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303)화 (303/320)

303화

또각, 또각.

단화소리와 함께 어머니 또래의 중년여인이 들어왔다.

정연미와 아주 비슷한 분위기는 100미터 밖에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인물이었다.

정연미의 어머니 이영란이다.

“어머님, 크윽!”

태건은 벌떡 일어나려다 아픔에 신음성을 흘렸다.

그 모습에 이영란이 화들짝 놀라 다급히 다가왔다.

“태건아, 가만히 있어. 그러지 마. 무리하지 마.”

“쟤는, 누가 보면 연미 엄마가 니 엄만 줄 알겠다.”

뒤에서 시샘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건은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어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두 분이 어떻게. 아니지. 제가 지금 인사를 드려야 되는데…….”

태건이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이영란이 얼른 제지했다.

“아니야. 됐어. 그러지 마……. 자기는 왜 그래. 둘째 다쳤는데, 수련 씨, 이리 와.”

“내 아들 아니야. 영란 씨 아들 해. 흥!”

두 사람의 호칭에 태건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못해 혼미했다.

‘영란 씨? 수련 씨?’

이영란이야 정연미 어머니의 이름이다.

그리고 수련.

그건 어머니, 박수련의 이름이었다.

태건이 알기로 두 분은 이름으로 부르는 사이가 아니었다.

태건이 어머니, 연미 어머니…….  분명히 그렇게 불렀던 걸로 알고 있었다.

“…….”

머릿속이 하얘진 태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번갈아 바라봤다.

그때 또 한 사람이 병실에 들어왔다.

“왜 이렇게 조용해. 오빠 갔어?”

불쑥 들어온 건 강주미였다.

태건이 눈을 끔뻑거리며 바라보자 강주미가 빤히 바라보다 한마디 했다.

“뭐야, 살아있네.”

“뭐냐. 그 아쉬움은?”

“아니야. 난 오빠가 살아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감격스러워. 흑흑. 오빠아. 흑흑.”

“웃으면서 우는 척 하지 마라.”

태건이 흘겨보자 강주미는 대놓고 미소 지었다.

“응. 그럼 웃을게……. 아, 떡 도착했대요. 애들이 1층 내려가서 받아 온다고 내려갔어요.”

“그러니. 그럼 떡부터 돌리고 와야겠다.”

“자기야. 같이 가.”

우르르.

어머니들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바로 퇴장했다.

갑자기 병실이 조용해지자 태건이 강주미에게 물었다.

“야, 어떻게 된 거야?”

“라텔 잘 부탁한다고 떡 맞췄고, 채연이하고 혜연이하고 유리하고 떡 받고 있고, 어머니들이 돌리겠다고 하고 있는 중이야.”

“……그거 묻냐?”

태건이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로 재차 묻었다.

강주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우리 식구들 모두 이제 오빠의 일에 무던해지기로 한 거 알잖아.”

“…….”

“많이 다쳤어도 우리 앞에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기로 한 거지.”

강주미가 엉뚱한 소리를 하자 태건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님 독해능력 후달림? 내 말의 요지를 파악 못함?”

“저기요. 님 지금 움직일 수 있음?”

척, 척.

강주미가 스산한 아우라를 풍기며 다가왔다.

태건은 잘못 건드렸단 사실을 이제야 직감했다.

“읏, 윽!”

어떻게 해도 당장 움직일 수가 없었다.

“큭, 큭큭.”

강주미가 잔뜩 벼른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대로라면 강주미에게 어떤 험한 꼴을 당할지 몰랐다.

그 순간 재빨리 잔머리를 굴려 살 방법을 강구했다.

저 악마의 손길을 벗어나려면 뭐든 상응하는 재물을 바쳐야 하는 법이다. 결국 피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입을 열었다.

“……서랍에 지갑.”

“그래?”

핑!

강주미의 눈빛이 강하게 빛났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태건의 지갑을 그대로 낚아챘다.

“이야, 오호, 이욜!”

“현금만……. 제발 현금만 가져가라.”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

스윽.

강주미는 현금은 건드리지 않고 신용카드만 뽑아냈다.

그걸 본 태건은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안……. 크으!”

“혜연아, 유리야. 뭐 먹을래. 오늘은 내가 쏜다. 아싸뵹!”

“저 악마. 비행이나 가버렷!”

태건이 절망할 때였다.

스윽.

병상에 걸터앉은 강주미가 부드럽게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동생한테 크게 인심 베푸는 오빠니까 궁금한 거 있음 물어봐. 다 말해 줄게.”

“흐으으. 끄흐으으.”

“아, 그거? 이거 보여주는 게 빠르겠다. 기다료봐아.”

강주미는 신난 손길로 휴대폰을 조작했다.

태건은 분노에 찬 눈길로 씩씩거리기 바빴다.

그러다 이내 눈앞에 바짝 다가온 SNS의 짧은 영상을 보고는 멈칫했다.

‘화성 시장이잖아.’

김순자의 포목점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포목점 가판의 김순자 옆에 박수련과 이영란이 함께였다.

-이거 잘 어울리네요.

-이걸로 하시게요.

조금 어색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을 친절하게 응대하고 눈을 맞춰 장사했다.

“어머니, 그리고 어머님?”

태건은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가득했다.

그런 세 명의 어머니들 뒤로 강태영이 커다란 짐을 지고 왔다갔다 했다.

그때 강주미가 화면을 넘기며 말했다.

스윽.

“이게 다가 아니야.”

다른 숏동영상을 본 태건은 입을 떡 벌렸다.

이번엔 당진의 정지희 분식점이었다.

박수련과 이영란이 앞치마를 메고 서빙 중이었다.

-세찬이 엄마, 이거 몇 번 테이블?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태건의 눈동자가 바빠졌다.

출동하기 직전 강태영의 통화 내용을 더하는 중이었다.

“그 화성에서 이틀, 당진에서 이틀이……. 그럼?”

그 내용을 알고 있었는지 강주미가 말했다.

“응. 원래 엄마 혼자 내려가실 계획이셨대.”

“그런데 전날 연미를 우리 집에서 만나셨지.”

“그때 우연히 말씀하게 됐는데, 아침에 연미 언니 어머니가 꼭 같이 가자고 하셨대.”

강주미의 입에서 어떻게 된 일인지 대략적인 사연은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태건은 한 가지가 빠져 퍼즐이 완성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왜?”

“오빠를 우리 품으로 돌려보내준 분들 가족이잖아. 무려 두 번이나.”

“…….”

태건은 반사적으로 강주미를 바라봤다.

가족들에겐 그 일을 직접적으로 전한 적이 없었다.

그걸 알고 있던 강주미기에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다 같이 술 마시다 단장 오빠한테 우연히 들었어.”

“…….”

“아니, 오빠가 위험을 자초해서 엄마가 속상해한다고 말하면서 얘기가 나왔어.”

강주미는 좀 더 솔직하게 말했다.

그제야 태건은 갑작스런 어머니의 등장과 화성과 당진 방문에 대해서도 이해가 됐다.

“그랬……. 구나.”

“오빠 성격으로는 말하기 어려웠을 거야. 그건 우리가 알아.”

“흐음.”

태건은 묵직한 탄성으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강주미는 그런 태건을 너무 잘 알기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엄마가 돈을 주는 거만큼 경우 없는 행동은 없다고, 직접 뵙고 싶다고 움직이신 거야.”

“그래.”

“다녀오니까 너무 좋으셨대. 그래서 가끔 가기로 했고, 또 초대도 하기로 하셨대.”

그 소리에 태건이 힐끗 쳐다봤다.

“그래?”

“응. 엄마 말대로 하면, ‘니들만 끈끈하냐? 우리도 끈끈해.’ 라는 거지.”

“어머니도 참.”

태건은 한 번 마음 굳히면 실행에 옮기는 어머니의 추진력에 감탄했다.

거기에 강주미가 한 마디 덧붙였다.

“곧 다시 모여서 증평에 내려가실 건 가봐. 양평에서는 영상보고 먼저 연락이 왔대.”

“그러냐.”

“오빤 그냥 모른 척하고 있어. 아는 척 해봐야 엄마한테 잔소리만 들어.”

팡팡.

강주미가 태건의 어깨를 소리 나게 두드렸다.

그 손길은 투박하기보다 따스함이 깊게 담겨 있었다.

태건은 쓰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알아서 하시겠지. 그보다 온 김에 간호사실에 커피나 좀 돌려.”

“그 정도야 내가 얼마든지 해줄게.”

“그래. 기왕이면 내 것도 좀 부탁할게.”

태건은 자연스럽게 뒷말을 덧붙였다.

희희낙락하게 병상에서 일어난 강주미가 순간 멈칫했다.

“잠깐만……. 갑자기 왜 오빠가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시키는 느낌이 드는 거지?”

“그럼 내 것만 사오라고 했겠지.”

“그렇지? 다들 고생하시니까 커피 한 잔 쏘는 거지?”

강주미가 묻자 태건은 수더분하게 답했다.

“물론.”

“역시 오빠는 좀 착한 구석이 있어. 얼른 다녀올게.”

폴짝폴짝.

강주미는 신난 발걸음으로 병실을 나갔다.

그 순간 태건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물들었다.

“후후. 순진한 것.”

잠시 후.

강주미는 태건의 말대로 커피를 사왔다.

그런데 태건은 움직일 수가 없어 강주미에게 부탁했다.

“주미야, 커피 좀.”

“응. 여기.”

쭈욱.

“음. 됐어. 그래서 1층에 뭐가 있다고?”

태건이 묻자 강주미는 아무런 의심 없이 대답했다.

“도너츠 가게 있던데?”

“거기 한입에 쏙 들어오는 도너츠 맛있지 않아?”

“그거 맛있지.”

“먹을래?”

태건이 슬쩍 던지자 강주미는 덥석 물었다.

“응. 내가 얼른 사올게.”

“역시 주미는 최고의 서비스 정신을 가진 승무원이야. 그 전에 커피 한 모금만 더.”

“서비스 정신 하면 강주미지. 여기.”

쭈욱.

“음음. 됐어.”

“내가 쑝하고 또 다녀올게.”

폴짝폴짝.

강주미는 신난 발걸음으로 다시 병실을 나갔다.

어느새 병문안 차 잠시 자리해 있던 김혜연과 황유리가 갸웃거렸다.

“주미가 회사에선 또순인데 오빠 앞에선 왜 애가 되는 거지?”

“쟤 진짜 모르는 거야. 아님 모르는 척 하는 거야?”

한쪽에서 과일을 깎던 박수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애들은 왜 다들 저렇게 어디 한 군데씩 맹한지 모르겠어.”

“우리 연미도 저래. 저래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지.”

이영란이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  *  *

그날 오후.

1인실은 장단점이 너무 명확했다.

우선 심심했다.

…….

태건이 말하지 않으면 고요함만 가득했다.

TV를 틀어 놓았지만 채널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어 광고만 이것저것 흘러나왔다.

그 단점이 반대로 장점이기도 했다.

다른 단원들과 쓸데없이 티격태격하지 않아서 좋았다.

원래 차분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태건이라 이런 분위기가 싫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떠들고 싶긴 한데…….’

사람 마음이란 게 이럴 때마다 참 간사하게 느껴졌다.

그 간사함을 다독여주는 건 간호사들이었다.

아침에 떡 돌리고, 커피에 도너츠까지 선물한 게 컸다.

안 그래도 친절한 간호사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며 외로움을 덜어줬다.

“부단장님, 주사 맞을 시간이에요. 필요한 건 없으세요?”

“체온하고 혈압체크 좀 할게요. TV 채널 바꿔 드릴까요?”

“수액 갈 시간이에요. 뭐 불편한 건 없으세요?”

뭐 하나라도 더 신경 쓰고 챙겨주려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어요. 다들 잘 쉬고 계시고, 이거 호출벨 이니까 언제든 누르세요.”

정말 지나가다가 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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