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태건은 살금살금 다가가 병상에 누운 오광휘 단장에게 말했다.
“참 달콤 살벌하신 분이네요.”
“흐흐. 사랑은 원래 그런 거잖아……. 넌 이제 좀 살만 하냐?”
“오늘부터 살만해졌습니다. 단장님은 어떠십니까?”
태건이 묻자 오광휘 단장이 쓰게 숨을 흘렸다.
“후후. 나도 살만해 졌지……. 구급차에 딱 타는 거까지만 기억나더라.”
“그리고 눈 뜨니까 어제였죠?”
“그래. 유정이가 괜히……. 고생했지. 연미 씨는 왔었냐? 안 왔지? 메롱.”
이 와중에도 혀를 내밀어 놀렸다.
태건은 어이없이 바라보며 한소리했다.
“어제 밤에 왔다가 오늘 아침에 갔습니다. 그리고……. 떡 드셨네요.”
“저거? 그러게. 떡……. 잘 먹었다, 어머님 고생시키고 이 불효 막심한 녀석.”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그보다 이렇게 된 거 좀 쉬세요.”
스윽.
태건이 가볍게 손을 감싸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때 오광휘 단장이 한유정에게 눈짓했다.
“자기야.”
“어. 나 잠깐 전화 좀…….”
스윽.
한유정은 눈치껏 알아서 자리를 피해줬다.
갑자기 둘이 되자 태건이 의아하게 물었다.
“형수님은 갑자기 왜요?”
“마, 하나 묻자. 우리……. 다음에도 살아나올 수 있을까?”
“…….”
태건이 가만히 있자 오광휘 단장이 힐끗 쳐다봤다.
“그렇지……. 장담 못하겠지.”
“단장님.”
“짜샤. 이상한 생각하지 마……. 내가 다시 현장에 뛰어드는 게 무서운 줄 알아?”
그 말에 태건이 멈칫했다.
“아닙니까?”
“또, 또……. 불법 유턴하고 있네. 나 말고 유정이.”
“…….”
태건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오광휘 단장은 복잡한 눈빛으로 말했다.
“한 번 끝을 봐서 그런가……. 쉽지 않네. 난 할 거 다 해봤는데, 유정이는……. 아니니까.”
“그렇군요.”
“전 사람은 모진 성격이었는데, 유정이는 그렇지도 않고……. 이 형이 고민이 좀 많다.”
“…….”
태건은 그 부분에 있어 할 말이 없었다.
그걸 눈치 챘는지 오광휘 단장이 흘겨보며 한소리했다.
“어이, 강태건이. 내 사정 말한 거야……. 연미 씨가 행복하다면 그게 네 행복이야. 아니야?”
“형수님은 경우가 왜 다른 겁니까?”
“그야……. 그, 그……. 같은 거냐?”
“각자 고민해 보도록 하죠. 그보다 좋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태건은 결정을 뒤로 미뤘다.
지금 어떤 결정을 매듭짓기엔 무엇도 명확하지 않았다.
잠시 후.
태건은 오광휘 단장의 병실을 나섰다.
그 길로 황대산 병실로 향했다.
그런데 간호사들이 복도에 서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의아한 태건이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침 잘 오셨어요. 부단장님, 큰일 났어요.”
“무슨…….”
태건이 어리둥절해하자 간호사가 빠르게 알려줬다.
“황대산 단원 병실에 김지수 단원이 들어가더니 막 큰소리가 나요.”
“네에?”
턱, 턱.
태건은 금이 간 다리를 빠르게 걷지 못해 절뚝거리며 움직였다.
곧 반쯤 열린 황대산의 병실에 도착했다.
안에서는 김지수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왜 그랬어요. 왜요!
-야, 으윽, 지금 무슨 소리를. 으윽. 하는 건데!
-선배가 내 입에 뽀뽀 했잖아요. 허락도 없이, 막!
그 소리에 간호사들이 난리가 났다.
“어머머, 막 뽀뽀했대, 막!”
“대산 씨가 평소에 관심 있었나봐. 그러니까 막, 막, 그랬겠지.”
원래 남의 연애사가 듣기에 흥미를 일으키기 좋은 법이다.
그러나 태건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얼른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그때 황대산의 울컥한 짜증 소리가 들려왔다.
-야, 그게 으으윽. 수현이한테 듣긴 했다만, 그게 의식이 있는, 끄윽, 상태였냐? 어!
-현장에서 기절한 건 핑계잖아요. 전부터 나한테 관심 있었잖아요!
-대체 누가, 아윽. 너 지금, 내 상태, 으윽. 보고 이러는 거냐. 아파 죽겠는데, 지금, 어윽!
이쯤 되자 간호사들이 묘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러니까 현장에서 기절한 상태였단 거잖아.”
“그럼 의식이 없는 상태였으니까 고의가 아니었단 거네.”
“이건 아니지. 그건 그냥 사고지.”
태건은 그런 반응에 들어가려던 손길을 멈췄다.
‘이분들, 명판사들인데?’
제삼자라서 그런지 냉정하고 정확하게 분석까지 했다.
그런데 김지수는 계속 따지고 들었다.
-그럼 그건 뭐예요. 깻잎은 왜 떼어줬어요?
-뭐? 커윽. 깻잎?
-내 친구랑 같이 밥 먹을 때, 내 깻잎만 잡아줬잖아요!
-그, 그건, 하! 아윽!
태건은 들려오는 말에 순간 황당했다.
‘깻잎이 뭐.’
그런데 간호사들의 반응은 순간 완전히 뒤집어졌다.
“어머머, 깻잎을 떼줬는데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황 단원 그렇게 안 봤는데, 먼저 꼬리를 쳤네!”
그 열화와 같은 반응에 태건은 눈이 띠용하고 떠졌다.
‘여러분, 깻잎장아찌 두 장 먹으면 겁나 짜요.’
김지수는 한 가지를 더 따지고 들었다.
-그리고 버스 정류장에서 패딩 지퍼 채워줬잖아요, 그것도 목 끝까지!
-그날, 크윽, 그날 영, 영하 15도……. 아윽, 내가 이걸 왜, 설명. 으윽!
-그럼 친구 데이트 코스 짜야 된다고, 일주일 동안 나 끌고 다니면서 막 이것저것 같이 한 건 뭐예요!
-친한, 크윽, 진짜 친한 친구……. 10년 만에 데이트라고 설명, 크윽. 야, 좀!
황대산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호사들은 이미 눈에 불을 켜고 판결까지 내렸다.
“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채워? 끝났네!”
“친구 데이트 코스를 일주일 동안 누가 준비해. 핑계 죽이네!”
“뭐야. 이미 다 수 써 놓고 아닌 척 한 거야? 어머, 황 단원 좀 그렇다.”
“어머어머, 현장에서 기절한 척하고 뽀뽀한 거 맞네. 진짜 별로다.”
휘리릭.
간호사들은 내부적으로 모든 결론을 내고 흩어져 버렸다.
혼자가 된 태건은 아직 이해를 하지 못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그때 김지수가 황대산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예요. 책임질 거예요. 말 거예요!
-대체 내가 뭘, 윽, 책임, 윽, 커윽!
-아, 이제껏 날 가지고 놀고, 이제 질렸다. 그러니까 꺼져라. 그런 건가요?
-김지수, 야, 정신 차려. 으윽, 야, 나 지금 환자, 으윽. 야, 야……. 거기, 아무도 없어요!
황대산의 구조요청이 애타게 들려왔다.
태건이 다급히 병실 문을 붙들었다.
그리고 열어젖히려 했다.
턱.
‘선배, 지금 제가 구…….’
정말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황대산의 목소리가 한 박자 빨랐다.
-지수야, 잠깐! 내가 책임질게! 으윽.
-네?
-내가 널 가지고 놀다니, 무슨 그런. 으윽.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대산……. 오빠. 흑흑. 오빠,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오빠, 의심해서 미안해요. 흑흑.
태건은 안에 들려오는 김지수의 울음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
“…….”
스르륵.
이내 붙든 병실문을 허탈하게 놓았다.
‘선배가 선택한 길입니다.’
그 뇌까림을 끝으로 태건은 매정하게 돌아섰다.
진심으로 태건은 황대산을 도우려 나서려고 했다.
그 기회를 뿌리친 건 황대산 본인이다.
그건 하늘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진실이었다.
터덕, 터덕.
복도를 따라 멀어져가던 태건이 아차했다.
“아, 소리를 먼저 낼 걸 그랬나……. 뭐, 이젠 다 지난 일이니까.”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매우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태건은 잠시 병원 밖으로 나왔다.
세상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사실 병원 앞이 기자들로 북적거렸단 소식은 들었다.
그런데 박규영 본부장이 병원에 피해를 주면 안 된다며 양해를 구했단 일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며칠 후에 기자회견을 해야 할 입장이지만.’
덕분에 이렇게 자유롭게 나올 수 있어 좋긴 했다.
그런 태건은 콧바람 쐬러 나온 건 아니었다.
태건이 향한 장소는 바로 옆에 있는 동물병원이었다.
이순이와 삼식이가 치료받는 병원이었다.
끼익.
동물병원에 들어간 태건은 접수실에 다가갔다.
좀 창피하긴 했지만 이제 태건의 얼굴은 또 다른 신분증이었다.
역시나 접수실 간호사가 바로 알아봤다.
“부단장님. 이순이하고 삼식이 보러 오셨어요?”
“네. 면회 가능합니까?”
“그럼요. 잠시만요. 바로 안내해드릴게요.”
휘리릭.
뭔가 신속하게 일이 진행됐다.
잠시 후.
태건은 동물병원 내에 작은 방에 자리해 있었다.
그런 태건의 앞엔 여기저기 붕대를 감싼 이순이와 삼식이가 누워 있었다.
구조견들이라고 그 지반붕괴 속에서 멀쩡할 수가 없었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다.
잠깐 상담한 수의사 말로는 경미한 교통사고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핸들러이자 보호자인 태건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순아, 삼식아.”
슥슥.
태건이 가볍게 쓸어주며 불렀다.
-헥헥.
-끼잉, 끼이잉.
태건이 찾아왔단 기쁨에 이순이와 삼식이는 기뻐하고 애교를 부렸다.
앓는 소리엔 마치 왜 이제 왔냔 투정도 담겨 있었다.
“…….”
슥슥.
태건은 그런 구조견들을 쓸고 또 쓸었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두 눈이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이내 태건은 구조견들을 각각 품에 깊이 끌어안았다.
“흐으읍.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다치게 해서 정말 미안해.”
* * *
태건은 그날부터 매일 구조견들을 돌아봤다.
“얼른 나아야지.”
슥슥.
쓰다듬고, 또 격려하고 위로하고.
태건은 지금만큼은 구조견이 아닌 애완견으로 애정을 쏟았다.
그걸 이순이와 삼식이도 느끼는 모양이다.
-멍, 멍.
-헥헥.
구조견들의 짖음이 점차 온순해지고 귀여워졌다.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아 눈도 동글동글하게 변했다.
수의사도 흐뭇한 얼굴로 한 마디 했다.
“확실히 강아지들은 보호자가 예뻐해 주는 만큼 회복이 빠릅니다.”
“하하.”
태건도 환하게 웃었다.
너무도 듣기 좋은 소리였다.
태건은 그렇게 짧은 외출시간을 모두 이순이와 삼식이의 병문안에 할애했다.
그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사실 담당 전문의와 설전 끝에 얻어낸 외출시간도 이를 위해서였다.
물론 병원에 돌아왔을 때 철저하게 소독해야 했다.
각종 보호대를 벗고 또 교체하는 일이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그러나 태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흐흡, 헙. 이 정도야. 끄으응.”
태건은 그런 불편함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하며 구조견들의 회복을 응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