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토도독.
-강태건 : 백수들이 할 게 없어서 얼굴책에 사진 올리자고 모인 게 아니고?
-정연미 : (소곤소곤) 오빠, 그렇게 팩트 폭행하면 다 입원할지도 몰라, 그러지 마.
정연미가 전격 등장하자 단체채팅방이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손미주 : (씩씩) 야, 정연미. 이따 밤에 한강에서 머리끄덩이 한 번 잡자!
-정연미 : 미안, 오늘 오빠 집에서 데이트 있어서 안 되겠는데. (후훗)
-손미주 : (번뜩) 오호라. 데이트? 데이트으으?
-정혜랑 : (휘휘) 내가 오늘 태건이네 들릴 일이 있던 거 같은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태건이 바로 싹둑 잘랐다.
-강태건 : (섬뜩) 옥상에 개 풀었음. 올 테면 와 봐. 애들 이빨 갈아 놓을 테니까, 들어와!
-정연미 : (큭큭) 오모나, 이순이랑 삼식이가 낯선 사람 별로 안 좋아하는데.
대놓고 거부하자 친구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정혜랑 : (화르륵) 이런 치사한 한 쌍의 라쿠카라차 같으니라고!
-박유신 : (밥상엎어) 타도 커플! 솔로 만세!
태건은 빙긋 미소 지으며 휴대폰을 두드렸다.
토도독.
-강태건 : (워워) 침착하고, 조만간 우리 모여서 뽀지게 한 번 놀자.
-정혜랑 : (초롱초롱) 네가 쏘냐?
-강태건 : (에헴) 랑랑아, 형이야.
그 한 마디에 전세는 바로 역전됐다.
-정혜랑, 박유신 : (굽실) 형님, 존경합니다. 형수님과 좋은 시간 되십시오.
-손미주 : (치어리딩) 오빠, 오빠!
-김윤재 : (그렁그렁) 님들아. 나를 잊지 말아요.
막판에 불쑥 등장한 김윤재를 끝으로 채팅이 마무리됐다.
태건은 이 순간을 모면하려고 꺼낸 말만은 아니었다.
“한 번 모일 때 됐어.”
얼마 전 여기 옥상에서 아침부터 술파티를 벌였던 게 마지막이었다.
친구들과 좀 더 의미 있는 추억을 쌓고 싶었다.
어느 날 훌쩍 시간이 지나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 * *
저녁 무렵.
정말 정연미가 집에 와 있었다.
태건이 식탁에 앉아 부엌에서 조리 중인 정연미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풀풀 풍겨오는 냄새를 코로 흡입하며 더욱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흐읍. 냄새가 비슷한데?”
그 소리에 앞치마를 맨 정연미가 냄비를 들고 다가왔다.
“그럼 내가 옆에서 직접 보고 배우고, 동영상을 얼마나 돌려봤는데. 짜잔.”
턱.
냄비 속엔 정지희의 비법이 가미된 특제라면이 그럴싸하게 담겨 있었다.
진짜 겉보기에는 엇비슷했다.
그러나 태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형수님이 모든 비법을 다 전수하진 않으셨을 걸?”
“먹어 보고 말해.”
“자신 있다면야, 그럼 어디…….”
후루룩.
태건은 작은 그릇에 덜어 한 젓가락 크게 흡입했다.
그와 동시에 두 눈에 힘이 빡 들어갔다.
번뜩!
“흡. 이 맛은!”
“호호.”
“…….”
후루룩. 후루룩.
태건은 말없이 계속 라면만 흡입했다.
그 모습만 본다면 왜 태건의 호출네임이 ‘라면’인지 납득이 될 정도였다.
잠시 후.
냄비 속이 텅텅 비었다.
태건은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엄지를 내밀었다.
“끝내줬어. 진짜…….”
“그렇게 똑같았어?”
“95프로 똑같았어.”
태건의 솔직한 평가에 정연미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뭐야. 안 똑같았단 거잖아.”
“5퍼센트는 당진에 여행가야 느껴지는 맛이야.”
“……피이. 말만 잘해.”
정연미는 툴툴거렸지만 듣기 싫진 않은 모양이었다.
달그락.
태건이 빈 냄비와 그릇을 한 곳에 모아 일어났다.
“그럼 설거지는 내가, 좀 쉬고 있어.”
“내가 할게, 놔둬.”
“TV 보면서 쉬고 있어.”
태건의 몸은 벌써 부엌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마당에서 구조견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카르르릉.
-크르릉.
한 박자 먼저 들은 정연미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애들이 이상하게 울어.”
“그러게. 길고양이가 올라왔나?”
의아해하던 그때였다.
빠라밤.
휴대폰도 울렸다.
바로 꺼내 상대를 확인한 태건은 좋은 기분이 팍 상했다.
“아으, 웬수 덩어리다.”
“태영 씨?”
“이름만 봐도 화딱지가 또 솟구치네……. 또 왜!”
태건은 전화를 받자마자 며칠 전 감정이 솟구쳐 따졌다.
강태영의 첫 마디는 그때와 똑같았다.
“오늘도 골라골라, 잘 지내셨는가, 우리의 골라맨.”
빠직.
반사적으로 힘줄이 솟구친 태건이 스산하게 말했다.
“난 당신이 누군지 안다. 당신이 어딨는지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죽일 것이다.”
“떽, 너 형한테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엄마도 계시는데 말이야. 얼른 문이나 열어.”
빠직, 빠직.
태건의 이마에 힘줄이 두 개로 늘어났다.
“내가 전에 형이 옥상 집에 무단 침입하던 날 말했지.”
“뭘?”
“한 번 더 어머니 거론하면서 장난치면 그땐 형이고 뭐고 진짜 어디 하나 부러뜨린다고.”
“장난 아니야. 빨리 문 열어. 이 골라맨아.”
강태영의 말투는 유들유들하기만 했다.
태건은 도저히 진심으로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난 진심으로 경고를 했고, 형은 내 경고를 무시했어.”
“장난 아니라니까.”
“후우. 도망가. 지구 끝까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면 동족상잔의 아픔이 반복될 거니까.”
구우우.
바람도 없는데 태건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만큼 진심으로 화가 났다.
그때였다.
-깨개개갱.
-깨개갱.
밖에서 구조견들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 그래도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태건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 개시끼들이 길고양이한테 얻어터지고 있나!”
“자, 자기야. 바, 밖에…….”
꾸벅.
정연미가 창밖을 향해 대뜸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태건의 눈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지금 나가잖아. 나가고 있잖아, 잠깐만.”
쿵쿵.
태건은 거친 발걸음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이내 현관에 도착한 태건은 슬리퍼에 발을 욱여넣으며 쓰게 투덜거렸다.
“이 자식들 덩치는 산만한 것들이!”
잠금장치를 해제함과 동시에 현관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벌컥!
“이 강생이들아, 덩치 값도 못…….”
문을 엶과 동시에 소리부터 냅다 지르다 점점 잦아들었다.
바로 앞에 두 명이 서 있었다.
중년의 여성과 자신이랑 비슷하게 생긴 동년배 남자였다.
둘 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동년배 남자는 보자마자 속에서 욱하고 무언가 솟구쳐 올랐다.
“저 보기만 해도 속이 뒤집어 질 거 같은 면상은 우리 형이 분명한데.”
“응, 나 맞아. 골라맨!”
싱글생글.
강태영이 손을 흔들며 놀리기까지 했다.
그때 태건에게 강태영의 뒤쪽에 상황이 설핏 보였다.
하얀 백구 한 마리가 이순이와 삼식이를 동시에 제압하고 있었다.
‘아무리 어려도 전문적으로 훈련 받은 애들인데?’
심지어 하얀 백구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순간 친숙한 이름이 번뜩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 세리니?”
-멍!
세리는 이름이 불려지자 입이 살짝 벌어지더니 혀를 빼꼼 내밀며 웃었다.
그제야 태건은 앞에 선 중년 여성이 퍼뜩 떠올랐다.
‘그럼?’
휙!
재빨리 그녀를 눈에 담았다.
…….
다시 바라본 순간 바보가 된 듯이 멍해졌다.
그 와중에도 두 눈은 중년 여성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다소 촌스런 옷차림인데 이상하게 세련미가 풍겨왔다.
꾸미지 않았는데, 오랫동안 도시에서 살았던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자신과 너무도 비슷한 눈과 코.
그리고 저 손은 어렸을 때부터 참 많이 잡아 본 거 같았다.
저 품은 너무 그립고 당장 다가가 안기고 싶었다.
태건은 중년 여성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눈에 담았다.
어딜 봐도, 어떻게 봐도, 아니 처음 본 그 순간 본능적으로 이끌린 그 말을 어렵사리 내뱉었다.
“어, 어머니.”
“이제라도 알아봐줘서 고맙다……. 첫째야. 얘 누가 낳았니?”
어머니가 답답했는지 강태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강태영이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정중하게 손짓했다.
스윽.
“그건 엄마 기억이 제일 확실하지 않을까?”
“나도 내가 세 번 낳은 기억은 있는데……. 쟤는 중간에 바뀌었나?”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지.”
“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니. 어쩜 애들이 하나 같이 지 아빠 닮아 가지고. 으이그.”
어머니는 괜히 이 자리에 없는 아버지를 핀잔했다.
얼떨결에 혼난 강태영은 억울해했다.
“그럴 거면 왜 나한테 물어.”
“쟤가 저러고 있으니까 그러지.”
“엄마가 안 본다고 그러다가 갑자기 찾아왔으니까 그렇지……. 저는 그 어떤 결정이라도 어머니의 선택을 지지합니다.”
강태영은 순간 생존본능이 발동했는지 얼른 말을 바꿨다.
그때였다.
태건은 본능에 이끌려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터덕.
“어머…….”
양팔 벌려 끌어안으려는 바로 그때였다.
턱!
어머니가 손을 뻗어 막더니 고개를 저었다.
“둘째야. 그만. 아직 거기까진 아니란다.”
“그런 게 어딨어요!”
“그럼 니가 엄마 하든가.”
“…….”
태건은 무적 논리에 할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은 채 태건을 옆으로 밀었다.
“좀 비켜 들어가게……. 세리야. 너도 애들 그만 괴롭히고 놔줘.”
척척.
세리에게 면박을 준 어머니는 그 길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강태영이 뒤따라 들어가며 어떻게 된 건지 부연설명을 곁들였다.
“그건 쟤들이 잘못한 거지. 아무리 오랜만이지만 엄마도 못 알아보고 으르렁거렸는데.”
슥슥.
이내 강태영도 집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끼잉.
세리는 괜한 구박을 받아 앓는 소리를 내며 이순이와 삼식이를 풀어줬다.
태건은 시무룩한 세리를 멀리서나마 위로해줬다.
“세리야, 이따가 나올게. 일단 놀고 있어……. 아차, 연미!”
후다닥.
태건은 정연미가 떠올라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등장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태건이 부리나케 거실에 들어섰다.
거실엔 이미 어머니와 정연미가 마주하고 있었다.
강태영이 눈치를 보다 재빨리 태건에게 다가와 물었다.
“연미 씨 있단 얘기는 왜 안 했어?”
“그 전에 나한테 집에 온다는 전화부터 했어야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무슨 힘이 있냐? 엄마가 가자면 가는 거지.”
“됐고, 형은 좀 비켜 봐.”
스윽.
태건은 강태영을 밀어내고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