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다음날 아침.
태건은 오랜만에 기동복 차림이었다.
그러나 왼쪽 다리를 지지해줄 목발은 그대로였다.
그런 태건은 두툼한 패딩을 걸쳐 입었다.
스륵.
시선은 오광휘 단장을 향한 채 하소연 중이었다.
“이게 뭡니까 안에 보호대는 죄다 그대로 착용하고 목발 짚으니까 꾀병 같잖습니까.”
“그럼 이렇게 붕대 감고 눕던가.”
오광휘 단장은 아직 상체에 붕대를 칭칭 감고 병상에서 꼼짝 못 하고 있었다.
태건은 바로 손절했다.
“노노, 그건 별로.”
“넌 짜샤, 살만해졌다고 그러는 거 아니다. 난 아직도, 으윽. 흐으으.”
“열 내지 말라니까 왜 자꾸 열을 내십니까.”
태건이 놀리자 오광휘 단장의 눈이 바로 가늘어졌다.
“니가 와서 놀려놓고, 어후, 저걸 그냥.”
“그러니까 미리미리 몸조심하셨어야죠.”
“어휴. 말이나 못 하면. 그나저나 넌 이 길로 퇴원한다고?”
오광휘 단장의 질문에 태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통원치료 받기로 했습니다.”
“순순히 집에 있을 놈이 아닌데, 뭔 생각이냐?”
“저 모범환자입니다.”
태건이 떳떳하게 말하자 오광휘 단장이 어이없어했다.
“순진한 김 간호사를 소개팅으로 꼬신 거 소문 다 났어, 짜샤.”
“벌써요? 이야. 병원 소문 빠르네.”
“누구랑 엮으려고?”
오광휘 단장의 질문에 태건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지성 선배요.”
“야, 김 간호사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어. 너 그러는 거 아니다. 그럼 못 써!”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보세요.”
척.
태건은 인터뷰 내용을 펼쳐 내밀었다.
그걸 본 오광휘 단장은 더더욱 흥분했다.
“인마. 이래도 니가 다른 애로 돌려야지. 한 사람의 인생을 말이야, 으윽! 그럼 안 돼!”
“만나보고 아니면 안 보겠죠.”
“그거야 그렇긴 하다만, 그래도……. 아니다. 됐다. 사람 일을 누가 아냐.”
오광휘 단장은 흥분하다 이내 툭 내려놓았다.
태건도 그 점은 동감했다.
“가볍게 생각하자고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오냐. 유선보고 잊지 마라.”
“예썰. 그럼 퇴원하겠습니다. 라텔!”
척.
태건의 거수경례가 얄미웠는지 오광휘 단장이 용을 쓰며 베개를 던졌다.
“끄응, 꺼져, 새꺄.”
휙, 턱!
“이건 놓고 갈게요.”
“아으. 저 밉상. 얼른 가!”
“넵!”
쪼르르.
태건은 끝까지 놀리며 오광휘 단장의 병실을 나섰다.
이어서 황대산의 병실로 잠시 향했다.
턱.
문고리를 잡은 그때 안에서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패스.”
과감하게 인사를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그래도 아예 무시할 순 없는 선배라 메신저로 연락했다.
-강태건 : 황 선배, 저 퇴원합니다. 두 분 다 쾌차하십시오.
턱, 턱.
태건은 목발을 짚으며 병원을 나섰다.
그런 그의 옆엔 어느새 나타난 이지성이 어이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야, 어딜 내빼려고.”
척.
손바닥을 대놓고 내밀었다.
태건은 그런 그에게 외상 사인을 보내며 찡긋거렸다.
스윽.
“에헤이.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러다 이순이도, 삼식이도 모르게 뒤지는 수가 있어.”
“소개팅 날아가도 죽는 겁니까?”
태건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일순간 이지성이 멈칫했지만 쉽사리 믿지 않았다.
“며칠이나 됐다고, 그새 상대를 구했단 말을 믿으란 건 아니겠지?”
“구했으면?”
“……진심이냐?”
이지성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장난이라면 곱게 넘어가지 않을 분위기였다.
태건은 거두절미하고 휴대폰을 꺼내 김민지 간호사의 사진을 보여줬다.
척.
“누군지 알죠?”
“…….”
“갑자기 말이 없어지셨습니다.”
태건이 얄밉게 이죽거렸다.
이지성은 불끈 솟아오른 주먹을 억지로 찍어 누르며 말했다.
“그래서 언제?”
“그걸 제가 정합니까?”
“그럼?”
이지성이 질문한 바로 그때였다.
띠링.
그의 휴대폰이 울리더니 태건이 느긋하게 답했다.
“알아서 잡으셔야지. 파이팅.”
툭툭.
태건은 이지성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고는 지나쳐갔다.
평소였다면 당장 잡아챘을 이지성이지만 휴대폰부터 꺼내들었다.
-김민지, 010…….
정말 상대의 이름과 연락처가 도착해 있었다.
“…….”
이지성은 그 모습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태건은 힐끗 고개 돌려 뻣뻣해진 이지성을 확인했다.
“은근히 쑥맥이야.”
저래서 연락이나 제대로 할까 걱정됐다.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 만남까지 주선할 용의도 있었다.
턱, 턱.
그렇게 생각하면서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잠시 후.
집에 돌아온 태건은 현관문을 닫았다.
이어서 무심코 몸을 돌린 태건은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반짝반짝.
집안 전역에서 광이 났다.
“내 집 맞는데…….”
어리둥절하던 태건은 이내 어떻게 된 일인지 직감했다.
어머니 작품이다.
…….
현관에 잠시 우두커니 서서 둘러봤다.
어머니가 여기저기 구석구석 쓸고 닦았을 모습이 그려졌다.
절뚝, 절뚝.
태건은 말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가스레인지는 물론이고 싱크대와 선반, 냉장고 등등 정말 어디도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 태건이 냉동고를 열어봤다.
끼익.
그 속엔 칸칸이 작게 포장 되어 얼린 음식들로 가득했다.
-고추장찌개.
-소머리국.
-성게미역국.
-된장찌개.
태건이 좋아하는 어머니의 음식들이었다.
“…….”
가느다랗게 지어지는 미소의 끝이 희미하게 떨려왔다.
냉동실 문을 닫은 태건은 곧장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둘째니?”
“네. 방금 집에 왔어요.”
“냉동고에 이것저것 좀 넣어뒀다. 아프다고 대충 먹지 말고 그거 데워 먹어.”
무심함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태건은 안다.
어머니가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마음으로 알고 있었다.
태건이 해야 할 건 어머니의 평정심을 지켜드리는 거였다.
“그냥 쉬다 가시지 뭘 번거롭게 그러셨어요.”
“집안 꼬라지가 쉴 꼬라지였는 줄 아니? 세리한테 걸레 빨아오라고 시켜야 될 판이었어.”
“세리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죠.”
태건이 넉살 좋게 대답하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말하는 거 보니까 이젠 살만한가 보구나. 그럼 됐으니까 끊자. 툭하면 다치고, 어휴. 속상해서 내가 못 살아.”
뚝!
어머니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 흘린 말은 일부러 들으라고 한 말이 분명했다.
비록 타박이었지만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마음의 소리였다.
그런 어머니의 푸념이 가슴 속을 깊게 찔러왔다.
“단단한 부침두부의 길은 멀고도 험하네.”
태건은 쓰게 웃었다.
얼른 나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뵙는 게 지금으로썬 최선이었다.
이내 태건은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도 역시 너무도 깔끔하게 청소와 정리가 되어 있었다.
태건은 기동복부터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았다.
“끄으응. 크윽, 끄응!”
상의를 들어 올리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보호대가 거슬려 두 배 아니, 몇 배는 힘들었다.
옷을 갈아입었을 뿐인데 얼굴이 땀투성이 되었을 정도였다.
“진통제 안 맞고 왔음 일 났겠네.”
진심으로 누군가 도와줄 때까지 옷도 갈아입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기진맥진해진 태건은 자료는 당장 거들떠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스르륵.
거실 소파에 몸을 던지지도 못했다.
조심스럽게 누워 오광휘 단장에게 보고부터 했다.
“……이상 보고, 쓰읍. 끝.”
“그 쓰읍은 추임새냐?”
오광휘 단장의 딴죽에 웃음기가 느껴졌다.
태건은 뚱한 눈으로 말했다.
“몸 상태가 안 좋다니까요.”
“당연한 말은 입 아프고, 이제 쉬련다. 너도 쉬어라.”
뚝.
오광휘 단장과 통화도 간략하게 마무리 됐다.
태건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다 문득 한 인물이 떠올랐다.
성지훈.
사고 후 선배 전문의가 일하는 병원으로 전원했다는 소식만 알고 있었다.
함께 출동한 사이인데 이렇게 무심한 건 도리가 아니었다.
뚜루루.
신호가 몇 번 울리자 곧 성지훈의 기운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세요.”
“전화 받을 컨디션이면 먼저 전화도 하고 좀 그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 분……. 말씀 참……. 섭섭하게 하시네……. 저 오늘……. 일반 병실로…….”
그의 말이 끝나지 않았지만 태건은 바로 알아듣고 놀라 물었다.
“오늘 일반 병실로 옮기셨다니요. 그렇게 안 좋으셨습니까?”
“어깨에……. 철심 네 개……. 박았습니다.”
“저런. 이제 정밀 수술은 어렵겠네요.”
태건이 놀리듯 말하자 성지훈의 목소리가 바로 격앙되어 들려왔다.
“뭐라고욧!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본인이요.”
“와, 와하! 우와. 이야. 와하하!”
얼마나 기가 막힌지 허탈한 웃음소리만 계속 들려왔다.
그러나 태건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권했다.
“말씀을 하세요.”
“이보세요. 부단장님.”
“네. 성 선생님.”
태건이 느긋하게 대답하자 성지훈의 울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 폐광 속에서 말입니다. 어! 그 뾰족한 돌들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곳에서, 어!”
“네.”
“그 속에 같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거기 누가 가자고 했습니까?”
태건이 요점을 묻자 성지훈의 목소리가 턱 막혔다.
“그게! 그러니까…….”
“말씀하세요.”
“…….”
“여보세요? 아아, 성 선생님?”
태건이 재차 부르자 성지훈의 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우씨.”
“큭큭.”
“웃음이 나오십니까!”
성지훈이 다시금 울컥하자 태건은 놀리는 걸 멈추고 차분히 통화를 이어갔다.
“성 선생님, 그날 우리가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하십니까?”
“기억은 쥐뿔. 내가 거기 무슨 정신으로 들어갔는지도 기억 안 나는데!”
“의사라텔.”
태건이 말하자 성지훈이 크게 놀랐다.
“네?”
“그날 성 선생님의 콜사인이 의사라텔이었습니다.”
“의사……. 라텔이요?”
성지훈의 목소리가 급격히 떨려왔다.
태건은 묵직한 음성으로 다시금 말했다.
“저희 출동일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지훈, 의사라텔, 이라고요.”
“아…….”
“아, 물론 임의로 부여한 일회성 호출명입니다.”
“그럼……. 그 콜사인은 제 거란 겁니까. 호출명이라고요?”
성지훈은 확인에 확인을 요구했다.
태건은 보다 확고한 목소리로 답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폐광 속에 뛰어들어 5명의 아이들을 응급처치한 의사라텔은 성지훈, 한 사람뿐입니다.”
“…….”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위험 속에서도 끝까지 용기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태건은 인사를 끝으로 통화를 마무리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