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그 뒤끝을 알기에 강태영은 얼른 제대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강제로 연차 묶어서 쓰는 중이야.”
“그게 갑자기 되냐?”
“되더라. 우리 엄마 빽이 이렇게 무시무시할 줄 몰랐어.”
그 소리에 태건이 갸웃거렸다.
“어머니가 빽이 어딨어?”
“아부지. 아부지 후배가 우리 회사 상무님이시라더라. 세상 참 좁다.”
“그건 그럴 수 있겠다.”
태건은 의외로 납득했다.
강태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아버지도 대단해. 진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중견기업인데 그걸 때려치우고 산속에 들어가시다니.”
“그보다 형이, 지금 내 앞에 있네?”
태건의 목소리가 갑자기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강태영도 멈칫하더니 재빨리 두 손을 하늘 높이 번쩍 들어올렸다.
휙!
“대덩합니다!”
“놀릴 땐 기분 좋았지. 즐거웠을 거야. 그래. 즐거웠겠지.”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난 진심으로, 정말 너의 사정이 좋지 않을 줄 알고…….”
“조용히 해.”
“넵. 입 다물고 조용히 찌그러지겠습니다!”
강태영은 알아서 저자세를 취했다.
직접 대면하면 태건에게 상대도 되지 않는단 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그래서 비대면일 때 그렇게 자극하는 거기도 했다.
이렇게 만날 줄 모르고 놀렸던 게 문제였다.
스윽.
태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넘어갈 성격이 결코 아니었다.
받았으면 돌려주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그리고 옥탑방의 가훈이었다.
언제부터?
지금 이 순간부터.
이내 태건은 세리와 함께 평상에서 멀어지며 무심이 말했다.
“이순이, 삼식이……. 덮쳐.”
그 말과 동시였다.
이순이와 삼식이의 눈빛이 장난기로 가득 물들었다.
핑!
-헤헤헤헥!
할짝, 우당탕!
“아아아, 안 돼!”
강태영은 철저하게 태건에게 교육된 이순이와 삼식이에게 테러를 당해야 했다.
한편 태건은 세리와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세리야. 잘 지냈어?”
-할짝.
“어이쿠, 녀석. 그래그래. 나도 반가워.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태건은 세리와 정겹게 포옹도 하고 뽀뽀도 하며 데이트를 즐겼다.
같은 옥상인데 한쪽은 핑크빛 달콤한 모습이었고, 또 다른 한쪽은 일방적인 애정공세에 시달렸다.
* * *
다음날 아침.
태건은 세 마리 진돗개와 출근길을 나섰다.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리던 태건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어머니도 참.”
어머니는 출근하는 태건에게 세리의 목줄을 쥐어줬었다.
“둘째야. 엄마는 네 형하고. 며칠 다녀올 데가 있으니까 세리 좀 데리고 있어라.”
“엄마, 나도 회사…….”
“넌 운전 해.”
“안 돼!”
질질.
강태영은 그렇게 어머니 손에 끌려갔다.
태건은 진돗개들과 함께하는 출근길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땐 참 좋은 직업이란 말이야.”
적어도 어떤 사회적인 인연에 의해 출퇴근에 영향을 받진 않을 수 있었다.
이내 태건은 특수소방단 주차장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진돗개들은 자유였다.
탈칵, 탈칵.
목줄부터 풀어줬다.
평소라면 이순이와 삼식이가 쏜살같이 튀어나가야 했다.
그런데 세리가 어젯밤에 서열을 새로 정리해서 그런지 얌전했다.
척, 척.
세리가 앞서고 그 뒤에 이순이와 삼식이가 조용히 뒤따랐다.
그 진돗개들의 모습이 태건은 신기했다.
“이야, 이래서 리더가 중요한 거구나.”
그런데 반해 지금 라텔의 모습은?
……엄청 나쁜 편이 아니란 나름의 판단을 내렸다.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 시켜가며 본부 건물로 향하던 때였다.
샤샤샥.
본부 건물 벽면을 따라 들쥐 한 마리가 빠르게 지나쳐갔다.
겨울이라 먹을 게 없어 종종 발견됐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 발 앞서 걷던 세리가 뒤를 돌아보며 낮게 울었다.
-크르릉.
-쥐, 가, 있, 어?
그 눈빛, 그 표정.
어젯밤 어머니가 오버랩 됐다.
“어, 엄마다.”
태건만 느낀 게 아닌 모양이다.
이순이와 삼식이가 미친 속도로 쏜살같이 들쥐를 향해 뛰어갔다.
쌔애앵!
태건은 어느새 점처럼 멀어진 이순이와 삼식이를 애잔하게 바라봤다.
“너희에게도 겨울이 찾아왔구나.”
세상 깐깐한 세리와 지낼 며칠이란 시간을 잘 이겨내길 바랬다.
태건은 진돗개들을 뒤로하고 본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정식 출근은 며칠 여유가 있었다.
그때까지 마냥 늘어져 있을 수는 없었다.
탁.
체력단련실에 들어선 태건은 가볍게 스트레칭부터 했다.
“헛둘, 헛둘.”
충분히 몸을 풀어주며 굳은 근육을 이완시켰다.
그 후 본격적으로 체력단련을 시작했다.
철컹, 철컹.
“흡, 흐읍!”
적잖은 무게를 들고 내리길 반복하며 근육을 부풀리고 땀을 흘렸다.
사실 태건이 운동을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소파에 편히 누워 TV보는 걸 더 좋아한다.
그러나.
지금 흘리는 땀 한 방울이, 현장에선 누군가의 피 한 방울이다.
그걸 알기에 이를 악물고 다음 출동에 대비하는 거였다.
운동하는 사이사이 밖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차자자작!
-멍, 멍멍!
-컹컹!
진돗개들이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모양이었다.
“허억, 허억. 너희는 노는 게 운동이지.”
주르륵, 스윽.
태건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때 난데없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악. 쥐야. 쥐!
-으악, 깜짝이야. 이거 뭔 쥐야!
-누가 잡아다 여기다 놨어. 빨리 치워!
쥐 잡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태건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쓴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좀 걸렸네.”
숨을 고른 태건이 다시 운동기구를 들어 올리려던 그때였다.
“이번에도 선수를 뺏긴 건가.”
들려오는 소리에 자세를 잡던 태건이 고개를 돌렸다.
단단히 준비하고 들어오는 황대산이 보였다.
스륵.
“선배.”
“으하하. 싸나이라면 역시 펌핑이지. 쫙쫙 갈라지는 근육보다 아름다운 게 어딨겠어.”
“별로. 저는 노는 게 제일 좋습니다.”
태건은 부정했지만 황대산은 제멋대로 알아들었다.
“그렇지. 남자의 놀이란 누가 뭐래도 무게를 치며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아니겠어?”
“선배는 그걸 느끼러 오신 거 같네요.”
“물론이지. 그런데 밖에 개가 한 마리 늘었던데, 누구 개야?”
꾸욱, 꾸욱.
황대산이 앞에서 스트레칭하며 물었다.
태건은 그 질문에 멈칫하며 반문했다.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내가 아는 진돗개가 많지 않아. 세리라면 모를까.”
“…….”
태건이 침묵하자 황대산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진짜 세리야?”
“네.”
“……어흐흑. 세리야!”
우당탕!
황대산은 돌연 애타게 울부짖으며 다급히 체력단련실을 빠져나갔다.
그 감수성 가득한 퇴장을 태건은 어이없이 바라봤다.
“확실히 겉은 곰인데, 속은 소녀야.”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건 여린 속마음을 방어하기 위한 보호막이었다.
친해진 만큼 이젠 확신했다.
다시 자리를 잡은 태건은 운동을 이어갔다.
철컹, 철컹.
“후웁, 후웁!”
근육이 꽉 차오르는 빵빵한 느낌이 싫진 않았다.
그때 어깨가 축 쳐진 노주민이 들어왔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끄. 어흡!”
철렁.
순간 힘이 빠진 태건이 벌떡 일어나 나무랐다.
“갑자기 그렇게 나타나면 힘 빠지지!”
“전 이미 빠져 있습니다.”
“그래 보인다만……. 선배가 끌고 나왔냐?”
태건은 혹시나 싶어 물었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반반입니다. 오늘까진 쉴 줄 알았거든요.”
“어쨌든 나왔으니까 운동이나 해.”
“하암. 잠 좀 깨고요.”
노주민은 하품하며 스트레칭을 하는 새로운 스킬을 선보였다.
두둑. 두둑.
이어서 목을 가볍게 돌리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태건은 그런 노주민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어보였다.
‘영 생각 없는 녀석은 아니라니까.’
생각지 못한 돌발행동을 해서 그렇지 성실함은 인정했다.
그런데 노주민이 끝이 아니었다.
복도에서 투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넌 옷이 그게 뭐냐?”
“운동할 땐 이렇게 입는 거예요.”
익숙한 남녀의 목소리에 태건이 체력단련실 문을 바라봤다.
‘설마?’
의아해하던 그 순간 오광휘 단장과 김지수가 등장했다.
오광휘 단장은 가벼운 운동복 차림이었고, 김지수는 몸매가 부각되는 레깅스를 입고 있었다.
오광휘 단장이 먼저 손을 들어 반겼다.
“여, 라면, 개똘. 하이루.”
“안녕하세요.”
그들의 등장으로 휴식 중인 라텔 단원들이 모두 모였다.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태건은 놀라워했다.
“다들 어떻게 된 겁니까?”
“출근 3일 전인데 몸 만들어야 될 거 아냐. 다들 그 생각이 그 생각인 거지.”
오광휘 단장의 대답은 심드렁했지만 너무도 적절했다.
태건도 궁금증이 이내 미소로 바뀌었다.
“그러네요.”
“그건 그렇고, 세리가 왔더라. 인사는 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어젯밤에 어머니가 데려오셨습니다. 며칠 맡겨두시고 어디 가셨지만요.”
“어머니가? 이제 널 자식으로 받아주시겠대?”
오광휘 단장의 표현이 뭔가 이상하자 태건이 갸웃거렸다.
“원래 자식이었습니다만.”
“그렇다고 치고.”
“네?”
“오랜만에 세리 보니까 반갑더라. 애들이랑 잘 뛰어 노는 모습도 보기 좋고.”
오광휘 단장은 하고픈 말만 이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2기 단원들이었다.
특히 그 단원들이 노주민과 김지수였다.
개똘과 엉뚱.
그 호출명이 괜한 게 아니었다.
노주민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안타까워했다.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형태는 다양하게 이뤄져 있으니까 너무 기죽으실 거 없습니다.”
“그래도 잘 됐네요. 이제라도 자식으로 받아주신다니. 선배, 축하해요.”
역시나 오해를 넘어 제멋대로 해석하고 확신하고 있었다.
순간 태건은 골머리가 지끈거렸다.
“단, 장, 님.”
“헛둘……. 왜?”
스트레칭하던 오광휘 단장이 해맑게 물어왔다.
태건은 이를 갈며 노려봤다.
“까득. 지금 저를 향한 후배들의 시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생각이란 걸해야 돼?”
“하셔야할 겁니다. 입원 인원이 6명으로 늘어나길 원하지 않으신다면요.”
스윽.
태건이 주먹을 들어보였다.
주먹보다 울끈불끈 펌핑된 팔이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꿀꺽. 크흐흠. 얘들아, 그게 말이다…….”
오광휘 단장은 위험을 직감하고 얼른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걸 순순히 들어줄 이들이면 개똘과 엉뚱이란 호출명이 붙지 않았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