해.”

“그럴 일이야?”

“응. 충분히 그럴 일이야.”

정연미의 대답이 너무도 진지했다.

이런 경우가 거의 없던 터라 태건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약속해.”

“정말이지?”

“절대 화내지 않을게.”

태건은 약속을 넘어 맹세까지 했다.

그제야 정연미가 휴대폰을 들어 무언가를 찾아 태건에게 건넸다.

“오빠가 직접 보는 게 좋을 거 같아.”

“뭔데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태건은 갸웃거리며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휴대폰엔 동영상 플랫폼의 댓글창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몇 개의 댓글을 눈으로 읽은 태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져갔다.

“…….”

두 눈에 힘이 가득 서리기까지 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낌새를 눈치 챈 정연미는 붙든 태건의 손에 힘을 줬다.

꾸욱.

그 압박에 태건은 순간 멈칫했다.

“그래. 알았어. 후우우우.”

굳은 표정을 애써 풀며 숨을 길게 내뱉기까지 했다.

그건 동영상에 달린 댓글 내용 탓이었다.

-새로운 라면 꿀팁이네요.

-새벽에 이런 거 올리는 건 반칙이에요.

-오늘 아침은 무조건 라면 당첨입니다.

긍정적이고 기분 좋은 댓글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건 분명했다.

그러나 그 중간중간 신경을 건드리는 댓글들이 있었다.

-라텔 채널에 라면 끓이는 영상이라니.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어제는 부단장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지 않나. 아주 막가네. 막 가.

-다른 단원들은 병원에 입원 중인데, 단장하고 부단장이란 작자들이 이러고 있네.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까 지들 맘대로 설쳐대는 거 봐라.

몇몇 댓글은 그래도 이유 있는 비판이었다.

그러나 악의적이고, 공격적인 악성댓글도 상당했다.

“……흐음.”

태건의 입에서 한 번 더 묵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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