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잠깐이지만 행동을 파악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쀼루퉁하게 바라보던 노주민의 두 눈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본인 건물 맞대요?”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닌 거 같은데.”
“아니죠. 저였으면 주저앉아서 꺼이꺼이 울었을 겁니다.”
노주민이 반박하자 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너무 침착하지?”
“침착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구경하는데요.”
“그럼 이 말은 어떤 거 같아?”
태건은 바로 리모컨을 작동시켰다.
-왜 거기서 잠을 자. 사무실이 자는 데야? 그나저나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이런 육시럴.
최만수 사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띡.
태건이 다시 멈추자 노주민이 귀를 의심했다.
“잠시만요. 이 말을 저 할아버지가 했다고요? 에이, 다른 사람이겠죠.”
“내가 오늘 낮에 직접 만나고 왔어.”
“……그럼 더 이상한데요.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이 말이 특히요.”
노주민이 딱 짚어내자 태건도 동의했다.
“그렇지. 마치 불이 날 걸 알고 있었단 뉘앙스 같지.”
“네. 2층에 사람이 원래 없어야 했단 느낌으로 들립니다.”
“흐음.”
톡, 톡.
태건이 노트에 펜을 두드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런 모습에 노주민이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다가왔다.
불쑥!
“부단장님, 이 정도면 건물주가 불 지른 거 아닙니까?”
“얼굴 안 치워?”
“저 태도며, 말투만 봐도 딱 느낌이 안 오세요? 뭘 고민하시는 겁니까!”
노주민이 발끈했다.
오히려 태건은 얼굴부터 밀어내며 말했다.
“그건 물증이 아니라 심증이야.”
“으으윽. 이 정도면 확신이라고……. 제 얼굴 짜부러집니다.”
“그럼 버티지 말고 빠져.”
그래도 노주민은 끝까지 버티며 자기 의견을 관철했다.
“이건 방화라니까요.”
“아는데, 물증 찾으라고, 물증.”
“현장에서 못 찾았다면서요오오. 으으윽……. 아, 그래서 화재진압 영상, 오오오!”
휙!
노주민은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열을 뿜어내며 영상에 집중했다.
태건은 시시각각 변하는 노주민의 태도에 정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뭐라도 찾아내라. 뭐라도.”
띡.
싱겁게 읊조리고는 다시 이지성의 영상을 재생했다.
그 다음은 이지성이 재정비하는 장면이었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영상이다.
무심코 지켜보다 이내 넘기려 리모컨을 들었다.
“여긴 이쯤이면 된 거 같고, 이제 공장에서 힌트를 찾아야……. 어?”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르려던 태건이 멈칫했다.
방금 지나친 화면 속 최만수 사장의 모습 탓이었다.
띡, 띡.
태건은 얼른 몇 초 전으로 되감았다.
-치리릭.
그리고 다시 재생하며 두 눈에 힘을 주고 똑똑히 지켜봤다.
이지성이 몸을 돌려 건물로 향하는 장면이다.
앵글이 같이 빙그르르 도는 그 순간 최만수 사장이 잡혔다.
띡.
태건은 타이밍 맞춰 일시정지 시켰다.
멈춘 화면 속엔 최만수 사장이 약간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불타는 건물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잠깐 다른 곳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표정이 아니었고, 각도도 너무 어색했다.
“저쪽에 누가 있는 거처럼, 이 사태를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거 같네요. 최 사장님.”
낮에 대화하며 느꼈던 ‘조언해준 누군가.’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슥슥.
태건은 그 부분을 최대한 자세하게 수첩에 정리했다.
이건 현장출동보고서에 없는 내용이다.
그 현장에서, 그 순간을 포착하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영상 촬영의 주인공인 이지성조차 인지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바디캠이 벌써 값어치를 다 했네.’
결정적인 증거를 포착한 것만으로도 그 값을 다 하고 남았다.
스윽.
태건의 시선이 절로 노주민에게로 향했다.
이 모든 게 노주민의 영상촬영으로부터 시작된 거다.
“짜식.”
턱, 턱!
태건이 대뜸 노주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길에 노주민이 팔을 크게 휘저으며 투덜거렸다.
“아, 또 왜요!”
“아니야. 내일도 고기 먹을까?”
“내일이요? 또 먹……. 어도 돼요?”
발끈한 게 민망했는지 노주민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태건은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거 뭐 어렵다고. 그런데 할 일을 깔끔하게 끝내고 먹으면 더 맛있어.”
“제가 오늘 밤새서라도 다 분석하고 잘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같이 하자. 힘내서 쭉쭉 분석하자!”
“역시 부단장님, 제가 가장 존경하고 우러러 보는 멋진 분이십니다. 파이팅!”
둘은 짝짜꿍 맞춰 응원하고는 단원들의 영상분석에 다시 열의를 불태웠다.
그 후로 정말 두 사람은 그때부터 눈에 불을 켜고 영상분석에 몰입했다.
턱. 턱.
커피 잔이 쌓이고 쌓여갔다.
밤이 늦어 새벽이 깊어져갔다.
그런데 둘 다 꿈쩍도 하지 않고 분석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
슥슥.
보고, 또 보고.
돌려서 다시 보고.
다른 영상으로 같은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또 보고.
화재진압 영상만 수 시간째 계속 반복해 봤다.
정말 무서운 집중력이었다.
그런 걸 보면 라텔 단원들 중 가장 쿵짝이 맞는 건 태건과 노주민이 아닐까 싶었다.
그 집요한 분석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먼동이 터오를 무렵.
밤새 각자 분석한 결과를 서서히 공유하기 시작했다.
“부단장님, 여기 이 장면 보시면…….”
“그래. 잘 봤어. 나도 체크했는데, 거기가…….”
“그럼 이쪽에서…….”
“아니. 나무 팔레트를 이용해서…….”
슥슥. 삭삭.
커다란 종이에 건물 평면도를 그려놓고 화재진압 과정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 속에 의문점과 특이점들을 주석으로 표기해 놓고, 별도 메모로 덧붙여 놓았다.
모든 분석을 마쳤을 때는 어느새 다시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에 대한 자축파티는 역시 옥상 바비큐였다.
치이익.
고기가 익어가는 사이 태건이 음료수를 내밀었다.
“고생했으니까 한 잔 해야지.”
“이야. 그 고생을 하고 음료수라니요.”
“아직 환자야. 술은 무슨.”
“무알콜 맥주라도 기분은 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노주민이 아쉬움을 팍팍 내보였다.
그래도 태건은 꿈쩍하지 않고 말했다.
“얼른 먹고 좀 쉬자. 이틀 동안 거의 못 잤더니 갈비뼈가 비명을 지르는 거 같아.”
“그래서 오늘은 소갈비인 겁니까.”
“이상한 농담하지 말고, 먹자. 먹고 뻗자.”
턱.
태건이 음료수를 부딪치고 쭉 들이켰다.
이어서 잘 익은 갈빗대를 뜯으려 할 때였다.
노주민이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나지막이 물었다.
“저희가 분석한 게 진상조사에 아니, 서효준 씨의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을까요?”
“분명히 그렇게 될 거야.”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에잇!”
와직!
노주민은 침통하게 말하더니 대뜸 갈빗대를 뜯었다.
이번에 영상을 분석하며 많은 생각이 오갔던 모양이다.
태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젠 의심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다.
방화다.
이건 의도적으로 불을 지른 범죄사건이다.
그 놈의 돈이 뭔데.
누군가의 삐뚤어진 이기심으로 인해 누군가가 죽었다.
그리고 너무도 많은 인력과 장비가 불필요하게 동원되었다.
이건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두를 기만하는 행위다.
그렇기에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이들의 분노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했다.
이틀 후.
특수소방단 본부 회의실.
오재현 실장이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제가 출세했나 봅니다. 특수소방단에 초대를 받아 오다니요.”
“그러게 말입니다. 귀한 곳에 누추하신 분을 모셨네요.”
반대편에 자리한 이덕찬 반장이 짓궂게 말을 받았다.
그 소리에 오재현 실장의 눈매가 바로 가늘어졌다.
“선물도 들고 왔는데, 너무 까칠하신 거 아닙니까.”
“순 보험 가입했을 때 받는 거던데요.”
“큰일 날 말씀을. 그건 저랑 지점장님이랑 사비로 구입한 겁니다.”
오재현 실장이 따끔하게 말하자 이덕찬 반장이 멈칫했다.
“어라? 그건 몰랐네요. 오해했습니다. 죄송.”
“하여간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시기는.”
“그런데 이렇게 막 선물 돌리면 문제 되는 거 아실랑가 몰라.”
“찌르세요. 누군 그 정도 생각도 안하고 선물하나?”
둘의 대화에 서서히 가시가 솟아났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두 사람만 자리한 게 아니었다.
현장조사반원들과 보험사 직원들이 세 명씩 함께 앉아 있었다.
그들의 신경전도 서서히 시작됐다.
“실장님이 여기가 어디신지 감이 잘 안 오시는 모양이네.”
“반장님은 어제 밤 새셨나. 말씀이 거치십니다만.”
찌리릿.
서로를 향한 눈빛들이 날카로워져갔다.
그런데 이들이 간과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태건이었다.
회의실 전면에, 모두가 잘 보이는 자리에 서서 그 기류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
부르르.
잠잠하던 어깨가 가느다랗게 미동했다.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내 묵직하게 발을 구르며 인상을 푹 찌푸렸다.
“아, 이거 확 때려 엎고 그냥 나가?”
“…….”
촤아악.
찬물을 끼얹은 듯 회의실 내부가 일순간 고요해졌다.
그때 노주민이 재빨리 커피를 들고 달려와 태건의 입에 빨대를 밀어 넣었다.
“부단장님, 냉커피. 쭉, 쭉 들이켜세요. 일단 쭉.”
“쯔읍, 흐으으. 쯔읍.”
태건은 씩씩거리며 커피를 흡입했다.
그 사이 노주민이 이덕찬 반장과 오재현 실장을 타박했다.
“부장단님 성격 몰라요?”
“크흠.”
“뭐 같은 성격인 거 동네방네 소문 다 나서 아시잖아요.”
“어? 아니, 노 단원…….”
이덕찬 반장이 멈칫하며 불렀다.
그러나 노주민은 다른 손을 휘휘 저으며 자기 말을 이어갔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립니까.”
“뭐 같은?”
“그래요. 뭐 같은 자리 아닙……. 어라?”
뭔가 이상함을 직감한 노주민이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태건이 섬뜩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찌이잉!
“다시 말해 봐.”
“중요한 자리란 의미였다고……. 하면 믿어주실래요?”
“아니.”
“그래도 회의 시작했으니까. 그냥 노트북 앞에 찌그러져 있어도 될까요?”
노주민이 애써 이 순간을 면피할 방법을 둘러댔다.
태건은 차가운 눈빛으로 손가락 하나만 까딱거렸다.
스윽.
“…….”
“그럼 실례합니다.”
총총총.
노주민은 얼른 공손하게 뒷걸음질 쳐 태건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다행이라면 장내는 고요했다.
태건은 먼저 이덕찬 반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반장님, 그냥 사고로 종결짓고 끝낼까요?”
“음? 그런 건 아니고…….”
“현장조사반 신뢰 떨어지고, 돌아가신 분의 진상이야 어떻게 돼도 상관없습니까?”
태건이 몰아치자 이덕찬 반장은 바로 사과했다.
“크흠. 자중할게.”
“우리도 조심할게.”
반원들도 더불어 숙연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