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잠시 후.
본부장실 문이 열리며 태건과 오광휘 단장이 동시에 들어왔다.
앉아있던 박규영 본부장이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그래.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잘 배웅해 드리고 왔나?”
“…….”
척, 척.
둘 다 대답은 하지 않고 잔뜩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다가왔다.
박규영 본부장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하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스윽.
“…….”
그렇게 지켜볼 때였다.
나란히 선 두 사람 중 오광휘 단장이 힘차게 외쳤다.
“경례, 라텔!”
“라텔!”
척!
동시에 경례한 태건과 오광휘 단장의 두 눈엔 감사의 의미가 가득 실렸다.
그 이유를 짐작한 박규영 본부장은 손을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
“됐어. 다들 소방에 몸담은 일원으로서 갖춰야할 예의였을 뿐이야.”
“…….”
그러나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미동도 하지 않고 경례자세를 유지했다.
파르르. 꾹.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깨물었다.
박규영 본부장은 이렇게 흘려 넘길 수 없음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제대로 인사를 받았다.
척.
“라텔.”
“감사합니다.”
그제야 거수한 손을 내린 태건과 오광휘 단장이 뒷말을 이어갔다.
전 행정단원이 도열해 경례한 그 일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이번엔 반대로 박규영 본부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건 분명히 하지. 난 감사 받을 일도, 감사할 일도 한 적 없어.”
“다들 본부장님께서…….”
“자네들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들이 나를, 그리고 모두를 움직이게 만든 거야.”
“…….”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입을 다물었다.
박규영 본부장은 개의치 않고 이어서 말했다.
“그나저나 만족했다면 다행이야. 이제 며칠 안 남았으니 마저 정비하도록.”
스윽.
할 말을 마쳤는지 박규영 본부장이 다시 자리에 앉으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잠자코 있던 태건이 불쑥 한 마디 내뱉었다.
“아직 만족 못 했습니다.”
“…….”
우뚝.
박규영 본부장이 앉으려다 멈칫했다.
동시에 오광휘 단장이 움찔하며 쳐다봤다.
“마, 넌 또 뭔 소리를 하려고.”
“단장님, 형수님하고 세찬이만 유가족입니까?”
“……하. 놔, 이 짜식. 이상한데서 사람 오기 돋게 하는 알흠다운 쫘식.”
툭.
오광휘 단장은 눈치 챘는지 짓궂은 미소로 태건을 가볍게 건드렸다.
태건은 미동 없이 박규영 본부장에게 말했다.
“저희가 오늘 느낀 벅찬 가슴, 더 많은 유가족 분들에게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고생길을 자처하는 군.”
“그 끝에 뭐가 있는지 몸소 느꼈는데, 당장 가시밭길이 문제겠습니까.”
태건이 당차게 답하자 오광휘 단장이 한 마디 보탰다.
“그건 라면 말이 맞습니다. 먼저 떠난 동료들의 명예가 빛난다면 지금의 고생쯤이야.”
“그리고 고생에 대한 반대급부는 확실히 챙겨주신다고 하셨으니까요.”
태건이 덧붙여 말하자 오광휘 단장이 바로 흘겨봤다.
“이 짜슥이. 인마. 이 신성한 순간에 왜 또 세속적으로다가 널뛰기하고 그러냐?”
“우리 주머니도 빵빵해져야 불이든, 물이든 뛰어들 거 아닙니까.”
“넌 진짜 그래서 안 돼. 미국 다녀온 후로 애가 아주 뭐만 하면 아주 그냥……. 어휴. 쯧쯧.”
오광휘 단장이 한심하단 뉘앙스를 팍팍 풍겼다.
뚱한 표정으로 변한 태건이 박규영 본부장에게 말했다.
“……단장님은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무료봉사 하신답니다.”
“그 점은 내가 꼭 참고하도록 하지.”
그 쿵짝 맞는 대답에 오광휘 단장이 일순간 태건에게 발끈했다.
“야, 이 불어터진 면발 식기야. 생라면 뿌셔서 입에 넣고 뜨신 물 부어줄까, 앙!”
“방금 필요 없다면서요.”
“정당한 일의 대가는 받아야지. 주는 거까지 안 받는단 소리는 안 했잖아!”
“…….”
태건은 가만히 바라만 봤다.
그 침묵에 담긴 말을 박영규 본부장이 대신해 줬다.
“지금 부단장 말이 그거였어.”
“정말요? 에이, 하하……. 진짜요?”
“그래.”
끄덕.
박영규 본부장이 확신어린 행동까지 더해줬다.
순간 머쓱해진 오광휘 단장이 슬쩍 태건을 지분거렸다.
툭툭.
“야, 태건아. 우리 이따가 니네집 옥상에서 고기 구워 먹을까?”
“조금 전에 먹었습니다.”
“그그그. 그랬지. 세찬이랑 먹었네. 그러네. 그, 그럼 입가심으로 아이스크림 먹을까?”
오광휘 단장이 아이디어를 쥐어짜냈지만 또 헛다리였다.
“그것도 먹었습니다.”
“저, 저런. 우리 참 다양하게 많이 먹었다, 어쩐지 세찬이가 행복해 하더라. 그치?”
“전 그냥 생라면이나 뿌셔서 입에 넣고 뜨신 물이나 들이부을까 합니다……. 본부장님, 라텔.”
척.
태건이 인사하자 박영규 본부장이 가볍게 받아줬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출근 때 보자고.”
“네, 그럼.”
휙!
태건은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돌아섰다.
그 뒤를 오광휘 단장이 쪼르르 뒤따랐다.
“라면아, 삐쳤냐? 에이, 우리 사이에 뭘 또 삐치고 그래. 우리 오늘 좋았잖아. 형이 농담한 걸 가지고…….”
텅.
오광휘 단장이 전전긍긍하는 소리가 본부장실 밖까지 길게 이어졌다.
한편.
자리에 앉은 박규영 본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오 단장이 흘린 나사 좀 찾아보라고 하던가 해야겠어.”
그런 실없는 농담을 흘리며 자신의 업무를 다시 이어갔다.
타다닥.
컴퓨터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컹,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윽.
창밖을 바라보던 박규영 본부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순이랑 삼식이가 같이 퇴근하는 모양이군.”
그 미소가 이내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태건의 외침 탓이었다.
-이순아, 삼식아, 물어!
-야, 애들이 물라고 하면 날……. 야야야, 왜 쫓아와, 왜왜왜, 나 단장이야. 나 단장이라고!
-컹, 컹컹!
구조견들에게 쫓기는 오광휘 단장 모습이 창밖으로 적나라하게 보였다.
척 봐도 구조견들이 놀자고 쫓아가는 모습이었지만 오광휘 단장은 스릴 넘치게 쫓겨주고 있었다.
참 어이없는 모습이었다.
오광휘 단장의 머릿속은 박규영 본부장으로서도 이해불가였다.
…….
차락.
이내 박규영 본부장은 블라인드를 내려 시야를 차단했다.
“자, 일을 본격적으로 해 볼까.”
타닥, 타다다닥.
그리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아무것도 못 봤단 듯이 자신의 일에만 열중했다.
이해하기를 포기한 모습이었다.
* * *
그날 저녁.
태건은 옥상 평상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팀장님, 세찬이가 진짜 소방관이 되고 싶다네요.”
나지막이 읊조렸다.
동시에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배웅할 때가 떠올랐다.
-왕 삼촌, 막내 삼촌, 고맙습니다.
-엄마 말씀 잘 듣고 있어. 나중에 확인했는데 말썽 피웠으면 혼날 줄 알아.
-응. 엄마 말 잘 들어야 돼. 그래야 소방관 할 수 있어.
이세찬의 대답에 태건이 몸을 낮춰 진지하게 물었다.
-세찬아, 정말 소방관 할 거야?
-응. 크고 못된 불들 내가 다 끌 거야.
-그래. 세찬이가 소방관 되면……. 삼촌이 앞에 설게. 약속.
스윽. 턱!
이세찬이 힘차게 걸며 싱긋 미소 지었다.
-약속한 거야. 막내 삼촌이 먼저 말한 거야.
-응. 내가 먼저 말한 거야.
-아싸뵹. 알았어. 꼭 소방관 돼서 막내 삼촌이랑 같이 불 끌래.
회상을 마친 태건은 새끼손가락을 바라봤다.
아직 묵직한 이세찬의 손가락이 걸려 있는 거 같았다.
돌연 태건이 가느다랗게 미소 지었다.
“이거 그때까지 꼼짝없이 살아야겠네.”
물론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그 어떤 위기에 봉착해도 무슨 수를 쓰던 살아야겠단 각오가 더해졌다.
말장난 같지만 태건에겐 너무도 중요한 문제였다.
이젠 이세찬과 정지희를 찾으러 다닐 필요도 없었다.
이세찬이 성장하는 걸 지켜보며, 언젠가 함께 출동할 그 날을 그려볼 수 있었다.
슥슥.
태건은 이순이와 삼식이를 쓰다듬으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유가족들을 돌보고 나니 확실히 마음속이 가벼워졌다.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다는 후회와 더 늦지 않아 다행이란 감정이 공존했다.
다음날.
태건은 집에서 쉬며 동영상 댓글 반응을 살펴봤다.
전체적으로 조회수가 높은 편이었다.
벌써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댓글도 상당히 많이 달렸다.
-라면영상 무한 시청 중이에요.
-다음 영상은 언제 올라오나요.
-양평 해장국집 정확한 주소 아시는 분.
발 빠른 인플루언서들은 벌써 다녀간 후기 영상들을 제작해 올리기도 했다.
-양평해장국 방문 리뷰!
-식당 앞에서 몇몇 분들 인터뷰를 했는데 원래 숨은 맛집이었답니다.
-네일아트샵 전격 방문.
-솔직히 스킬은 조금 떨어집니다. 그런데 꼼꼼하게 관리를 잘해주시고 신경 많이 써주세요.
-분식집 좌표 찍습니다. 충남 당진시…….
-동영상 보고 왔다면 캔음료수 하나 주세요. 그리고 아이가 정말 귀엽습니다. 그게 킬포임.
-시장 사장님. 두꺼운 양말 서비스 감동이에요.
-올이 나간 게 있어서 말씀드렸더니 그냥 주셨어요. 눈치보다 돈통에 몰래 돈 넣고 튀튀중.
흐뭇한 소식들이 속속 올라왔다.
그러던 중 태건의 휴대폰 위에 메시지 팝업창이 떠올랐다.
-까똑!
-정혜랑 : 사진을 전송했습니다.
순간 태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뭔 사진?”
톡.
액정을 누르자 화면이 바뀌며 사진이 떠올랐다.
양평해장국집의 테이블에 박유신과 정혜랑, 그리고 손미주가 둘러앉아 식사 중인 인증샷이었다.
그걸 본 태건이 얼른 메시지를 입력했다.
토도독.
-강태건 : 뭐임, 갑자기 니들이 거기서 왜 나와?
-손미주 : 선배, 저 납치……. 읍읍, 살려……. 읍읍.
-박유신 : (조용히 해, 시끄럽게 하면 두 그릇 먹여버리는 수가 있어.)
-정혜랑 : 선한 사람들의 선한 식도락 여행 중.
카톡으로 상황극까지 하며 놀고 있었다.
태건은 상황극보다 정혜랑의 대답이 신경을 자극했다.
선한 식도락 여행?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그건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진실된 삶을 살아야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