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그 타이밍에 태건은 절묘하게 거리를 벌렸다.
스윽.
“이건 뭐지?”
그러나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누가 조언해준 사람이 있는 거 같은데.’
그 정도 알아낸 걸로도 충분히 소득이 있는 대화였다.
최만수 사장과 멀어진 태건은 본격적으로 화재 흔적을 추적했다.
스스슥.
타들어간 흔적을 통해 불을 상상하고 흐름을 추적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태건이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1층 후문 어느 창문 중 하나였다.
‘저기 즈음에서 시작 된 거 같은데…….’
확실한 건 인위적인 화재다.
한 마디로 방화다.
그러나 최만수 사장의 범행이란 증거는 없었다.
‘그게 더 이상해.’
증거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게 프로의 냄새가 풍겼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덕찬 반장이 다가왔다.
“어떻게 새로 찾아낸 게 좀 있어?”
“아니요. 오 실장님과는 대화가 잘되셨습니까?”
“그럭저럭. 그럼 어떻게, 좀 더 볼 건가?”
“당장 허물 거 아닌데, 오늘은 이만 철수하시죠.”
태건이 권하자 이덕찬 반장이 의외로 예리한 면을 보였다.
“뭔가 찝찝한 건 있는 모양이야.”
“우선 움직일까요?”
“가자고. 수원까지 왔는데 왕갈비통닭은 한 마리 땡겨야지.”
“왕갈비가 아니라 왕갈비통닭이요? 너무 짠돌이시다.”
태건은 어이없어하며 이덕찬 반장과 함께 움직였다.
두 사람은 그 길로 자리를 옮겼다.
수원 통닭거리.
몇 년 전 어느 영화로 인해 관광명소가 된 장소였다.
여러 대표 통닭집 중 한 곳에 태건과 이덕찬 반장이 들어갔다.
2층의 구석진 자리로 안내를 받았고, 또 평일 낮이라 다행스럽게도 내방객이 많지 않았다.
많은 관심이 쏠리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다른 난감한 일이 일어났다.
테이블이 꽉 차는 무한서비스 행렬이었다.
태건이 한 거라고는 기념사진 촬영과 사인밖에 없었다.
그게 이렇게 푸짐하게 되돌아와 있었다.
이덕찬 반장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태건과 테이블을 번갈아 바라봤다.
“우리 왕갈비치킨 한 마리 시켰지?”
“아마도요.”
“그렇지? 내가 메뉴판에 있는 거 하나씩 달라고 한 거 아닌 거 맞지?”
“하. 하하.”
태건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포근한 인상의 주인아주머니가 또 무언가를 들고 다가왔다.
“이것도 한 번 드셔 보세요.”
“네? 또요? 감사한데, 아니, 그래도…….”
“여기에 맥주 한 잔 시원하게 하시면 더 좋을 텐데.”
“저희가 일하는 중이라. 그리고 정말 너무 감사한데, 이제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요.”
태건은 너무 과한 서비스에 주인아주머니에게 용서를 구하기까지 했다.
그런 절박함이 장난으로 느껴진 모양이다.
“알았어요. 어제 꿈자리가 좋더니 이렇게 부단장님이 오시고, 호호. 그럼 편하게들 드세요.”
주인아주머니는 날아갈 듯한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태건은 다른 서비스가 없는 걸 유심히 지켜본 후에야 긴장을 놓았다.
“어휴휴.”
그때 이덕찬 반장이 슬그머니 수첩을 내밀었다.
스윽.
“사인 10장만 해줘.”
“반장님은 갑자기 왜요?”
“지방 출장 갔을 때 써 먹으려고. 부단장 사인 한 장이면 우리 애들 회식시킬 수 있겠어.”
얼토당토않은 계획에 태건은 황당했다.
“제 사인이 무슨 외식상품권입니까?”
“그건 좀 그렇지?”
“당연히 그렇죠!”
“그럼 사진 인화해서 거기에 사인해줘. 최소한 그 정도 정성은 들여야 얻어먹을 염치가 있지.”
더 앞서가는 말에 태건이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반장님. ……어른들은 단장님을 더 좋아하십니다.”
“가만 보면 부단장도 보통은 아니야.”
“이러나저러나 전 이럴 때마다 부담스러워 죽겠습니다. 어디 식당 가기 무섭다니까요.”
태건은 표정을 풀며 앓는 소리를 했다.
그때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태건의 몸이 절로 굳어졌다.
“설마 또?”
그러나 예상하는 그 일은 아니었다.
척, 척.
다가오는 인물은 오재현 실장이었다.
“무슨 통닭집 메뉴 탐방하러 오셨습니까?”
“여기 걸어 다니는 무한외식상품권이 있잖습니까.”
스윽.
이덕찬 반장이 태건을 가리켰다.
오재현 실장은 웃으며 빈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오재현 실장이 간간이 사이드 메뉴에 손을 뻗어가며 자연스럽게 화재사건에 대한 언급을 시작했다.
“사실 저희 회사에서 이번 화재 건에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을 돌린 게 그 이유셨군요.”
태건이 답하고 난 후 이덕찬 반장이 갸웃거렸다.
“오 실장, 이상하시네. 오늘까지 세 번 만났는데, 그쪽 입장은 일절 말하지 않으시더니?”
“아까 수사결과 먼저 오픈해주셨잖습니까. 그래서 저도 까는 겁니다.”
“이렇게 화끈하신 분이었나? 내가 그동안 오해를 했나?”
이덕찬 반장은 오재현 실장의 달라진 태도에, 오히려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태건은 그런 두 사람의 대화가 설전으로 번지기 전에 끼어들었다.
“지난 일 계속 꺼내면 뭐합니까. 지금이 중요하지요.”
“뭐, 그건 부단장 말이 맞긴 하지. 크흠. 그래요. 아무튼 왜 의심하는 겁니까?”
이덕찬 반장도 긁어 부스럼 만들기는 싫은지 한 걸음 물러났다.
오재현 실장은 자극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 건물에서 이번까지 총 세 번 화재가 났습니다.”
“같은 장소에서요?”
“처음엔 같은 장소 다른 위치, 두 번째는 2층에 인력사무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어느새 이덕찬 반장과 오재현 실장은 서로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양쪽에서 조사한 내용을 합쳐보니 이상한 점들이 두드러진 탓이다.
그걸 두 사람도 인지하는 모양이었다.
이덕찬 반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거 오 실장님하고 이렇게 대화하니까 확실히 좀 이상한 거 같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참. 보험사 쪽하고 이렇게 대화한 게 얼마 만인지.”
“저도 화재조사관하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한 게 너무 오랜만이긴 하네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각자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며 지금까지 대화를 속으로 정리했다.
어느 순간, 태건이 침묵을 깨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두 분 소화 좀 되셨습니까?”
심상치 않은 뉘앙스의 질문이었다.
동시에 이덕찬 반장과 오재현 실장의 표정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흐음.”
“쓰읍.”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태건은 더 시간 끌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제가 반장님을 통해 실장님께 따로 언질을 드렸었죠.”
“서효준 씨에 대해 먼저 말하지 말란 부탁이었습니다.”
“네. 2층 인력사무소에서 수면 중 유독가스 흡입으로 지금 혼수상태시지요.”
태건이 안타까운 사고를 언급했다.
이번 화재사건의 유일한 사상자였다.
이덕찬 반장은 그런 태건을 향해 묵직하게 물었다.
“부단장이 이 케이스를 꼽은 이유 아니었어?”
“맞습니다.”
“그런데 현장조사하면서 왜 일절 언급하지 말라고 했어? 조사결과 복사하면서 일부러 누락도 시켰잖아.”
재차 물어오자 태건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라텔 보고서에 좀 이상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나도 봤지. 난 모른다는 둥, 어쩔 수 없다는 둥, 그런 혼잣말을 했다는 거 같던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말하지 않고 지켜보잔 거였고요.”
태건이 풀어서 말했다.
오재현 실장이 생각에 잠긴 눈으로 거들어 말했다.
“그런데 최만수 사장은 같이 있는 내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지요.”
“전 그게 너무 이상했습니다. 차라리 보상 문제라도 거론한다면 모를까요.”
“그러네요. 병원은 다녀왔다고 치더라도 대인 보상이나, 누가 보상하는지조차 묻지 않았습니다.”
곱씹는 오재현 실장의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갔다.
바로 그때였다.
띠리리.
이덕찬 반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나야, 뭔데? ……뭐? 언제? 하아, 그래. 알았어.”
스르륵.
이내 힘없는 손길로 휴대폰을 내렸다.
“…….”
태건과 오재현 실장이 그런 그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이덕찬 반장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쓰브럴. 괜히 쳐 먹었나. 체기가 확 올라오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서효준 씨……. 패혈증 합병증으로 조금 전에 갔대.”
그 소리에 태건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아니, 보고서에는 차도가 있다고……. 쓰여 있었잖습니까.”
“나도 어젯밤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어. 젠장.”
쿵!
무거운 마음만큼 테이블을 묵직하게 내리찍었다.
오재현 실장의 눈동자도 갈 곳을 잃은 듯 격하게 흔들렸다.
“보상이고 지랄이고, 그 사람은 대체 뭔 죄야.”
“어휴. 이거 씨파. 이건 밝혀야지. 뭔 염병을 떨어서라도 억울하게 뒤진 이유는 알려줘야지!”
텅텅!
이덕찬 반장이 바닥을 격하게 구르며 격분했다.
화재조사관이란 직업적 사명감이 강하게 솟구치는 모양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더 용솟음치는 인물이 있었다.
태건이었다.
부들부들.
테이블에 올린 주먹이 저절로 진동했다.
“이런 XXXXXX.”
앞뒤 없는 거친 욕설이 장난 없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젠 그 생각이 180도 달라졌다.
한 사람이 억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것도 이 화재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이다.
이건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건의 살벌한 분노에 이덕찬 반장과 오재현 실장의 어깨가 순간 움츠러들었다.
“헉.”
“크업!”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태건의 눈엔 뵈는 게 없었다.
크르릉.
흡사 야수처럼 이를 드러낸 태건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으르렁거렸다.
“이 사건. 진실이 뭔지, 무슨 흑막이 있는지, 철저히 밝힙시다. 끝까지!”
쾅!
격한 외침과 함께 테이블까지 내리쳤다.
이덕찬 반장과 오재현 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로 답했다.
“네. 물론입지요. 꼭 그래야지요.”
“저도 도의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내 태건이 벌떡 일어났다.
“더 앉아 있어서 뭐합니까. 갑시다!”
그 소리에 이덕찬 반장과 오재현 실장이 기세에 눌려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그릉!
“가, 갑시다!”
“움직여야죠!”
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재현 실장에게 먼저 부탁했다.
“실장님, 공장 거래내역서 싹 다 확보할 수 있습니까?”
“그게 전문인데 그걸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보험 관련한 자료들 분석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벌써 우리 직원들이 정밀분석 중입니다.”
오재현 실장도 적극 협조를 다짐했는지 눈에 열기가 가득했다.
태건은 바로 이덕찬 반장에게 말했다.
“우리는 내외부 CCTV부터 다시 분석해야겠습니다.”
“신고자와 목격자도 다시 만나서 자세히 인터뷰 해봐야지. 차량 블랙박스도 수배해 보고.”
“무엇보다 정확한 발화지점과 원인을 밝혀내야죠. 분명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더 말해 뭐해. 후딱후딱 움직입시다!”
휙!
이덕찬 반장이 파이팅을 외치며 움직였다.
태건과 오재현 실장도 굳은 눈빛으로 다부지게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