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사인 (320)화 (320/320)

320화

태건은 끄덕도 하지 않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와튼, 하던 대로 해요.”

“누군데 이렇게 무례하게 전화하는 거지?”

“납니다. 크레이지 건.”

태건은 자신의 첫 번째 닉네임을 말했다.

그 순간 중후한 음성이 경박하게 돌변했다.

“오, 마이, 갓! 그 동안 연락 한 번 안 하고, 너무 한 거 아니야?”

“어차피 소식 다 알잖아요.”

“당연히 알고 있지. 코리아 넘버원 파이어맨그룹 라텔, 콜네임 라면! 푸하하.”

와튼 국장의 웃음소리가 휴대폰 밖까지 흘러나왔다.

태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전화하기 싫었다니까.”

“그쪽에선 조용히 지내겠다더니, 그게 조용한 거였어?”

“왜요. 좀 시끄럽게 지내볼까요?”

태건이 차갑게 반문했다.

평소 연장자에게 살갑게 대하던 모습과 조금 달랐다.

어떻게 보면 공격적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상대의 반응이었다.

그 순간 와튼 국장의 경박한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장난이야, 장난. 한국 일도 바쁜 거 같은데 더 바쁘게 지낼 거 없잖아.”

“잘 지내죠. 못 지내면 말고.”

“그 말투는 여전해.”

와튼 국장의 목소리가 쓰게 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건의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했다.

“됐고, 자료하나 받읍시다. ‘날파리들’.”

“그건 안 돼. 정보보호 걸려 있잖아.”

“안 된다. 오케이. 안되신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럼…….”

태건이 뭔가 말하려 했다.

그 순간 와튼 국장이 재빨리 태세를 바꿨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외부유출은 안 돼. 그건 약속해줘.”

“그럽시다.”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연락해서 고급정보를 달라고 하는 건 좀…….”

와튼 국장이 앓는 소리를 줄줄 이어갔다.

태건은 그걸 모두 들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5분.”

뚝!

다짜고짜 전화를 끊은 태건이 나지막이 한 마디 덧붙였다.

“용건은 간단히.”

국제전화 통화비가 얼만데.

끄덕끄덕.

태건은 말도 안되는 이유를 붙여 스스로 납득했다.

놀라운 건 와튼 국장에게서 어떤 항의 연락도 걸려오지 않았다.

심지어 5분 후.

띠링.

- 전에 쓰던 메일로 보냈어. 비밀번호도 같아. 그리고 가끔 연락 좀 해.

심드렁하게 확인한 태건은 액정의 어느 부분을 눌렀다.

꾹!

- 삭제되었습니다.

태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메시지를 지우고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태건의 노트북엔 영문 보고서가 떠올라 있었다.

-Flying flies

(날파리들)

아까 언급한 그 방화점조직에 관한 보고서였다.

드르륵.

마우스 휠을 굴려가며 보고서를 천천히 훑어봤다. 

그중, 태건의 시선을 잡아끄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들이 정보보호가 걸려 있는 부분들이었다.

“그들이 언제부터 활동했는지 정확히 추적 불가능. 세계적으로 모방범죄가 늘어나고 있음.”

톡, 톡.

태건은 마우스를 두드렸다. 

“진짜 찝찝하네.” 

태건은 일단 이덕찬 반장에게 조사한 걸 공유했다.

물론 문제가 될 내용들은 모두 생략했다.

“……그래서 별로 알아낸 게 없습니다.”

“우연이 겹치길 바라야 된단 거네.”

“그게 지금으로썬 가장 베스트인 거 같습니다.”

태건도 이렇게 말하긴 싫었지만 지금으로썬 어쩔 수 없었다.

이덕찬 반장의 목소리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일단 뭘 어쩌겠어. 아니길 빌자고.”

“네. 그럼 고생하십시오.”

태건은 씁쓸하게 전화를 끊었다.

툭.

휴대폰을 내린 태건은 TV를 틀었다.

TV에서 뭔 소리를 하는지 사실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해 그냥 누가 아무 말이나 떠들란 의미가 짙었다.

-따라라란.

여러 광고가 줄지어 방영됐다.

그 사이 태건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이게 처음이 아닐 수도 있어.’

한 번 의심을 하기 시작하니 꼬리에 꼬리를 물어갔다.

솔직히 그렇게 좋은 습관은 아니었다.

“아으, 털어내자!”

현재 방화는 밝혀냈고 범인도 잡았다.

그럼 된 거 아닌가.

휙휙.

태건은 가볍게 팔을 휘두르며 찝찝함을 털어냈다.

그때 마침 TV에서 뉴스가 방영됐다.

첫 소식을 전하는 앵커 목소리가 태건의 귀를 강하게 자극했다.

쫑긋!

-뉴스입니다. 오늘 풍암광업소에 고소장이 접수되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현장 취재 영상으로 전해드리겠습니다.

화면이 바뀌며 법원을 배경으로 내레이션이 시작됐다.

“풍암?”

띡띡.

태건은 재빨리 리모컨으로 볼륨을 키웠다.

마침 시작되는 내레이션은 너무도 익숙한 이강찬 기자의 목소리였다.

-지난 인제 폐광 붕괴사고에 대한 고소장이 금일 법원에 접수되었습니다.

또 한 번 화면이 바뀌었다.

법원 현관 앞에 기자들이 즐비한 모습이다.

그 앞에 낯익은 태광 법무법인 변호사가 서류봉투를 내보이며 서 있었다.

유학제 변호사.

40대 중반의 금색 안경이 돋보이는 학자풍의 인상이었다.

서정민의 일로 잠깐 만났던 그때, 그 변호사였다.

이내 그의 짤막한 인터뷰도 이어졌다.

-풍암과 관련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위법 사례들이 발견되어 소장을 접수하게 되었습니다.

화면이 이강찬 기자의 얼굴을 비추며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을 전달했다.

-풍암 측에서도 맞고소를 준비 중으로 밝혀져 본격적인 법적공방이 예상됩니다.

-법원 측은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사건인 만큼 공정하고 엄중한 판결에 심혈을 기울일 거라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지금까지 법원에서 SBC 이강찬 기자였습니다.

거기까지 공식적인 취재 영상이 방영됐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강찬 기자는 툭하니 마이크를 내리며 카메라 기자를 향해 어이없어 했다.

-야, 맞고소가 말이 되냐. 그 새끼들 미친…….

욕설이 터져 나온 그 절묘한 타이밍에 화면이 데스크로 넘어왔다.

그리고 앵커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영상편집과 송출에 문제가 있었던 점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그럼 다음 소식입니다…….

너무 자연스럽게 다음 뉴스로 화제가 전환됐다.

그걸 가만히 지켜본 태건이 헛웃음을 뿌렸다.

“파하. 이게 어떻게 실수야.”

절레절레.

태건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걸로 모자라 앞에 둔 휴대폰을 얼른 집어들어 이강찬 기자에게 전화했다.

“이 기자님, 어떻게 공중파 뉴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언론중재위원회에서 경고장 씨게 날아올 거 같습니다.”

“엄청 큰 실수하신 거 치고는 너무 태연하신데요?”

“뭐 어쩝니까. 이미 방송 나간 걸, 할 수 없죠.”

이강찬 기자의 대꾸가 너무도 뻔뻔했다.

태건은 휴대폰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들은 라텔, 자신들이었다.

“그런데 왜 아무런 말이 없지?”

중상 아니, 생사를 오간 단원들이 몇 명인지 모른다.

보상 혹은 위로금에 대한 얘기가 전혀 없었다.

슥슥.

팔을 걷어붙인 태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태건은 휴대폰을 다시 집으려다 멈칫했다.

“뭔 골방에 박혀서 전화통만 붙들고 있냐!”

자가 격리가 끝난 시점이다.

안 그래도 마음 답답한데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태건은 작은 방으로 향하며 유학제 변호사에게 전화했다.

“유 변호사님,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서울 근교의 어느 전원카페.

야외테이블에 자리한 태건은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속이 좀 뚫리네.”

시원한 생과일 쥬스까지 더 하자 속에 끓는 열이 많이 내려갔다.

확실히 집안에 계속 있었으면 많이 답답했을 터였다.

그렇게 경치를 감상하던 중이었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들리더니 반듯한 옷차림에 서류가방을 든 유학제 변호사가 도착했다.

“이렇게 따로 뵙는 건 처음이네요.”

“멀리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별 말씀요.”

꾸욱.

악수부터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태건은 미리 주문한 음료를 권하며 말했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 무난한 걸로 주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말씀하셨던 것들입니다.”

스윽.

유학제 변호사가 얇은 서류철을 건네줬다.

소송내용의 요약본이었다.

태건은 받아들고 차분하게 확인했다.

사락사락.

한 장씩 넘길수록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흐음.”

불편한 신음까지 흘리자 유학제 변호사가 넌지시 물었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습니까?”

“역시나 저희는 보상대상에 포함이 안 되는 거네요.”

“그거야 당연히…….”

유학제 변호사가 꺼낸 그 말이 태건의 심기를 딱 건드렸다.

“당연하다. 다시 말해 라텔은 소방공무원이니까 뒤지기 직전까지 내몰리는 중상도 니 팔자소관이다.”

“저기 그런 의미로 해석하시면 제가…….”

“아니요. 유 변호사한테 뭐라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엿 같은 시스템을 비판하는 겁니다.”

태건이 분명 비난의 주체를 언급했지만 유학제 변호사는 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톡톡.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사뭇 긴장했다.

“저기 그러니까, 크흠. 부단장님. 어…….”

유학제 변호사는 살짝 넥타이를 내려가며 답했다.

태건 머리가 복잡해졌다. 

지금 라텔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출동영상을 분석하며 알게 됐다.

현장에 출동하는 걸 두려워하는 단원은 없다.

전과 똑같이 적극적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임이 있었다.

겉으로 봐선 알 수가 없다.

정말 평소와 똑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같이 훈련하고, 또 직접 교육한 태건은 미묘한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두려움이 생겼어.’

그 두려움의 시작은 역시 이번 지반붕괴 사고였다.

지금도 단원들은 ‘풍암’이란 단어를 아예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입원 혹은 병가 중인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부상이 두려운 게 아니다.

부상 후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냥 부상으로 끝이다.

그에 따른 적절한 금전적인 지원이나 보상이 없었다.

다시 현장에서 거침없이 활개치고 싶은 계기나 원동력이 없단 의미와 같았다.

이건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다.

‘만약 누군가 현장에서 죽는다면 그건 개죽음이잖아.’

그런데 누구에게 불속으로 뛰어들라고 할 건가.

태건 본인도 생각할수록 고개가 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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