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태건은 잠시 강아지들에게 향했다.
사실 거의 매일 본부에 들리는 이유기도 했다.
“우리 깽깽이들, 오늘은 뭐하고 놀았어?”
-컹, 컹!
달라진 짖음 소리에 태건이 멈칫했다.
“하루 사이에 변성기가 왔냐?”
-컹, 컹컹!
풀쩍풀쩍.
이순이와 삼식이는 마냥 좋아 뛰어다니며 짖었다.
그러고 보니 곧 단원들이 퇴원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전에 너희도 퇴근 한번 해야지.’
오늘은 선약이 있기에 내일을 기약했다.
그렇게 잠시 구조견들과 시간을 보낼 때였다.
띠리릭.
정연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창 일할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태건이 먼저 속삭여 물었다.
“어떻게 전화할 시간이 났어?”
“응, 조금 이따가 회의라서. 채널 오픈한 거 봤어.”
“화내지 말란 어떤 분의 분부로 탄생한 걸작이랄까나.”
태건이 넉살 좋게 말하자 정연미 목소리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하여간 잔머리는 알아줘야 돼. 목소리만 들어도 확실히 화는 많이 내려간 거 같아 다행이야.”
“그럼. 그런데 피곤하진 않아?”
“커피를 쏟아부으면서 버티고 있어. 오늘은 무조건 칼퇴근이야.”
“후후. 그래. 오늘은 방해 안 할 테니까 푹 쉬어.”
태건은 수더분하게 통화를 마쳤다.
휴대폰을 귀에서 내리는 그때 저쪽에서 오광휘 단장이 찾았다.
“라면아, 세찬이 보러 가자!”
“갑니다!”
슥슥.
크게 대답한 태건은 구조견들을 몇 번 더 쓰다듬어주고야 이동했다.
어느새 시간은 오후가 되어 있었다.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특수소방본부 근처 고깃집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음에 걸렸던 일을 해결해서 그런지 둘 다 표정이 밝았다.
“모시러 간다고 하라니까.”
“했다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터미널이 가깝다고 이쪽으로 오신다잖습니까.”
“참, 제수씨도 은근히 고집 있어.”
그렇게 험담 아닌 험담을 주고받을 때였다.
스윽.
정지희와 이세찬이 고깃집에 들어섰다.
그동안 이세찬은 두 뼘은 더 큰 거 같았다.
휙휙.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이세찬이 시선이 마주쳤다.
“왕 삼촌, 막내 삼촌!”
타다닥!
이세찬은 두 팔을 한껏 벌리며 있는 힘껏 달려왔다.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에. 세찬이 맞아? 언제 저렇게 큰 거야?”
“우와. 애들은 정말 하루가 다르게 큰다더니요.”
감탄은 잠깐이었다.
달려온 이세찬을 오광휘 단장이 먼저 번쩍 안아들었다.
“어이쿠, 녀석. 엄청 무거워졌네!”
“왕 삼촌!”
꽈악.
이세찬은 오광휘 단장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동시에 울리는 자잘한 진동에 오광휘 단장이 등을 다독여 달랬다.
“짜식, 울기는.”
“아니야. 흐윽. 안 울어!”
“그래그래. 안 울어.”
오광휘 단장은 무엇이든 이세찬이 옳다며 편을 들어줬다.
이어서 이세찬은 태건에게도 안겼다.
“우리 세찬이, 어디 다시 제대로 좀 보자. 이젠 친구들이 안 놀려?”
“아무도 안 놀려. 놀리면 내가 혼내줘.”
불쑥.
앙증맞은 주먹을 씩씩하게 내보였다.
태건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주며 대견해했다.
“그래.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면 형이니까 아무나 때리면 안 되는 거야. 그것도 알지?”
“응. 명수가 성민이 괴롭혀서 그러지 말라고 싸운 거 말고는 안 싸웠어.”
“명수, 성민이?”
태건이 갸웃거리자 정지희가 대신 설명해줬다.
“학기 초에 약간 트러블이 있었는데 세찬이가 중재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상장도 받고 그랬어요.”
“우리 세찬이, 지인짜아?”
태건이 크게 놀란 얼굴로 진하게 반응했다.
그에 이세찬이 콧대를 잔뜩 높였다.
“응. 우정상 받았어.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는 아이한테 주는 상이랬어.”
“진짜 멋지고 훌륭한 상이네.”
“막내 삼촌이 하란대로 해서 받았어. 명수가 막 밀쳐도 내가 계속 하지 말라고 했더니 명수가 이제 안 한다고 했어.”
이세찬은 자기중심적으로 말했다.
아이라 당연한 관점이었고, 태건은 머릿속으로 대충 상황을 그린 후 맞장구쳤다.
“잘했어. 우정상까지 받은 훌륭한 아이니까 오늘 고기 많이 먹어도 돼.”
“정말? 나 엄청 많이 먹을 건데, 히히.”
“왕삼촌이 다 살 거야.”
태건은 대놓고 오광휘 단장에게 미뤘다.
신기하게도 이세찬은 기다렸단 듯 찰떡 같이 반응했다.
“왕삼촌, 최고! 잘 먹겠습니다.”
“어, 으응. 그래. 먹어. 왕창 먹어.”
“와아!”
이세찬은 두 손 번쩍 들며 기뻐했다.
그 사이 오광휘 단장은 정지희에게 슬쩍 몸을 기울며 쑥덕거렸다.
“저 녀석 말입니다. 채용이 아들이 1000퍼센트 확실합니다. 저렇게 뻔뻔한 걸 보니까 확실합니다.”
“호호. 저도 가끔 놀라요.”
“채용이가 따로 몰래 가르친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태건이가 옆에서 조교 역할을 했을 겁니다.”
오광휘 단장은 태건까지 싸잡아 험담했다.
말이 험담이지 웃자고 하는 말이었다.
이세찬을 통해 이채용 팀장의 모습이 엿보였다.
그게 반가워 오광휘 단장이 더 신이 난 게 분명했다.
그건 태건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자, 세찬아, 우리 고기 먹자!”
“와아!”
치이익!
이세찬의 활기찬 호응과 함께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됐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이세찬이 터질듯한 배를 두드리며 고깃집을 나섰다.
“배부르다, 좋다아.”
통통.
그 모습이 그때 모습과 똑같았다.
“후훗.”
어른들이 그런 이세찬을 향해 잔잔하게 웃음 지었다.
그러던 중 태건이가 시간을 확인하고 정지희에게 물었다.
“당진가는 막차는 아직 시간이 좀 있는데, 차 한 잔 하고 가시는 게 어떨까요?”
“좀 일찍 내려갈까 해요. 사실 가게 문 안 여냐는 전화가 한 번씩 오거든요.”
스윽.
정지희가 슬쩍 휴대폰을 내보였다.
모르는 번호로 도착한 문자 내용이 액정에 가득했다.
-세찬 엄마. 나 미용실. 자기네 오늘 문 닫았네? 그런데 사람들이 기웃기웃 거리고 자기 언제 오냐고 그러는데. 언제 와?
태건은 벌써 반응이 오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사람들 진짜 눈썰미가……. 잠깐만요. 리모델링했는데 어떻게 알아보셨을까요?”
“그러게요. 안에서만 촬영했었는데요.”
정지희도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들어보던 오광휘 단장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숨은 마니아들이 있었던 겁니다.”
“네?”
“손님이 아예 없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제수씨 얼굴도 알 거고요.”
“그건 그렇긴 하죠.”
정지희가 인정하자 태건도 이내 오광휘 단장 말에 동의했다.
“그러네요. 그분들이 먼저 알아보고 확인차 오셨나 보네요.”
“그럼 내려가신단 걸 막을 수가 없네.”
“이건 못 막죠. 쩝. 저녁식사도 같이하고 차로 모셔다 드릴까 했는데요.”
태건은 야심찬 계획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을 내보였다.
정지희는 오히려 안도했다.
“더 부담드리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이때 얼른 가야겠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오광휘 단장이 눈꼬리를 축 내려뜨리며 앓는 소리를 했다.
그런데 그때 태건은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잠시만요. 세찬이 보신 분?”
“세찬이야. 바로 네 앞에……. 없네? 뭐야. 얘 어디 갔어.”
“세찬아, 세찬아!”
휙휙!
갑자기 사라진 이세찬으로 인해 어른들이 난리가 났다.
그러다 저 멀리 바라보던 태건이 이세찬을 발견하고 냅다 내달렸다.
“저쪽!”
“어어엇, 저기다!”
파바박!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현장이라 생각될 속도로 잽싸게 접근했다.
그런 두 사람보다 더 빠른 인물이 있었다.
정지희였다.
쌔애앵!
한 마리 야조라고 해도 믿어질 가공할 속도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정지희는 이세찬을 거칠게 붙들었다.
“세찬아,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을 했어야지, 말을!”
“엄마.”
스윽.
이세찬이 무언가에 홀린 듯 손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때 모두의 앞 도로에 빨간 소방차가 지나갔다.
부우웅.
사이렌 소리가 울리지 않는 걸 보니 복귀하는 중으로 보였다.
이세찬은 덥석 오광휘 단장의 바지춤을 붙들며 말했다.
“왕삼촌, 나 소방차 타고 싶어.”
“응?”
“나 소방차, 빨간차아, 빨간차 탈래. 하앙.”
갑자기 앙탈에 강짜를 부렸다.
얌전하던 아이의 돌변에 태건과 오광휘 단장이 적잖이 당황했다.
그때 정지희가 나서서 단호하게 나무랐다.
“이세찬, 엄마랑 약속했지.”
“몰라아, 나 소방차, 빨간차아.”
“그럼 이제 소방관 안 할 거야. 그래서 이렇게 앙탈 부리는 거지. 그렇지?”
정지희가 매섭게 추궁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세찬의 울음이 뚝 멈췄다.
“아니야. 흐윽. 세찬이 소방관 할 거야.”
“엄마랑 뭐라고 약속했지?”
“소방관 할 거면 엄마 말 잘 듣기, 흑. 앙탈 부리지 않기. 흐윽.”
이세찬은 눈물을 훔치면서도 또박또박 답했다.
대답을 듣고 있던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너무도 놀랐다.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다.
그런데 소방관이란 장래희망을 품고, 그걸 위해 지키기 어려운 약속하고 또 자신과 싸워 이겨내고 있었다.
어려운 일이다.
소방관이 그저 한때 품은 꿈이었다면 절대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다.
오죽하면 오광휘 단장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채용아…….”
“…….”
태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똑같이 이채용 팀장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채용 팀장이 꼭 저러했다.
어떤 말이라도 내뱉으면 꼭 지켰다.
이세찬은 그 이채용 팀장보다 체격만 작을 뿐 판박이였다.
정지희가 그런 이세찬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모르쇠로 일관하며 이세찬을 대했다.
“또 그렇게 소방차 보면 땡강 부릴 거야?”
“……아니요.”
“소방차를 아무 때나 탈 수 있어?”
“…….”
절레절레.
이세찬은 고개를 저었다.
정지희는 그런 이세찬을 나지막이 설득했다.
“안 되는 거 알면서도 계속 그러는 건 나쁜 거지 맞지?”
“네.”
“이번이 마지막이야. 한 번 더 그러면 엄마는 세찬이 소방관 안 시킬 거야. 알았지.”
“…….”
이세찬이 대답하지 않았지만 정지희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세찬 대답해야지. 어서.”
“……정말 안 그럴게요.”
“그래. 그럼 됐어.”
꼬옥.
정지희는 다정한 말과 함께 이세찬을 안아줬다.
그녀의 말은 틀린 거 하나도 없었다.
소방차는 소방서 가서 태워달라고 태워주지 않는다.
그건 전국 어느 소방서를 가도 마찬가지다.
정지희의 말은 분명히 이치적으로 옳았다.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태건의 머릿속에 소방차 한 대가 떠올랐다.
라텔 소방차.
사용 연한이 지나 교육용으로 활용 중인 소방차.
유중헌이 드래프트했던 그 전설의 소방차.
그 소방차가 있다.
힐끗.
태건은 바로 오광휘 단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꿈틀꿈틀.
눈썹을 들썩이며 본부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