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삼일 후.
병상에 누워 있던 태건은 벽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직도 오전이네.”
빨리 외출이 허락된 오후시간이 다가오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던 중 병실 문이 열렸다.
드륵.
인기척 없이 들린 문소리에 태건이 갸웃거렸다.
“누구세요?”
“…….”
저벅저벅.
말없이 발소리만 들려왔다.
“음?”
의아한 태건이 몸을 일으키려는 그때 들어오는 이들이 보였다.
유중헌과 고수현, 이지성이었다.
“난, 난……. 모르겠어.”
“하, 참. 이게 참 말이 되는, 허허. 참.”
유중헌과 고수현이 기가 막혀 어쩔 줄 몰라 했다.
거기에 이지성은 한술 더 떴다.
대뜸 태건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야, 여기 식염수 있냐?”
“포도당은 맞고 있습니다만.”
스윽.
태건은 자신의 팔과 연결된 홀쭉해진 포도당 팩을 가리켰다.
동시에 이지성이 성큼성큼 다가와 남은 양부터 확인했다.
“거의 다 맞았네. 이 정도는 덜 들어가도 문제없어.”
“그거야 그렇지만…….”
“이것 좀 쓰자.”
이지성은 대뜸 손을 뻗으려 했다.
그 순간 유중헌과 고수현이 날렵하게 다가와 이지성을 붙들었다.
터덕!
“그그그, 그건 아닌 거 같아.”
“야, 그래도 애가 아파서 맞는 건데. 그걸 뽑냐?”
이지성은 그런 선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몸부림쳤다.
“놔요. 당장 눈부터 씻어야겠으니까 놓으라고요!”
“우리도 같은 심정이야. 차라리 간호사실에 가서 식염수를 달라는 게 낫지 않냐?”
“그럼 그럽시다!”
“그래. 그러자!”
휘휙.
갑자기 고수현과 이지성이 의기투합해 병실 밖으로 나갔다.
“……나, 나도 잠깐만.”
눈치 보던 유중헌도 뒤따라 몸을 움직였다.
태건은 그런 선배들의 돌발행동에 전혀 미동도 없었다.
“왜 또 저래?”
곧 다시 들어올 걸 알기에 느긋하게 기다렸다.
잠시 후.
태건의 예상대로 선배들이 다시 나란히 병실에 들어왔다.
다들 눈동자가 한층 선명해졌고, 눈 주변도 축축해진 변화가 보였다.
그걸로 태건은 바로 유추했다.
“대체 뭘 봤는데 진짜 눈을 씻고 오신 겁니까?”
“대산 선배랑 지수.”
“아, 한 쌍의 라쿠카라차요.”
태건은 바로 모든 게 이해된단 표정으로 대답했다.
반면 선배들은 너나 할 거 없이 갑자기 눈을 질끈 감거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아아, 아니야, 내가 잘못 본 거야.”
“나가, 내 머릿속에서 당장 나가!”
온갖 부정적인 말투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수고가 무색하게 태건이 나지막이 말했다.
“둘이 사귀는 사이가 된 거죠.”
그 말에 유중헌이 다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꽈악.
“아니야, 으아아!”
심지어 현실 부정을 넘어 태건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태건이가 유언비어를 퍼트려서 우리를 현혹시키려는 거야!”
“내가 싸가지가 없어도 너처럼 막말은 하지 않아!”
고수현과 이지성이 버럭버럭 소리쳤다.
태건은 그들의 격한 반응을 십분 이해한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현실입니다.”
“으아아아!”
선배들은 귀를 파고든 현실에 다시금 절규했다.
그때였다.
벌컥.
“저기요. 좀 조용히 해주시겠어요. 특히 강태건 부단장님!”
텅!
간호사의 싸늘한 경고와 함께 거친 문소리가 이어졌다.
신기하게도 가장 조용했던 태건만 지적했다.
순간 절규 소리가 뚝 끊기며 모두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고수현이 조용한 목소리로 태건에게 물었다.
“넌 또 뭔 잘못을 했냐?”
“……불량환자 리스트에 이름 올렸습니다.”
“역시 넌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끄덕끄덕.
고수현의 말에 유중헌과 이지성이 고갯짓으로 동의해 보였다.
이상하게 화살이 튄 태건은 어이가 없었다.
“저기 떠드신 건 선배님들…….”
따지고 들려고 했지만 얌전히 항의를 받아줄 선배들이 아니었다.
어느새 목소리를 낮춰 현 사태에 대한 대화로 돌아왔다.
고수현은 대뜸 기막혀했다.
“하, 이게 있을 수가 있는 일이야?”
“뭐? 대산 오빠? 우리 지수? ……아씨, 눈이 아니라 귀를 씻어야 했네!”
오죽하면 유중헌이 울컥했다.
이지성도 빠지지 않았다.
“식구들끼리 이러는 건 범죄입니다.”
그 반응을 지켜보던 태건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선배, 지금 너무 보기 좋던데요.”
“……뭐가 보기 좋아. 라텔 내 불화거리를 애초에 없애버리잔 거잖아!”
이지성이 버럭 화를 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물론 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그만큼 라텔에 신경을 쓰신단 거죠.”
“됐어. 몰라. 내 알 바냐?”
이지성은 얼른 냉소적인 자신을 내비쳤다.
그러나 이젠 그런 모습에서도 전과 같은 면도칼 같던 날카로움이 많이 무뎌져 있었다.
미소를 머금던 태건은 유중헌과 고수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대산 선배하고 지수가 잘 지내서 나쁠 거 있습니까?”
“그건, 아니, 그래도, 아니 그렇기는 한데…….”
태건은 그래도 혼란스러워하고 적응 못하는 선배들에게 일침을 날렸다.
“그러지들 말고 선배들도 얼른 좋은 분들 만나시기 바랍니다.”
“야, 너. 지금 우리가 그러니까 질투를 한다는 거냐!”
“……훗.”
태건은 가볍게 웃어줬다.
그런데 그 웃음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두드득.
선배들이 대뜸 손가락 관절을 풀며 태건을 노려봤다.
“이 자식이 환자라고 봐줬더니 아주 하늘 끝까지 기어오르네.”
“너, 넌 그, 그러면 안……. 안 됐어.”
“끝장 보자면, 그래. 끝장 보자.”
순간 스산해진 분위기에 태건이 아차했다.
‘환자란 걸 자꾸 까먹으면 어쩌잔 거냐.’
그러나 위기가 가까워질수록 태건의 잔머리도 비상하게 굴러갔다.
때구루루, 띵!
좋은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손을 틀어막았다.
“스톱!”
“노노. 소방차는 빨간불에도 멈추지 않아, 보이.”
이미 눈이 돌아간 선배들에겐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위협의 손길이 코앞까지 다가온 그때였다.
태건은 앞뒤 자르고 그냥 내질렀다.
“간호사분들과 소개팅.”
“…….”
우뚝!
목 앞까지 다가온 선배들의 손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태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가지 조건을 더 걸었다.
“단체 미팅 아님, 1 대 1 맞춤으로, 콜?”
“…….”
푸슈슈.
불 같이 일어난 분노가 물을 끼얹은 듯이 쑥 가라앉았다.
슬쩍 뒤로 물러난 선배들이 한 마디씩 했다.
“……출동이 아니면, 소, 소방차도 빨간불에선 머, 멈춰야지.”
“그럼요. 교통법규는 지키라고 있는 겁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그들의 반응에 태건이 더 황당했다.
‘다른 선배들은 몰라도 지성 선배까지?’
진짜 황대산과 김지수의 관계 변화가 부러웠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던 태건이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채연이랑 유리랑은 뭐 별 일 없었습니까?”
강주미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해 슬쩍 물어봤다.
그러자 선배들이 동시에 어깨를 들썩였다.
“그그, 그냥 오빠, 도도, 동생이지 뭐.”
“비행이다 뭐다 해서 볼 기회가 자주 있는 건 아니니까.”
“가끔 우르르 만나서 놀고 그래. 너도 두어 번 같이 놀았잖아.”
이지성이 반대로 묻자 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긴 했죠. 그런데 저는 주미도 있고 하니까 계속 어울리기가 좀 그렇더라고요.”
“아무래도 신경 쓰이긴 하지.”
“이런 사이도 나쁘지 않아. 쿨하고 좋잖아.”
선배들이 수더분하게 대답했다.
“뭐 그러시다면야.”
태건도 그런가 보다 했다.
선배들이 그렇게 사라졌다.
때가 되자 병실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간호사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륵.
“불량환자분, 오늘은 외출 안 하시나요?”
이어서 간호사가 들어왔다.
매일 여러 번 보는 사이라 이름도 알고 있었다.
김민지 간호사.
서글서글한 인상과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었다.
딱 보는 순간 선배들과 약속이 떠올랐다.
태건은 우선 질문에 대답부터 했다.
“오늘은 외출 안 할 겁니다.”
“어쩐 일이시래. 그럼 수액 교체할게요.”
척, 척.
다가온 김민지 간호사가 유연한 손길로 수액을 교체하기 시작했다.
그 타이밍에 태건이 넌지시 물었다.
“남자친구는……. 당연히 있으시겠죠?”
우뚝.
순간 손을 멈춘 김민지 간호사가 스산하게 반문했다.
“블랙리스트에 올려드릴까요?”
“아니요. 절대, 네버.”
“그럼 부단장님은 연애 중이라고 자랑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황 단원하고 김 단원 연애하는 거 보면서 배 아픈 심정에 대한 감상평이 듣고 싶으신 건가요?”
투다다다!
김민지 간호사가 기관총 같이 따져 물어왔다.
그 눈빛에 날카로움을 넘어 서슬이 퍼런 독기까지 엿보였다.
태건은 자칫 속사포 공격에 치여 두 번 부상당할 위험까지 느꼈다.
그게 현실이 되기 전에 얼른 말했다.
“쭉 지켜봤는데, 김 간호사님이 참 좋은 분 같아서 제가 좋은 만남의 자리를 한 번 마련할까 합니다만.”
“……저를 또 언제 그렇게 지켜보셨어요. 부끄럽게.”
샤라랑.
독기 가득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꽃밭으로 변화했다.
태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유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십니까?”
“저는 자연스럽게 만나는 걸 더 좋아하는데…….”
스윽.
말은 그러면서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보였다.
관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태건은 뻔히 보면서도 한 번 더 권했다.
“이런 게 자연스러운 거 아닙니까. 어떻게 이 이상 자연스럽습니까.”
“그래도 그렇게 만나면 좀 어색하기도 하고…….”
“처음은 다 어색합니다. 몇 번 보다보면 친해지고 그러는 거죠.”
“다들 그렇다고는 하던데, 제가 그런 건 잘 몰라요.”
베베.
김민지 간호사는 어느 순간부터 싫단 말은 하지 않고 괜히 카테터만 손가락으로 꼬았다.
확실히 싫진 않은가 보다.
딱 눈치 채고 그냥 밀어 붙였다.
“그래서 어떤 스타일이 좋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태건은 그렇게 김민지 간호사에게 계속 권했다.
잠시 후.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고 김민지 간호사가 환한 얼굴로 나왔다.
“그럼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호출해 주세요.”
탁.
엄청 환한 인사와 함께 떠나갔다.
병상에서 손을 흔든 태건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안 물어봤으면 정말 나쁜 사람 될 뻔 했네.”
이어서 시선을 내리자 인터뷰하며 간단히 메모한 수첩이 보였다.
-냉철한 눈빛과 말투.
-왠지 모를 외로움(?)
-나쁜 새끼 말고 나쁜 남자.
-세상에 시크하면서도 나에겐 자상한(?)
그 내용을 조합해본 태건은 조금 황당했다.
“지성 선배가 이상형일 수도 있다니.”
세상엔 역시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이렇게 다시금 일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