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287)화 (286/320)

287화

이내 태건은 어머니와 정연미 사이에 섰다.

서로 모르지 않았다.

태건과 정연미는 상견례 직전까지 진전이 있었던 사이다. 정연미의 아버지 반대로 이만큼 시간이 흐른 거였다.

태건은 정연미 쪽에 서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크흠. 연미랑 계속 만나고 있었습니다.”

“알아.”

“네. 네?”

태건은 물론 정연미도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오히려 어머니가 심드렁하게 바라봤다.

“태영이랑 주미가 있잖니.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 집에 TV도 있고, 인터넷도 된단다.”

“아, 네. 그렇죠. 그럼 아시겠네요.”

태건은 괜히 나선 입장이 되어버리자 머쓱해졌다.

어머니는 좌우를 둘러보더니 거실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했다.

척.

“연미야. 오랜만이구나. 인사부터 받자.”

“네, 어머니.”

정연미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예의를 강조하는 건 아니었다. 마주 고개 숙여 상호존중의 예의를 차렸다.

그렇게 인사가 오간 후였다.

어머니가 일어나려다 어디에 시선이 고정됐다.

척척.

그쪽으로 말없이 다가가자 태건과 강태영의 시선도 따라갔다.

“저쪽은 장식장?”

“저긴 왜?”

형제는 물론 정연미도 갸웃거렸다.

이내 장식장에 다가선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스윽 훑었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내밀며 태건을 노려봤다.

찌릿.

“먼, 지, 가, 있, 구, 나.”

그 스산한 말에 태건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다다다, 당장 닦겠습니다!”

후다닥!

태건은 한 마디도 못한 채 걸레를 찾아 뛰어야 했다.

강태영은 웃기 바빴다.

“큭큭.”

“첫, 째, 야.”

휙.“

어머니는 짤막한 부름과 함께 고갯짓을 했다.

그 순간 강태영의 고소하단 웃음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헉, 갈게요.”

추욱.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태건의 뒤를 따랐다.

그런 상황에 정연미는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저도…….”

“연미는 이리 온.”

탁탁.

어머니는 어느새 식탁에 앉아 반대편을 두드렸다.

정연미는 손사래 치며 난처해했다.

“아니에요. 제가 얼른 닦을게요.”

“이리 오래도.”

“네, 어머니.”

종종.

어머니의 포스에 정연미는 두 번 거부하지 못하고 얼른 식탁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태건과 강태영은 장식장 선반을 닦기 시작했다.

그것도 하나씩 분리해 광이 나도록 닦아야 했다.

뽀득뽀득.

태건이 분리한 선반을 닦는 중이었다.

그러나 시선은 식탁에 고정되어 있었다.

거리가 있어 어머니와 정연미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

“뭔 얘기를 하는 거지?”

너무 궁금했다.

최근 다시 관계가 진전되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등장이 어떤 변수가 될지 몰라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뭔가 엄청 진지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그때 강태영이 찰싹 붙어 더빙하듯 어머니와 정연미를 흉내 냈다.

-이 앙큼한 것, 그렇게 우리 애랑 떨어지라고 했는데, 아직도 붙어 있어?

=흑흑, 어머니, 그게 아니에요. 저희는 서로 사랑하고 있어요.

-사랑이 밥 먹여줘? 당장 나가, 꼴도 보기 싫어. 다신 우리 애 앞에 얼씬거리지 마.

=저희 이대로 사랑하게 해주세요. 어머니. 어흐흑. 어머니.

1인 2역의 생쇼에 태건이 어이없이 바라봤다.

“형, 지금 뭐해?”

“이 얼마나 리얼한 더빙이냐. 심수일과 김순애 스타일 몰라?”

“……이름이 그게 맞아?”

“몰라. 나도 들어만 봤지. 내가 태어나기 몇 십 년 전 영환데 내가 어떻게 알아.”

강태영은 시종일관 뻔뻔했다.

“…….”

태건이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더더욱 뭐라고 할 수가 없는 게 진짜 분위기가 너무 심상치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니야.’

정말 가서 무슨 일인지 들어봐야 할 거 같았다.

스윽.

태건이 움직이려던 그때 강태영이 어깨를 붙들었다.

“야, 가지 마.”

턱.

“왜.”

“2부 시작하잖아.”

“……진짜 죽일까?”

태건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강태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빙을 다시 시작했다.

=어머니,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정말 잘할게요. 뭐든지 하겠어요.

-고얀 것, 말로 해선 안 되겠구나. 섭섭지 않게 넣었으니 먹고 떨어졋!

=이러지 마세요. 아무리 이러셔도 전 그이를 사랑해요.

-얼른 받아. 내 너 같은 애들 한두 번 본 줄 아니. 결국 이 돈이 목적이잖아.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흑흑.

강태영은 우는 연기까지 가식적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그게 단순히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게 아니었다.

정말 식탁에서는 봉투 하나를 두고 어머니와 정연미가 서로 밀어내고 있었다.

강태영의 더빙은 지어냈다고 하지만 현재 상황과 그럴싸하게 맞아떨어졌다.

태건이 봐도 상황이 그러했다.

결국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갔다.

“뭐하시는 겁니까!”

타다닥!

부리나케 다가가자 어머니와 정연미가 봉투를 붙든 채 바라봤다.

“너 왜 그러니?”

“오빠 아니, 태건 씨?”

어느새 다가선 태건은 재빨리 봉투부터 낚아챘다.

탁!

“어머니, 이거 뭡니까. 언제부터 어머니가 이런……. 이런 분이셨습니까.”

“이게 뭔 줄 알고. 내가 어떤 분이 된 거니?”

“제가 모를 줄 아십니까. 이거 속에. 이거 보십시오. 이거!”

쑥!

태건이 내용물을 쑥 뽑아 개탄스럽게 외쳤다.

“이거 수안보온천 특급호텔 3박4일 이용권 아닙니까!”

“그래. 그게 왜?”

“……그러니까요. 이이, 이게 왜 여기서 나오는 걸까요?”

태건은 너무도 당황해 말을 세차게 더듬었다.

바로 그때였다.

“큭큭큭, 크헤헤헤헤!”

버둥버둥.

저쪽에서 강태영이 걸레를 움켜쥔 채 배꼽 잡고 웃었다.

그제야 태건은 어떻게 된 건지 직감했다.

‘또 당했다.’

강태영에게 요즘 몇 번을 당하는 건지 속이 뒤집힐 거 같았다.

휘이잉.

허탈하다 못해 하얀 재가 된 태건은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산산이 부서져 흩날렸다.

그런 태건을 바라보던 어머니와 정연미가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푸훕, 흐크흡.”

한참 웃던 어머니가 정연미에게 말했다.

“쟤가 저래. 애가 머리도 좋고 똑똑하긴 한데, 저렇게 식구들이랑 있으면 맹해.”

“저래서 더 매력 있는 거 같아요. 너무 완벽하면 숨 막히잖아요.”

“하긴 그래서 쟤들 아버지가 좀 숨 막히는 스타일이긴 해.”

“맞아요. 그런 거 같아요.”

뭔가 이상한 결론이었지만 정연미는 딱히 뭐라고 반박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내 어머니가 현타 중인 태건을 불렀다.

“얘, 둘째야. 넌 엄마를 어떻게 보는 거니?”

“아닌 건 아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근데 이건 아. 저랑 연미랑 여행 다녀오라고요?”

“김칫국을 마시려면 김치부터 담그는 게 순서 아니니?”

어머니가 조목조목 팩트를 말하자 태건이 헛기침을 하며 차지게 답했다.

“크흠. 재료는 다 준비된 거 같습니다.”

“그래도 우선 버무리고 말하자.”

“네. 그럼 이거는요?”

“예비 사돈어른들 다녀오시라고. 그동안 너 때문에 얼마나 속이 상하셨니.”

찌릿.

어머니가 흘겨보며 말하자 태건의 미소가 어색해졌다.

“아, 아버님하고 어머님이요.”

“위로 여행 겸 힐링하고 오시라고. 내가 이런 것도 챙기고 해야 돼?”

“더 정진해서 딴딴한 부침두부가 되겠습니다.”

태건이 너스레를 가득 떨자 어머니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으이그, 말이나 못하면.”

“아무튼 이거 때문에 옥신각신하고 계셨던 겁니까?”

태건이 묻자 어머니가 정연미를 가리키며 나무랐다.

“연미가 자기가 먼저 준비했어야 했다고, 우리 먼저 가라는 거 아니니. 그게 말이 되니?”

“어떻게 그래요. 우리 아빠가 너무 반대하고 그랬는데요.”

“이젠 아니라며.”

“봄 시즌 전에 찾아뵌다고 하셨어요. 어제 말씀하셨는데, 오늘 어머님을 이렇게 뵐 줄 모르고…….”

정연미가 전전긍긍하자 어머니가 손을 살포시 감쌌다.

스윽.

“얘는 그런 말이 어딨니. 서로 필요했던 시간이었어. 지금도 너희 어려. 급할 거 없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연미야, 내 솔직한 심정은 네가 지금이라도 내 아들 차버렸으면 좋겠어.”

어머니의 갑작스런 딴소리에 태건과 정연미는 된서리 맞은 표정으로 변했다.

“어머니!”

“네?”

그 반응에도 어머니는 미동 없이 이어서 말했다.

“내 아들이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나도 속 비워놓고 살아.”

“…….”

“주미가 저런 애 데려왔으면 머리카락 다 뽑아버렸을 거야. 그게 솔직한 심정이야.”

어머니의 얼굴이 축 가라앉았다.

그때 정연미가 어머니의 손을 굳게 붙들었다.

“태건 씨 없으면 어머니랑 살죠, 뭐.”

“그럴까. 우리끼리 알콩달콩 살까?”

오가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본 태건이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요. 저 그냥 막 보내지 마시고요. 저 여기 살아 있는데요. 여기요?”

똑똑.

식탁까지 두드렸지만 둘 다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정연미가 먼저 어머니에게 색다른 제안을 꺼내기까지 했다.

“저희 엄마랑, 주미 씨랑 넷이서 여행 다니는 건 어때요?”

“그거 좋다. 주미한테 항공권하고 호텔 싸게 잡으라고 하고 스케줄 맞춰서 다니면 되지.”

“제가 은행 쪽에 여행상품 괜찮은 걸로 알아봐 놓을게요.”

정연미가 거들자 어머니는 한술 더 떴다.

“애들 아빠한테 산삼 몇 뿌리 캐 놓으라고 해서 그거 먹고 가면 되겠다. 그치?”

“저희 아빠 매장 한 바퀴 돌면 쓸 만한 여행용 전자제품 좀 챙길 수 있을 거예요.”

“어머머, 우리 돈 엄청 굳겠다. 너무 좋다.”

“우리 어디부터 갈까요. 그래도 기왕이면 유럽부터 시작할까요?”

어느새 짝짜꿍이 맞아 진짜 여행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지켜보던 태건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래. 시댁이니, 친정이니 이러는 거보다 좋긴 하네.’

그렇게 이해하는 게 지금으로썬 최선이었다.

잠시 후.

식탁에선 어머니와 정연미가 본격적으로 여행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휴대폰으로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수첩과 펜을 준비해 동선을 짜고 있었다.

“유럽은 여기서 이렇게 도는 방향으로…….”

“북미는 이렇게 도는 걸 추천을 많이 하는데요…….”

그냥 계획만 짜는 거다.

당장 실행에 목적을 두는 게 아니라 행복회로를 돌리는 중이었다.

고부지간보다 모녀지간으로 보일 다정한 모습이었다.

태건과 강태영은 마당 평상에서 거실창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다.

태건이 멍한 얼굴로 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슥슥.

“좋은 거지?”

“고부간의 갈등보다야 백번 좋은 거 아니냐?”

슥슥.

강태영은 이순이와 삼식이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태건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긴 해. 그런데 오늘 평일 아니야?”

“말도 마. 나 지금 강제 휴가 중이야.”

“뭔 회사가 겨울 휴가가 있어. 똑바로 대답 안 하면 애들 침으로 샤워시켜버린다.”

태건은 진심으로 말했다.

당한 게 있어 갚아줄 기회만 엿보는 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