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295)화 (295/320)

295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보아하니 굵은 말뚝과 해머가 이제 도착한 모양이었다.

‘안전은 하겠지만…….’

소요시간이 문제였다.

그래서 태건이 관리자에게 물었다.

“깊이가 어느 정도 입니까?”

“저기까지 가보지 않아서 모릅니다.”

“……그럼 얼마나 걸릴지도 모른단 말이네요.”

“그거야 뭐…….”

역시 뜨뜻미지근한 대답이었다.

태건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안전 중요하죠. 알겠습니다.”

휙!

태건은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오히려 오광휘 단장이 바짝 다가와 인상을 구겼다.

“야, 너 뭐하는 짓이야.”

“안전이 중요하시다잖습니까.”

“그건 저쪽 사정이고.”

“그러니까요.”

태건이 수긍하자 오광휘 단장은 답답함을 견디다 못해 손을 뻗으려 했다.

움찔!

“너…….”

그의 손이 움직이려는 찰나 태건이 한 박자 빨리 이어서 말했다.

“우리 사정은 다르죠.”

“그래서 어쩌자고.”

“음. 파란로프.”

부욱, 척.

앞에 멘 가방의 지퍼를 연 태건은 파란 로프가 달린 비너를 꺼냈다.

파란 로프는 산악구조용으로 자주 사용되는 굵직한 로프였다.

그걸 본 순간 의미를 직감한 오광휘 단장이 똑같이 꺼내들었다.

착!

동시에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런 앙큼한 녀석.”

“준비하시고…….”

“준비는 쥐뿔. 바로 액션!”

오광휘 단장이 급발진했다.

태건은 그럴 줄 알았단 듯이 그와 똑같이 몸을 돌려 사람들 쪽으로 내달렸다.

파바박.

둘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치며 각각 비너를 이름 모를 누군가의 엑스반도 고리에 걸었다.

철컥, 철컥.

“그거 풀면 우리 죽습니다.”

“생명줄 좀 부탁합시다.”

얼떨결에 생명줄을 떠맡은 경찰관과 소방관은 당황했다.

“네? 에?”

“이게, 뭐라고요……. 어?”

휘휙.

이미 지나쳐간 태건과 오광휘 단장이 달려가는 방향은 무너진 지반 쪽이었다.

현장의 모두는 예상되는 다음 행동에 난리가 났다.

“그, 그쪽은…….”

“뭐하는 겁니까, 이리 와…….”

“거기로 가면 위험…….”

다급히 목을 쥐어짜 소리쳤다.

아니, 소리치려 했다.

그 경고의 말들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어느새 무너진 지반의 시작점에 도달했다.

파팟.

플래시를 켜자마자 그 아래에 뭐가 있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뛰었다.

“태건아, 뛰어!”

“우와아아!”

촤아아악!

오광휘 단장과 태건은 그대로 가파른 비탈길로 온몸을 날렸다.

반면.

사람들은 태건과 오광휘 단장이 눈앞에서 뛰어내리자 난리가 났다.

“저 사람들, 미쳤어!”

“진짜 뛰었어!”

“안 돼, 당장……. 어어어, 어우씨!”

타다, 끼익!

달려가려 했지만 본능적으로 두 다리가 급제동을 걸었다.

저 앞은 미지의 공간이다.

어떤 위험이 어떻게 도사리고 있는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었다.

다들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는 입장이지만…….

후들후들.

두 다리가 떨려왔다.

무엇보다 저 속에 아이들이 있단 보장이 어디에도 없었다.

“차, 차라리……. 쓰벌, 차라리…….”

“그래. 차라리 있어라. 차라리.”

이젠 라텔의 불도저 같은 투입이 무의미하게 끝나면 자신들이 더 비참해질 거 같았다.

사실 주춤한 이유가 있다.

장시간 온 산을 헤집고 다니느라 지쳤다.

불안정한 미지의 공간까지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체력이 도저히 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팽팽!

경찰관과 소방관의 가슴에 달린 비너가 팽팽해졌다.

그제야 아차한 모두가 소리쳤다.

“모여!”

“붙들어!”

터더덕!

모두가 재빨리 2개의 로프를 나누어 붙들었다.

아무리 지쳤어도 한 사람의 성인 무게는 버틸 수 있었다.

아니, 차고 넘쳤다.

“몇 사람만 붙어 있어. 나머지는 말뚝 박아서 길 만들어!”

“그럽시다. 우리가 언제까지 지쳐 있을 겁니까!”

“아직 더 움직일 수 있잖아요!”

몸보다 지친 마음에 한 줄기 힘을 끌어올렸다.

“끄으응”

텅, 텅!

다시 그들의 작업이 시작됐다.

같은 시각.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깎아지른 비탈길을 떨어지듯 내려가고 있었다.

그 경사가 거의 60도에 육박했다.

비탈길이 아니라 절벽 수준이었다.

한 손은 빠르게 로프를 풀고 있었다.

촥촥촥.

그리고 다른 손은 레펠용 비너를 걸어 최소한으로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아무리 속도를 조절한다고 해도 위험까지 조절할 순 없었다.

지반이 무너진 상황이라 여기저기 암석들이 불규칙하게 널브러진 건 기본이었다.

불쑥, 불쑥!

여기저기 부서지고 깨진 뾰족한 석회암들이 날을 세우고 있었다.

추락하는 힘까지 더해져 찔리면 그대로 몸이 뚫릴지도 모를 섬뜩한 모습들이었다.

“우아아악!”

터덕, 휙휙!

“아윽, 야, 아악, 아윽!”

휘휙. 풀쩍, 처저적!

가속도가 붙은 태건과 오광휘 단장이 살고자하는 필사적인 움직임으로 간신히 피하고 또 피했다.

그렇다고 모든 위험을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치직, 찍!

긁히고, 찢기고.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겨났다.

플래시를 켜고 주변을 확인하는 상태로 떨어져서 이 정도였다.

아무 빛도 없이 막무가내로 뛰었다면 어딘가에 찔려 엄청난 부상을 입을 확률이 100퍼센트였다.

그래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었다.

한참을 떨어지다 보니 어느 정도 평평한 지대가 나왔다.

태건은 거대한 석회암을 발견하고 두 다리를 뻗어 착지했다.

텅!

“크으으으!”

머리까지 찡하고 올라오는 충격이 찌릿했다.

그런데 지금 당장 자신이 무사하단 안도감을 즐길 여유조차 없었다.

휘휙.

태건은 파란 로프를 마저 풀었다.

아니, 풀려고 뽑자마자 크게 당황했다.

더 뽑을 게 없었다.

“끄, 끝이었어?”

비탈길이 조금 더 길었으면 허공을 날아다닐 뻔했다.

산악용이라 200미터 길이를 감안한다면 엄청나게 긴 비탈길이었다.

스윽.

플래시를 비추며 올려다본 태건은 헛숨을 들이켰다.

“헙. 진짜 높네.”

로프의 끝은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저 위에서 비치는 빛조차 설핏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 빛을 슬쩍슬쩍 가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롱대롱.

좌우로 오가는 그 물체를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본 태건이 물었다.

“단장님?”

“야, 이씨……. 이 개똘 자식, 또 로프 뒤집어서 넣어놨어.”

로프가 풀리다가 막판에 꼬인 모양이다.

길이가 맞지 않아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태건은 그런 오광휘 단장을 얼른 내려주며 말했다.

터덕.

“그래도 뾰족한 데 찍히지 않아 다행입니다.”

“그랬으면 오늘 둘 중에 하나는 여기서 못 올라갔을 거야.”

으득!

이를 가는 걸 보니 진심인 모양이다.

그런데 이건 태건도 모른척 할 마음이 충분히 드는 사건이었다.

“흔적 없이 묻으시면 모른 척하겠습니다.”

“약속했다.”

“그 전에 애들이 여기 있어야 할 텐데요.”

“그래. 그게 중요하지. 일단 로프부터 높은데 묶어 두고.”

척, 척.

오광휘 단장과 태건은 재빨리 파란 로프들을 반대편 가장 높은 곳에 팽팽하게 당겨 묶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플래시 하나를 지상 쪽을 향해 일정하게 깜빡였다.

따따따 따딴따

O. K.

모스부호로 내려와도 된단 신호였다.

그러나 안전하단 의미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라텔 단원이 본다면 구조견들을 내려 보낼 터였고, 다른 누군가 본다면 잘 도착했단 의미로 받아드릴 수도 있었다.

몇 번 신호를 더 보내고 난 후였다.

위에서 우렁찬 황대산의 단말마가 쩡하고 들려왔다.

-개!

개…….

개….

메아리쳐 뒤섞여도 한 글자라 명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깡패들 내려옵니다!”

“후우. 잘 잡아야 된다. 오케이. 됐어. 내려와, 내려와!”

처억!

오광휘 단장은 두 손을 앞세워 단단히 자세를 잡고 긴장을 끌어올렸다.

태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비너로 제어를 할 수 있지만 구조견은 그럴 수가 없었다.

로프를 따라 쏜살같이 내려올 거다.

그리고 그 예상이 꼭 맞아떨어졌다.

곧 플래시에 양쪽 로프를 따라 구조견들이 쏜살 같이 내려왔다.

쌔애앵!

가속도가 끝없이 붙어 거의 미사일 같은 속도였다.

견생에 처음 경험하는 속도일 터였다.

-끼이이잉!

-깨애앵.

겁에 질렸는지 앓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왔다.

태건은 손을 뻗고 있지만 막상 잡을 생각을 하니 아찔함부터 가득 몰려왔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궁금증에 물었다.

“……개가 사람보다 튼튼하죠?”

“네가 인간이냐?”

“그냥 물어본 겁니다. 진짜 순수한 호기심이었습니다.”

“돌아가면 세리한테 다 이를 거야.”

사삭.

오광휘 단장은 흘겨보더니 등까지 돌렸다.

그때 태건이 출동가방에서 방화포를 꺼내 오광휘 단장을 불렀다.

“단장님.”

“…….”

“아, 빨리.”

“뭔데……. 어?”

턱.

받아든 오광휘 단장이 방화포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봤다.

그 잠깐 사이 어느새 구조견들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쌔애앵!

태건은 재빨리 소리쳤다.

“빨리요. 펼쳐, 들어!”

“어우씨, 헙!”

촤악!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동시에 펼쳐들었다.

정말 찰나였다.

간발의 차이로 구조견들이 각 방화포 속에 안착했다.

터덩!

“크윽!”

“컥, 허억!”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방화포를 끌어안고 충격을 온몸으로 흡수했다.

그리고, 스륵.

방화포를 흘리자 구조견들이 어리둥절해하다 자신들이 무사한 걸 알고 격한 애정을 표현했다.

-할짝할짝.

-헥헥, 할짝.

그 격한 기쁨의 세례에도 태건과 오광휘 단장은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아, 속이…….”

“으으윽. 삼식이가. 다리에 힘을……. 내 배를…….”

모든 충격을 깡으로 흡수한 대가가 녹록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구조견들은 어떤 부상도 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