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309)화 (309/320)

309화

그 황당한 표정을 읽었는지 이덕찬 반장이 발끈했다.

“너무 이상하잖아. 닥치는 대로 불 지르는 사이코 새끼가 아니고야 이럴 수가 있겠어?”

“흐음”

“수법조차 제멋대로야. 너무 패턴이 없어서 그냥 사고 같은 정도라니까.”

이덕찬 반장이 열변을 토했다.

그런 그의 말에 허점을 엿본 태건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누군가의 소행이라고 의심하시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까?”

“아니, 없어.”

“네?”

“그냥 내 감이야. 화재조사관만 15년 넘게 하고 있는 내 육감. 이건 못 속여.”

핑!

이덕찬 반장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그런데 태건의 표정은 어색하게 변해갔다.

“하, 하하.”

“아닌 거 같아?”

“이번엔 좀 멀리 가신 거 같은데요.”

태건은 최대한 좋게 표현했다.

그러나 이덕찬 반장은 확실하다 못해 비장하게 말했다.

“아니라니까. 이건 필시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불 싸지르고 다니는 거야. 확실해.”

“왜요?”

“정신 나간 놈이 하는 짓을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데 족족 라텔이 출동한다……. 우연이라도 그렇게 겹치는 게 가능할까요?”

태건이 핵심을 짚어 물었다.

그 부분에선 할 말이 없는지 이덕찬 반장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와락!

“아으씨, 그럼 뭐냐고.”

“스모크점퍼 훈련 과정에 ATF 과정도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ATF는 미국 화재조사관이잖아, 수사권도 있다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지.”

역시 관련분야라 박식했다.

태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핵심을 말했다.

“그쪽에선 이럴 때 이런 방법을 제시합니다.”

“어떤?”

“피해자 보험사를 만나라.”

찡긋.

태건이 상큼한 표정과 함께 말했다.

그러나 이덕찬 반장은 갸웃거리며 알아듣지 못했다.

“왜?”

“돈에 환장한 놈들은 방화인지 사고인지 귀신 같이 알아맞히거든요. 가까운 데로 가보시죠.”

그릉.

태건은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바로 그때 이덕찬 반장이 손을 뻗어 태건을 붙들었다.

턱.

“아서, 여긴 미국이 아니야.”

“네?”

“우리가 가서 화재보험 가입했냐고 물어보면 대답이나 해줄 거 같아?”

그 질문에 태건은 당연하단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뭐 어렵다고. 그 정도 대답은 기본 아닙니까?”

“아니, 차일피일 미루다 씹어버려.”

“네?”

“그쪽도 불만이 있겠지. 우리 쪽에서 현장출입 제한하고 조사보고서 열람 제한한다고 말이야.”

이덕찬 반장의 씁쓸한 대답 속엔 오랫동안 쌓인 앙금이 느껴졌다.

태건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전에 분명히 상호간에 세마나도 하고 그랬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예산 부족이다 뭐다하면서 없어졌어.”

“그게 뭐 그렇게…….”

“재판에서 증인으로 불려 다니고, 증언해주면 보험금 줄고, 민원 넣고, 아무튼 말이 많다보니까 서로 피하게 된 거지.”

이덕찬 반장은 최소한으로 압축해 말했다.

그 정도만 들어도 태건은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됐다.

한쪽은 공무원, 한쪽은 실적.

서로 예민한 문제에 걸쳐있다 보니 껄끄러워진 모양이었다.

“그건 좀 애매하네요.”

“그러니까 가 봐야 서로 얼굴 붉히는 꼴이라 이거야.”

“그럼 저쪽이 원하는 패를 들고 가면 되겠네요.”

태건이 뒤집어 말하자 이덕찬 반장이 눈을 끔뻑거렸다.

“어?”

“잠시만요……. 여기 건물 화재 좋네요. 피해 금액도 적당하고, 이걸로 하시죠.”

척.

태건은 단숨에 결재서류를 하나 뽑아들며 찡긋거렸다.

잠시 후.

태건은 이덕찬 반장과 함께 수원으로 향했다.

부웅.

조수석에 자리한 태건은 노란 서류철에 따로 복사한 조사서류를 다시 검토 중이었다.

“예민한 부분은 다 빼둔 거 같네요.”

“참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재주가 있네.”

“그래도 건물주가 화재보험사 직원이랑 같이 기다린다고 하잖습니까.”

“그것도 희한해. 순순히 허락할 줄 몰랐는데 말이야.”

이덕찬 반장은 이런 만남이 성사되었단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태건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 끌어 좋을 게 없는 건 서로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거야 그렇긴 하지.”

“그리고 같이 현장을 보고, 증언도 듣는 게 좋고요.”

“그래. 유연하게 한번 해 보자고.”

부웅.

이덕찬 반장은 나름의 각오를 읊조리며 차를 몰아갔다.

경기도 수원.

조금 외진 지역의 3층 건물 앞에 태건과 이덕찬 반장이 도착했다.

3층 건물의 외관은 상당히 그을려 화재의 흔적이 가득 남아 있었다.

며칠 전 화재가 발생한 건물이었다.

아직 파이어 라인이 외곽에 둘러져 철거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파이어 라인 앞에 꼬장꼬장한 인상의 노인과 양복차림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이덕찬 반장이 다가가 양복 중년인을 바라봤다.

역시나 구면인지 가볍게 인사했다.

“오재현 실장님, 오늘도 맵시가 좋으십니다.”

“반장님은 피곤해 보이시네요.”

“요즘 불장난하는 놈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요. 그보다, 아시죠?”

스윽.

이덕찬 반장이 적당히 자리를 피하며 태건을 내보였다.

태건은 자연스럽게 다가가 오재현 실장에게 인사했다.

“라텔 부단장 강태건입니다.”

“국민영웅을 이렇게 뵙네요. XYZ화재보험 오재현입니다.”

“제가 급하게 오느라 명함이........”

“얼굴이 명함 아니십니까. 악수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꾸욱.

태건과 오재현 실장은 서글서글하게 악수를 나눴다. 서로 이해관계가 없는 사이라 날을 세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태건은 이어서 건물주인 최만수 사장과도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강태건입니다.”

“……어, 그래요. TV랑 똑같네. 나 최만수요.”

“이 좋은 건물이, 참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태건이 진심어린 위로를 전하자 최만수 사장이 쓴 얼굴로 답했다.

“에휴. 속 터져서 자다가 벌떡 일어나요.”

“반장님이 오신다고 하셔서 염치 불고하고 같이 왔습니다.”

태건이 가볍게 소개한 그때, 이덕찬 반장이 슬그머니 끼어들어 말했다.

“우리 부단장이 재주가 좋아서 화재조사에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다 필요해서 데려온 거니까 눈치 주고 그러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 반장님 앞에서 화재조사에 명함을 내밉니까.”

“그건 들어가 현장 둘러보면 사이즈 나오겠지.”

이덕찬 반장이 역시나 변죽 좋게 모두를 아우르며 이끌었다.

이런 부분은 태건과 내려오며 모두 합을 맞춘 말들이었다.

태건은 일부러 한 걸음 물러선 입장에 서 있었다.

그건 최만수 사장과 오재현 실장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오재현 실장이 이덕찬 반장을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반장님, 오늘은 정말 수사결과 공유하시는 거 맞습니까?”

“오 실장님, 오늘은 우리 오픈 마인드로 가자니까.”

“사실 전에 직원분들하고 좀 그랬잖습니까.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 안 좋습니다.”

“에헤이. 그럼 나 말고 부단장 믿어요. 됐지. 내가 부단장 앞에서 설마 거짓말 할까.”

이덕찬 반장이 떵떵거렸다.

그 소리에 오재현 실장이 태건을 슬쩍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단장님은 제가 믿죠.”

“오늘 처음 뵀는데요. 그런데 신뢰가 있습니까?”

“아니, 부단장님을 못 믿으면 대한민국에서 누굴 믿습니까?”

오재현 실장이 외려 되묻자 태건이 싱긋 미소 지었다.

“이거 부담스럽고 좋네요.”

“반장님이 딴소리하시면 철저한 증언 부탁드립니다.”

“그건 제가 중립적인 마인드를 고수하겠습니다.”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갔다.

그러자 앞서가던 최만수 사장이 돌아보며 한 소리 했다.

“이 사람들이, 남의 초상난 건물 들어가면서 지금 웃음이 나와?”

“보상 잘 받게 해드리려고…….”

“그걸 눈으로 봐야지, 입으로 떠들어서 뭐가 나와. 사람들하고는, 에잉!”

척, 척.

최만수 사장은 신경질을 부리며 걸어갔다.

뒤따라 들어가는 태건의 시선은 최만수 사장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상당히 예민하시네.’

건물이 불타서 예민하다고 하기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이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덕찬 반장과 오재현 실장이 특히 할 말이 많은지 거리가 가까웠다.

그리고 오가는 대화도 상당히 많았다.

“오 실장님, 우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말입니다. 저쪽에서 시작된 불이…….”

“음. 그렇군요. 그리고 지금 말씀하시는 거 녹화해도 됩니까?”

“법정 증거만 아니라면, 뭐.”

“그 정도 선은 지킵니다. 내부 회의 때 참고하려고요. 어차피 저희도 재조사 할 거니까. 그래서요?”

두런두런.

서로 저렇게 사이가 좋을까 싶을 정도로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가 오갔다.

이덕찬 반장만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 오재현 실장도 정보를 아낌없이 공유했다.

“이 건물의 화재보험 갱신이……. 수령인이야 최 사장님이고, 보상범위는…….”

“으흠. 그 부분은 내가 좀 메모를 해 놔야겠네요.”

슥슥.

이덕찬 반장이 메모하자 어디선가 최만수 사장이 나타나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건 내 개인정보 아니요. 그걸 왜 화재 조사하는데 막 캐묻고, 또 왜 알려주고 그러는 거요!”

“이게 화재원인 조사에서 중요한 기초조사 자료가 됩니다.”

“그게 왜 중요합니까. 대체 왜요!”

최만수 사장은 당장이라도 싸울 듯이 계속 몰아붙였다.

이덕찬 반장이 난감해할 정도였다.

“허허, 이거 원.”

그때였다.

스윽.

태건이 슬쩍 다가가 최만수 사장에게 미소 지었다.

“그건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뭔데요!”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 좀 많잖습니까. 보험금 받으려고 일부러 불 지르는 사람들도 있고 말입니다.”

태건이 운을 떼자 최만수 사장의 어깨가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그, 그거랑 나랑 뭔 상관입니까.”

“당연히 상관없겠죠. 있는 게 이상한 거 아닙니까. 그렇죠?”

“지금 날 의심한다는 의미 같은데, 이렇게 선량한 시민한테 이런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이거 기분 나빠서 살겠나, 어!”

최만수 사장은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반응했다.

그걸 본인만 인지하지 못했다.

반면 듣는 입장인 태건은 명확하게 구분이 됐다.

‘이 할아버지, 냄새가 좀 나는데.’

심증은 가지만 뭔가 확실한 물증이 없는 상황이다.

태건은 일단 진정시키는 방향을 택했다.

“누가 의심을 합니까. 그런 의심을 받지 않게 해드리려고 이러는 겁니다.”

“내가 이 날까지 살면서 정말 이렇게 불쾌한 적은 처음이요. 처음!”

“그러니까 사장님은 갑자기 화재보험을 고액으로 갱신하거나 중복 가입한 적은 절대 없으신 거 아닙니까.”

태건은 일부러 대놓고 찔러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최만수 사장은 떵떵거리며 큰소리 쳤다.

“뭐요.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런 되바라진 놈으로 봅니까. 내가 그런 놈으로 보여!”

“아니실 줄 알고 말씀드린 겁니다. 인상을 딱 봐도 아니란 게 팍팍 풍겨 나오는데요, 뭐.”

“그야 당연하지.”

“노여움 푸시고, 같이 좀 더 둘러보시죠. 어이고, 이거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시네요.”

슥슥.

태건은 후끈해진 최만수 사장의 등을 가볍게 받치며 안내했다.

그러면서 슬쩍슬쩍 말을 건넸다.

어렸을 때부터 마을에서 어른들에게 예쁨 받은 공경의 솜씨를 십분 발휘했다.

그러자 최만수 사장도 뚱한 목소리가 슬쩍 풀려갔다.

“내가 이 건물 지을 땐 말이야. 자동차가 귀한 시절…….”

“이야. 이 건물이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역사네요. 이거 다 녹아서 아깝네요.”

“이것들이야 그렇게까지 오래 되진 않았지. 몇 년 된 것도 있고, 이번에 들여온 것도 좀 있고.”

최만수 사장이 수더분하게 말하자 태건은 유연하게 응대했다.

“그래도 아까운 건 아깝죠. 보험사에 이런 걸 좀 비싸게 뜯어내야 되는데.”

“안 그래도 이번에 보상금 목록에 좀 더 플러스……. 크흠.”

그는 갑자기 말을 아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