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그런 시간은 잠깐이었다.
그 후엔 다시 적막만 감돌았다.
문제는 현재 태건은 졸리지도 않았다.
어제 막 재가동 된 라텔이었기에 체력이 빵빵하게 차올라 있었다.
그런데 병상에 누워 있으니 오히려 좀이 쑤시기만 했다.
“뭐하며 시간을 보내야 하나.”
밤이 찾아오는 게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드륵.
“부단장, 자나.”
문이 열리며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규영 본부장이다.
그 소리에 태건은 얼른 목소리를 냈다.
“본부장님, 어서, 얼른, 퍼뜩 오십시오!”
“원 사람, 참. 이렇게 반겨줄 줄은 몰랐는데.”
“저야 언제나 본부장님을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태건이 대답하는 사이 박규영 본부장이 나타났다.
그런 그의 안색이 까무잡잡했다.
손에 든 과일바구니부터 한쪽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터억.
“이거 상하기 전에 먹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
“이틀만 지나면 붕대는 반 정도 풀 겁니다. 그땐 간단히 왔다갔다 할 수 있을 거고요.”
“다시 가져가진 못하겠군.”
박규영 본부장이 아쉽단 표정을 흘렸다.
그런 그의 안색은 역시나 좋지 않았다.
태건은 넉살을 접고 나름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연이은 단원들 부상으로 여기저기서 말이 많습니까?”
“온몸에 붕대 감고 그렇게 진지하게 물으면 웃긴 건 아나?”
“말이 없진 않은가 보네요.”
태건은 자신의 짐작에 확신을 뒀다.
그릉.
박규영 본부장은 자리에 앉으며 쓰게 말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나. 그 말이 차장님 귀에 들어갔다가는 옷을 벗어야할지도 모르는데.”
“네?”
“차장님이 당장 오시겠다는 걸 내가 막아서고 있는 상황이야.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박규영 본부장은 딱 잘라 버렸다.
그런데 태건은 그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간파했다.
“차장님의 격려방문을 본부장님이 막고 계신다고 하셨습니까?”
“……정리할 게 있으니까.”
“본부장님.”
태건은 묵직하게 불렀다.
지잉.
눈빛은 이미 착 가라앉아 있었다.
소방 일에 있어 어설픈 변명과 핑계는 태건에게 통하지 않았다.
박규영 본부장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쓰읍.”
쓰게 숨을 들이키더니 이내 리모컨을 집었다.
띡띡.
몇 번 채널을 옮기자 뉴스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라텔 폭행 사건, 권력 남용의 현주소.
그걸 본 태건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라텔……. 폭행 사건?”
“박이명이라고 알지.”
“누구요?”
“풍암광업소 관리자 말이야.”
박규영 본부장이 말하자 그제야 태건은 얼굴을 떠올렸다.
“아, 관리자요. 그때 급해서 이름을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왜요?”
“모두 철수하는 틈을 타 라텔 단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고 해.”
“네? 대체 누가요”
태건이 어이가 없단 얼굴로 바라보자 박규영 본부장이 답했다.
“그 자리에 고수현, 이지성을 포함해 2차로 출동한 단원들이 있었던 모양이야.”
“흐음. 가능성이 없진 않네요.”
“그게 문제야.”
둘 다 당연하게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러다 태건이 아차하고는 정신을 차리며 다시 물었다.
“선배들이 진짜 손을 대진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 쓰읍. 믿고 싶……. 크흠. 싶습니까?”
“뭐라는 거야?”
“아무튼 그런 선배들은 아니란 겁니다.”
태건은 억지로 말과 표정을 맞춰 답했다.
박규영 본부장도 같은 심정인 모양이었다.
“나도 진술은 받았어. 통화하는 걸 보고 다가갔는데, 스스로 놀라 자빠져 나뒹굴었다고 말이야.”
“그게 전부랍니까?”
“끝이래. 그리고 그냥 철수했다고 해.”
박규영 본부장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걸 본 태건은 눈치로 어떤 상황인지 때려 맞췄다.
“그걸 증명할 무언가가 없단 거네요.”
“그래.”
“저쪽도 그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직접 때린 걸 본 사람은 없지. 그런데 단원들이 거기서 우르르 나온 걸 본 사람이 너무 많아.”
박규영 본부장은 씁쓸함이 깊어지는 모양이었다.
태건은 눈을 끔뻑이다 어이없어 했다.
“그거네. 가만히 있으면 현장 통제 미숙으로 배상해야 될 거 같으니까 라텔에 덮어씌우기.”
“그것도 애매해. 이미 경찰과 소방관들이 모두 진입한 상황이었어.”
“그러니까 풍광은 선의의 피해자다, 라는 거잖습니까.”
박규영 본부장은 무겁게 고갯짓했다.
“그래야 어떤 피해보상금도 줄 필요가 없으니까.”
“…….”
태건은 잠시 침묵했다.
‘그때 남아 있던 단원이 그러니까…….’
데구루루.
폐광을 빠져나왔을 때는 솔직히 태건도 기억이 모호했다.
그 몽롱한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그러다 누군가가 퍼뜩 떠올랐다.
이내 회심의 미소를 지은 태건이 박규영 본부장에게 강력히 제안했다.
“본부장님, 앞으로 모든 현장에 바디캠을 필수 출동용품으로 건의합니다.”
“……노주민 단원?”
“네. 바디캠은 망가졌어도 메모리카드는 살아있을 겁니다.”
태건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박규영 본부장의 가라앉은 눈빛도 맹렬하게 빛났다.
번뜩!
“맞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고 했어.”
“딱 그겁니다.”
“내 바로 가서 확인해 보도록 하지.”
타다닥!
마음이 급했는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반대로 태건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정신없어서 그냥 넘어가면, 조용히 좀 살지.”
왜 들쑤셔 일을 크게 만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몇 시간 후.
뉴스 내용이 180도 달라졌다.
-라텔 폭력 사건의 진실. 누굴 위한 희생이었나.
노주민의 바디캠에 기록된 영상이 일부만 모자이크 되어 그대로 방영됐다.
심지어 토혈하는 부분까지도 전국에 내보내졌다.
그 뉴스 후에는 각 분야 전문가들을 초청해 토론까지 펼쳤다.
-이건 국민이란 이름을 앞세운 신종 갑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급차 주취자 난동 사망 사건, 그 외에도 폭언, 폭행 등 매년 늘어가고…….
-법을 제정해 강도 높은 제약이 필요한 시점이라…….
태건은 TV를 뚫어져라 시청하고 있었다.
드륵.
병실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들어오다 멈칫했다.
“저거 보고 계셨어요. 저런 일이 자주 있으신가요?”
“솔직히 없진 않습니다. 그런데…….”
태건이 뭔가 말하려 했다.
그 짧은 틈에 간호사는 재빨리 할 일을 마치고 자기 말을 덧붙였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체온은 정상이에요.”
“그렇군요. 그보다…….”
“그래도 라텔 아니, 소방관들을 응원하는 분들이 더 많은 거 아시죠? 파이팅!”
꾸욱.
간호사는 주먹을 쥐어 응원을 보낸 후 병실을 나갔다.
그때 태건이 그쪽을 힐끗 눈짓하며 중얼거렸다.
“TV나 좀 꺼주고 가시지. 끄응.”
버둥버둥.
태건은 아무리 용을 써도 리모컨에 닿지 않았다.
부탁하고 싶은 게 그거였는데 들어주지도 않고 훌쩍 떠나가버린 간호사가 원망스러웠다.
* * *
이틀 후.
드디어 태건의 몸을 칭칭 감은 붕대가 반으로 줄었다.
후루룩!
“자유다!”
태건이 외치자 담당 전문의가 바로 태클을 걸었다.
“아직 아닙니다. 자, 보호대 착용하셔야죠.”
척척.
의사와 간호사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이내 태건의 몸에 온갖 보호대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늑골보호대를 시작으로 그 종류만 몇 가지나 됐다.
태건은 자신을 둘러보며 한 마디 했다.
“고대 미라에서 현대판 미라로 업그레이드 됐네요.”
“현대판 미라는 옷도 입을 수 있고 움직이기도 편하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리고 목발은 짚고 다니지 않게 특별히 신경 썼습니다.”
담당 전문의의 말에 태건은 감격한 얼굴로 손을 붙들었다.
“선생님, 명의십니다.”
“어디 인터뷰 할 때 소문 좀 내주십시오.”
“후기 남길게요. 별 다섯 개 찜, 약속.”
“콜.”
끄덕끄덕.
모종의 약속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표정으로 대화가 잘 마무리됐다.
병실로 돌아온 태건은 휴대폰부터 들었다.
일전에 서정민 사건으로 연이 닿게 된 로펌으로 바로 전화했다.
“오랜만입니다.”
“부단장님께서……. 혹시 풍암광업소입니까?”
“역시 척하면 척이시네요.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피잉!
태건이 눈에 살기를 띠며 부탁했다.
건드린 갚은 이자까지 얹어 돌려줘야 맛이다.
상대도 그런 태건의 성격을 조금은 알고 있는지 바로 답이 들려왔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바로 착수하겠습니다.”
“탈탈 부탁드립니다.”
“먼지 한 톨까지 싹 긁어 보겠습니다. 그럼.”
화끈한 목소리로 전화를 마쳤다.
태건은 아직 환자였다.
그러나 병원 안에서는 자유였다.
뿐만 아니라 낮시간 동안 잠깐 외출할 수 있는 권한도 받아냈다. 물론 그날 컨디션에 따라 외출 시간이 달라지긴 했다.
담당 전문의와 무려 30분 동안 입씨름 끝에 얻어낸 천금 같은 권한이었다.
그래서 얻은 별명도 있었다.
일명 불량환자.
현대판 미라가 되자마자 태건은 우선 병실 밖으로 나왔다.
드륵.
문을 열자마자 간호사실이 떡하니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간호사들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저기, 불량환자 분. 바로 어딜 가시는 건가요.”
“부단장으로서 막중한 책임과 사명을 띠고 단장님 병문안 갑니다.”
“……옆 병실이에요. 그리고 휠체어 좀 타세요!”
“아, 통행에 불편을 드릴까 봐서요. 이따가 탈게요. 그럼.”
태건은 꾸중에도 넉살로 무마시키며 얼른 오광휘 단장의 병실로 향했다.
간호사들은 그런 태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괜히 종이를 구겼다.
꾸지직.
“국민을 위해 성심껏 구조를 한다며!”
“나도 국민이야. 나도 세금 낸다니까!”
“어후. 말 지지리도 안 들어. 어쩜 저래!”
“첫날 먹은 떡이 지금 얹힌 거 같아.”
태건의 너스레에 간호사들 스트레스 지수만 팍팍 높아져갔다.
같은 시각.
태건은 오광휘 단장의 병실 문을 열었다.
드륵.
안에서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 어머, 태건 씨.”
번쩍!
한유정이 과일을 깎던 중이었는지 과도를 내밀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태건은 화들짝 놀라 얼른 두 손을 들었다.
“항복!”
“네? 아, 미안해요. 너무 반가워서.”
“앞으로는 전화 드리고 들어오겠습니다. 아니, 들어가도 되죠?”
태건이 계속 손을 든 채 물어보자 한유정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호. 무슨 말씀이에요. 얼른 들어오세요.”
번뜩.
그 손에도 과도가 여전히 들려 있었다.
그걸 봤는지 오광휘 단장의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정아……. 칼 좀…….”
“어머나. 아예 내려놔야겠네. 오호호.”
사락.
한유정은 그제야 과도를 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