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마치 기계처럼 고개를 되돌린 황대산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물었다.
“너, 너, 어떻게…….”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지금 툭 튀어나와서 놀랐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냐고.”
“그때 한 번 언급하셨잖습니까.”
태건은 상기시켜줬지만 황대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내가 언제?”
“현대스포츠센터 화재 출동 때요.”
“……난 몰랐어. 안 그래도 그때 기억이 좀 혼란스럽다고 생각하긴 했었어.”
황대산은 정말 기억하지 못했다.
태건은 가만히 들어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급격히 흥분하면 순간 이성이 날아갈 수 있죠.”
“넌……. 내 생각보다 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는 거 같다.”
“그거 밖에 모릅니다.”
“그러냐. 네 눈을 보니까 진짠가 보네.”
황대산은 빤히 바라보다 스스로 수긍했다.
태건은 쓴 얼굴로 말했다.
“선배, 애쓰지 마세요. 떠올리기 어려운 기억이면 굳이 꺼낼 필요 없잖습니까.”
“……흐으음. 둘도 없는. 아니, 앞으로도 둘도 없을 친구야.”
황대산은 어렵사리 말을 이어갔다.
그런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먹먹함이 차올랐다.
태건은 너무 힘들어하는 황대산을 만류할 수밖에 없었다.
“선배, 일단 몸부터 회복하고 말씀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후우. 그렇지? 이렇게 누워서 떠드는 건 너무 남자답지 못하지?”
“네. 술 한 잔 꺾으면서 ‘그 자식이 말이야.’ 이렇게 말씀하셔야 선배 스타일입니다.”
태건은 일부러 목청 높여가며 흉내냈다.
스윽.
고개 돌린 황대산이 먹먹함을 가라앉히며 싱겁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 자식이라고 할 수 있을 때, 그때 말할게.”
“언제가 됐든 기다리겠습니다.”
“고맙다, 짜샤. 흠흠. 그래서 결론은 지수랑 지내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단 거야.”
황대산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말을 마쳤다.
태건도 심각함을 거두고 잔잔하게 웃었다.
“좋은 일이네요.”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야.”
“이건 누구도 예상 못했을 겁니다.”
태건은 쑥스러워하는 황대산에게 좀 더 진한 미소를 보여줬다.
이내 태건은 병문안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간호사실을 지나가던 태건은 인사를 하며 슬쩍 둘러봤다.
“잘 지내시죠?”
“환자복 준비할까 했는데요.”
“그 전에 도망가야죠. 그보다 김민지 간호사는 안 보이네요?”
태건이 넌지시 묻자 앞에 있던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
“오늘 나이트 근무라서 저녁에 나올 거예요.”
“그렇습니까. 흐음. 알겠습니다.”
“듣고 싶으신 거 같아서 말씀드리죠. 이지성 단원하고는 연락하고 지내고 있어요.”
알아서 듣고픈 소식을 전해주자 태건이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좋은 소식 감사합니다.”
“그런데 김 간호사만 예쁘게 보셨나 봐요. 아니, 뭐 그렇다고요.”
뭔가 새치름한 시선들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김민지 간호사를 통해 솔로가 많단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근무 스케줄이 수시로 바뀌는 직종이라 누군가를 만나기가 어렵단 얘기도 들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특수소방단도 교대로 근무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솔로 대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아직 말하지 않는 건, 매일 집까지 쫓아와 시위하고도 남을 성격들인 탓이다.
태건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설마요. 저도 이런 소개가 처음이라 테스트 중입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두 사람 좀 잘 엮어 주세요.”
“걱정 마세요. 저희가 그런 건 정말 잘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간호사들은 언제 눈칫밥을 줬냐는 듯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태건도 마주 인사하며 돌아섰다.
‘단체 미팅이라도 한 번 주선할까.’
입원한 단원들의 앞날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움직였다.
그렇게 태건이 승강기를 기다릴 때였다.
띵.
“부단장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김지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다.
태건은 싱겁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안 그래도 못 보고 가나 했는데, 이리 나와.”
“아, 네.”
절뚝, 절뚝.
김지수가 다리를 절며 승강기 밖으로 나왔다.
“이쪽으로.”
태건은 비치된 소파로 안내해 나란히 자리했다.
김지수는 손만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있었다.
“…….”
태건은 그런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황대산에게 했듯이 부끄러워할 말을 꺼내진 않았다.
“뭘 그렇게 쑥스러워해. 알사람 다 아는데.”
“부단장님이 막 형수님이라고 부르고, 절 어려워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었어요.”
“엥?”
태건은 멍한 표정으로 변했다.
역시 라텔 최고의 엉뚱 단원이었다.
태건은 그 걱정의 싹을 단칼에 썰고, 뿌리째 뽑아줬다.
“지수야. 라텔이 먼저야.”
“그러네요. 그럼 걱정할 필요 없네요.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순식간에 해맑아진 김지수를 보며 태건은 왠지 한숨이 먼저 흘러나왔다.
“……하아. 그래. 넌 어때, 재활 잘 돼 가?”
“아니요. 디지게 아파요. 아까도 쌤 멱살 잡을 뻔했어요. 쌤을 때릴 순 없어서 참았어요.”
“잘했다. 정말 장하다.”
태건이 칭찬하자 김지수는 곧이곧대로 받아드렸다.
“제가 좀, 헤헤, 잘해요.”
“선배도 계속 옆에서 간호해준다며. 고맙고, 또 고생시켜서 미안하고, 그러네.”
“제거니까 당연히 해야죠.”
김지수가 티 없이 맑은 눈빛으로 당차게 말했다.
그 모습에 태건은 황대산이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확 와 닿았다.
‘얘……. 순수하네.’
머릿속에 여과 필터가 없는 듯했다.
상대의 말과 행동에 대해 자기 생각을 입히지 않았다.
그런 시선으로 보자 김지수의 모든 행동들이 이해가 됐다.
그런 김지수와 황대산을 나란히 세워본 태건은 순간 크게 웃었다.
“하하. 진짜 골 때리는 커플이네.”
이후로 태건은 김지수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병원을 나섰다.
“진찰은 10분, 병문안은 1시간, 이거 맞아?”
갸웃거리며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온 태건은 침대로 직행했다.
스르륵.
얌전히 누워 이 고요함을 즐겼다.
“세상 조용하네.”
노주민은 어제 숙소로 돌아갔다.
서로 편한 사이라도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쉴 때는 원래 조용해야 맛이다.
어느새 눈을 감은 태건은 그대로 휴식을 취했다.
이틀 후.
태건은 서정민의 전화를 받았다.
기다리고 있던 전화라 얼른 용건을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어려울 거 같습니다.”
“어렵다고요?”
뜻밖의 부정적인 대답에 태건은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서정민도 짐작했는지 쓰게 말했다.
“도시에서 헬리캠의 가동제한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흐음. 그건 제도적인 문제고, 응용 자체는 가능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만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서정민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태건이 귀를 열며 물었다.
“뭡니까?”
“매 현장마다 헬리캠 조종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거야 당연한데……. 아.”
태건은 서정민의 말을 듣고야 오류가 뭔지 알아챘다.
누군가 조종해야 한다는 건 출동인원이 늘어난단 말과 같았다.
지금 헬기 한 대를 꽉 채워 출동 중이다.
추가로 탑승할 자리가 없었다.
태건의 탄식을 들은 서정민이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너무 지휘체계가 늘어나 혼선을 일으킬 수 있단 의견도 있었습니다.”
“맞네요.”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서정민이 정말 미안한 말투였다.
태건은 얼른 그 말을 밀어냈다.
“아닙니다. 제가 멋모르고 부탁한 게 잘못이죠.”
“혹시 몰라서 제 지인들에게 부탁해두긴 했습니다. 그게 성과가 있을진 모르겠지만요.”
“아무튼 고생하셨습니다.”
태건은 의기소침해진 서정민을 달래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탁탁.
휴대폰을 손에 부딪치는 표정이 씁쓸했다.
“이건 예상 밖인데…….”
부스럭.
태건은 소파에 길게 누우며 다시 생각했다.
“흐음.”
까딱, 까딱.
발끝을 까딱거리는 태건의 생각은 길게 이어졌다.
* * *
태건은 의사와 약속한대로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놀랍게도 휴대폰도 조용했다.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박규영 본부장이 연락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차라리 잘 됐어.”
부상 회복을 위해서 가장 좋은 치료법은 휴식이다.
그때부터 태건은 자고 깨고를 반복했다.
그 외에 시간은 티타임도 즐기고 사색에 잠기며 라텔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태건은 요즘 옥상에서 티타임을 즐기는 시간이 늘어났다.
겨울이 지나 봄이 찾아온 이유도 있었다.
선선한 날씨에 캠핑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면 고요함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 사색은 여러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았다.
하루, 또 하루.
그렇게 시간 지나던 어느날이었다.
후릅.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태건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선배들은 단장님과 내가 함께 움직이는 게 나아.”
누가 가르친다고 순순히 배울 이들이 아니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현장에서 엎치락뒤치락 뒹구는 게 가장 나은 발전 방향이라 낙점 지었다.
시간이 흘러 태건이 칩거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자가 격리가 끝난 태건은 의외로 집밖으로 달려 나가지 않았다.
“좀 참자.”
이번에 무리한 게 확실히 증상을 악화시켰다.
몸이 정상을 찾으려면 조금 시간이 더 필요한 상태였다.
그러던 그때 태건의 휴대폰이 울렸다.
띠리릭.
발신자는 이덕찬 반장이었다.
“반장님.”
“그 새끼 잡았어.”
“진짭니까!”
태건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덕찬 반장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태건에게 말했다.
“어젯밤에 최만수 사장이랑 경찰에 넘겼고, 오늘 검찰로 송치됐어.”
“그럼…….”
“그래. 방화를 인정했어.”
이덕찬 반장이 딱 잘라 말했다.
듣고 싶었던 그 말을 듣자 태건의 목소리도 힘이 빡 들어갔다.
“카으!”
“우리는 더 개입할 수 없지만 수사상황 공유해 준다고 했으니까 지켜봐야겠지.”
“고생하셨습니다.”
“말만 하지 말고 약속이나 지켜.”
이덕찬 반장의 목소리가 짓궂게 변했다.
태건은 무슨 약속인지 바로 눈치 채고는 호탕하게 소리쳤다.
“오늘 현장조사반 회식, 저희 옥상식당에 예약되셨습니다!”
“크으. 그 식당주인 시원하니 좋네, 이따 보자고!”
기분 좋은 외침이 휴대폰에 가득 울렸다.
그날 저녁.
옥상 마당에 정말 파티가 열렸다.
커다란 드럼통에 불을 피우고 고기를 한껏 올려 화끈하게 구웠다.
치이익, 후르륵!
뚝뚝 떨어진 기름 탓에 불쇼까지 일어났다.
다들 그걸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우하하. 소방관 집에 불나겠다!”
“그거 뉴스 감 아닙니까!”
왁자지껄.
웃고,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시끌벅적한 회식에 백미인 술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마시는 건 모두 음료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