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화 〉1. 퇴사 (1/21)



〈 1화 〉1. 퇴사

[댓글 12]

[요즘 네풀락스 ㅈㄴ 볼 거 없네. 니들은 뭐 쓰냐?]
[뮤지엄 ← 여기 볼 거 많음.]
[ㄹㅇ 뮤지엄 멤버십 가격도 싸고 볼  많더라오리지널도 한다던데]
[뮤지엄은 방송기능 때문에 보는 거지]
[오리지널은 시발 ㅋㅋㅋ 개 망할 듯. 걍 영화나  추가하지 방송 개꿀이라  거  쓰긴 할건데.]



“…이번 달도 문제는 없겠구나.”

늘어난 이용자 수, 결제 금액, 그리고 인터넷 상에서의 인지도.
모든 지표가 1개월 전과 비교했을 때 문외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연히 늘어났다.

뮤지엄.

내가 소속되어 있는 회사, 이른바 스타트업이라고 불리는 벤처기업이다.

한 대학의 영화 동아리에서 시작되어서 영화를 리뷰하는 작은 사이트로 변화한 이 기업은 어느 순간 기능을 하나 둘 추가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각종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까지 모두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중형 OTT 사이트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언택트 시대에 힘입어 다양한 OTT 서비스가 난립하는 지금, 뮤지엄이 차별화되어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방송 시스템.

사 측에서 공식적으로 영화를 스트리밍 하고 사용자들이 그것을 보며 채팅창으로 자신의 의견을 실시간으로 전달할 수 있는 이 간단한 서비스는 입소문을 타고 순식간에 인터넷에 퍼져 뮤지엄을 끌어올린 일등 공신이 되었다.가난했던 대학 시절, 극장도 가지 못하고 작은 인터넷 방송 사이트에서 불법으로 영화를 스트리밍하는 것을 보며 채팅을 치고 놀던 것이 생각나 도입해 본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반향을 얻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들 같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리라. 혹자는 소통욕구야 말로 인류 역사의 원동력이라고 말하지들 않았던가. 아무튼 사측은 이 폭발적인 성장세를 바탕으로 이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대형 영화사들의 유명 콘텐츠들을 독점적으로 체결하고 스폰서의 폭을 넓히며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빡빡
문질문질

“이걸로 오늘 해야 할 일도  끝난 건가.”

…다 떨어져가는 대걸레를 들고 바닥에 떨어진 커피자국을 지우고 있었다.

일처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11시의 사무실, 일단은 정사원의 신분인 내가 탕비실   구석에서 걸레질을 하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와 대조되듯 사무실의 중앙에서는 다른 직원들의, 그녀들의 분주한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온다.

“가련아, 어제 회의에서 말한 그 시스템, 구현할  있을 것 같아?”
“네, 네. 어렵지 않게 구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솜이 언니! 말씀드렸던 계약 건은요?”
“어, 방금 연락해서 끝내놨어. 다음 달부터는 우리 사이트에서 그 회사 영화 수 있을 거야. 설하야, 민서가 곧 이번 분기 재무제표 정리해서 올린다고 했으니까 그거 보고 로드맵 좀 짜줘.”

분명히 시작은 영화 동아리였을 것이다.
망해가는 동아리의 회장직을 내가 물려받고 혼신을 건 홍보를 해서 어떻게든 사람들을 끌어 모았었다. 그리고 동아리 활동이 너무 즐거워서, 사람들과 같이 영화보고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몹시 행복해서 이 기분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자 영화를 추천해주는 사이트를 만들자고 했을 텐데.

“야, 유도진! 할  없으면 이거 가지고가서 파쇄나 해.”
“형, 그거 하는 김에 정수기 물도 갈아주세요. 놀지만 마시고요.”
“하여간  새끼는 언제까지 저 짓거리 해 먹을련지, 지가 야부리를 잘 털긴 뭐가 잘 털어? 정으로 봐주는 것도  두 번이지, 한심해서 원.”
“도진아, 그러게 누나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너는 그냥 그렇게 회사에 앉아서 가끔 바닥정도만 청소하면 되는 거야.  끝나곤 누나 어깨도 좀 주물러주고.”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야, 시발 유도진! 내   들려? 능력도 없는 거 정으로 안 짜르고 있더니 사장이 만만해? 빨리빨리 해!”

그녀는 분명 회사를 만들자고 했던 나에게 모두가 평등하고 차별받지 않는 수평적 조직 구조로 만드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사장이라는 직함으로 날 압박하고 자신이원하는 일을 강요하려 하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그녀를 사장으로 임명했던 것은 그녀-설하가 로드맵과 같은 회사의 전반적인 계획을 세밀하게 짤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가졌고 사원들 중 가장 웅변능력이 뛰어나니 대외적인이미지를 위해서 그런 것이었을 텐데.

“하아…”
“한숨? 지금   듣고 한숨 쉰 거야? 야, 야!”
“하여간 형, 능력이 없으면 말이라도 잘하셔야지 이제는 대놓고…”



이제는 한물간 20대 중후반의 남성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나도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알고, 재무제표를 정리할 능력과 자격증이 있으며 계약과 같은 웅변능력과 접대능력이필요한 업무도 결코 문제없이 소화해낼 수 있는 데다 설하만큼은 아니지만 회사의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할만한시야도 조금은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원들처럼 한 업무에 특화된 전문가는 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도움은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자신은 남아있다.

하지만 전부 의미 없는 짓일 뿐. 내가 무엇을 시도하던주변 사람들은 나를 무능하다고 매도하고 조그마한 성과조차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6개월정도가 지났을 무렵, 내 일은 사무실 구석의 탕비실에서 걸레질을 하면서 때때로 다른 사원들의 커피를 타주면서 가볍게 마사지를 해주는, 그런 괴롭힘 같은 업무의 연속이 되어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나 스스로도 내가 정말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해서…내가 능력이 있었다면 상식적으로 이런 처우를 받을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어제는  불안감이 절정에 달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는 먼지만 쌓여 흉물이 되어버린 내 자리의 컴퓨터를 키고 미친 듯이 회사 측에게 해줄 일이 없는지 찾아보는 내가 있었다. 평소였으면 다른 사원들의, 그 섬뜩한 시선에 주눅 들어 포기했었을 텐데 그날은 유독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먼지가 쌓여 누레진 컴퓨터 액정의 안에서 내 존재를 계속 찾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노력이 결실을 맺어  마케팅 회사와 광고 계약을 체결할  있었으나 내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시선과 불신의 눈초리, 그리고 평소보다 한층 공격적으로 변한 회사 동료들의 태도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동료들에게는 닿지 않고, 닿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도, 결코 존재하지 않으리라.

마치 백조들 사이에 낀 미운 오리 새끼와도 같이 말이다.
오리 새끼, 그래. 그것은  회사에서의 나를 말하기에 아주 적합한 비유였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뮤지엄은 나를 제외하고는 전원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외적으로 사장을 맡고 있으면서 회사의 전반적인 계획을 짜는설하, 프로그래밍을 맡고 있는 가련이, 영화사와 계약을 담당하고 있는 다솜이 누나, 마지막으로 회계 관련 업무를 전담하고 있는 민서. 즐거웠던 대학의 영화 동아리 시절, 즐겁게 영화를 보고 웃음꽃을 피우며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학우들은 이제 백조 사이에 낀 오리 새끼를 보듯 내 얼굴만 봐도 얼굴을 붉히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는 쓸쓸한 관계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래서 시발, 너 아까 후챈 기획 갔다 왔다는 거지? 개인적인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회사 업무로.”
“그래 설하야,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냥 앉아만 있으려니까 눈치가 보여서 광고 쪽으로 뭐 알아볼 거라도 있나 메일을 보내 봤더니 그쪽에서 만나서 이야기해보자고 해서 간 게 전부야.”
“…회, 회사에서는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

한 때는 최고의 이해자이자 동반자, 그리고 친우이던 설하에게 느끼는  박탈감은 더욱 심해서 그녀가 나에게 이런 식으로 트집을 잡거나 남들에게는 결코 하지 않을 천박한 욕을, 오직 나에게만 할 때 그것은 점점 마음  깊은 곳에서 몸집을 불려 내 몸 전체를 우울함으로 가득 채우기 일쑤였다.

“…그래서 여자였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만났다는 그 디자인 부서 팀장, 여자였냐고 물어보잖아, 시발!”

여자면 어떠하고 남자면 어떠하다는 말인가. 도무지 설하, 아니 사장님이 그런 사소한 것에 왜 의문을 가지시는지 나의 작은 식견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 내가 무언가를 잘못해서 사장님의 심기를 건들이라도 한 걸까.

“…도진이 형, 우리는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여자 만나고 온 거에요?”

사장님에게 동조하듯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나지막하게 나를 추궁하는 듯한 말을 하는 가련이. 동아리 시절에는 오빠라고 불러주며 내가 어디를 가건 졸졸 따라다니며 살갑게 따라주는 아이었던 그녀는 언젠가부터는 호칭도 형으로 바꾸고 나에게 냉담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속상해서, 또 다시 내가 무언가잘못한 것인가 싶어서.

“…가련아, 이제 형이라고 부르는 것 좀  해줄 수 없겠니. 그냥, 예전처럼…”
"됐고요. 여자 만나시고 온 거냐고 물어보잖아요."

그녀는, 가련이는 매번 답해주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잘 못 했는지…

“…여자였어. 여자는 맞는데 그냥 별 이야기  했어. 그저 어떤 방식으로 광고를 내보낼지, 어떤 스타일로디자인을 할 지 의견을 나눈 것뿐이야.”

순간 쾅, 하고 사장님이 책상을 강하게 내려찍는 소리가 내 고막을 강타했다.

“여자? 여자 만난  맞잖아!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회사에 가만히 있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틈만 나면 그렇게 여자 여자 못 밝혀서 안달인데?”
“설하 말이 맞아. 도진아, 요즘 같은 시대에 여자 문제로 고발이라도 당하면 회사 이미지가 실추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누나가 누누이 말하고 있었을 텐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죄송합니다.

이제는 언제인지기억조차 나지 않는 과거, 회사를 위해 내가 열심히 일하고 있을 무렵에도 동료들은 언제나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보다도 그곳에 여자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만 신경 쓰고 있었지. 아마 그녀들 입장에서는 무능한 내가 여자와 놀러 다닌다고만 생각해 상당히 눈에 거슬렸을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정말로 회사를 위해 나가서 내가  수 있는 일을했을 뿐이고 거기에 우연히 여자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말은 언제나 닿지 않아서…이제는 회사 건물 1층의 카페에서도, 점심을 먹으러 음식점에 갔을 때도 가시방석에 앉은 듯 그저 바닥에 시선을 처박은  벌받는 아이처럼 가만히 있어야 하는 상황에 다다랐다. 왜냐면, 어쩌다가 그 곳에 여자가 있고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동료들이 경멸과 태워버릴 듯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볼 것이분명하니까. 게다가…

“뭐- 됐잖아. 어차피 도진이-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니까…내가 뭐, 밥이라도 안 주지 뭐-.”
“아, 그러면 되겠다. 말 한번 잘했다, 민서야. 들었지 유도진?  번만 더 그러면 우리집에 와서도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이제는 통근으로 낭비되는 시간을 줄이겠다는 이유로 나는 매일 밤 동료들의 집에 하루씩 돌아가면서 머물러야 하는, 그야말로 자유라고는 존재하지않는 생활을 강요받고 있었다. 그것이 속상해 통근 시간이 문제이면 회사 근처에 나도 집을 구하겠다고 했더니 사회 초년생 주제에 벌써부터 돈을 낭비할 심산이냐는 조소와 만약 네가 그러더라도 혼자 살다가 성욕 때문에 룸살롱이나 원나잇 같은 저속한 성 추문을 일으킬지 누가 알겠냐는 불신 가득한 면박만을 받았다.

나를, 그렇게나 믿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그 정도로…못 난 인간이라는 것일까.

그 경고를 증명하듯 그녀들은 집에서도 나를 요리 연습의 피험자로 쓰려 하거나 소파에 앉아 쉬려고 해도 사회 이슈나 가십 거리와 같은 관심 없는 이야깃거리로 나의 휴식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방해받지 않아야  수면조차도, 이불값을 낭비하고 싶지 않고 감시를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좁은 침대에서 같이 자야 한다고 주장을하며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마치 말을 듣지 않는 발정기의 애완견을 조련하듯 나의 모든 자유를 박탈하고 유린해갔다.

…아마 그녀들이 나를 조금이라도이성으로서 의식하고 있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그랬다면 적어도 저런 명목으로 나를 구속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  날부터, 이미 질리도록 알아온 사실이었지만 남성성을 박탈당하고 부정당하고 이렇게 모든 것을 관리 받아야 하는 무능한 애완견으로서 산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설하 언니. 저번에 저 파견근무 나갔을  형, 언니 집으로 갔다면서요. 그러면 내일은 우리 집으로 오는 게 맞지 않아요?”
“뭐? 안 돼, 안 돼. 가련아, 파견 근무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지급했잖아? 그거랑 이거는 별개라고.”

정말로 나의 의사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구나.

그날의 약속 하나로 버텨왔던 회사지만 이런 생활도 1년이나 지속하다 보면 지칠 수밖에 없었다. 매일매일 나는 출근할 때마다 나의 무능함과 비참함을 재자각해야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그것은 동료들, 그녀들에 대한 열등감으로 발전해나갔다.

나는 왜 회사를 만들자고 했던 것일까?
나는 그저…

“저-정말, 흑, 재밌어요. 왜-왜 이 영화가 안 뜬 거지?”
“맞아요 오빠.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는 난생처음...”


나는 그저 영화가 좋았을 뿐이다.
너희와 함께 영화를 즐겁게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남들에게도  감정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인데…
이제 나는 업무에서 배제되어 탕비실의 커피 자국을 닦는 것이 전부인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구나.
내 능력이 부족해서 너희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구나.
…정말로?

“…”

그녀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만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인생이긴 하다.
집도, 밥도, 돈도 모두 그녀들이 제공해 준다.
그저 조금, 자기 자신을 부정당하고 애완동물로서 사역당하고 관리 당하는 일상을 보낼 뿐이다.언제까지나, 쭉.

이건,
이건 아니다.
이건 내가 바래 왔던 인생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다.
나는…

“야, 야, 유, 유도진, 뭐, 뭘 꼬라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어? 사, 사람 부끄럽게…”

동료들의 말대로 나는 무능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가능성이 모두 박탈되어야 하는 근거는 되지는 못한다.

도전하고 싶다.
내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제는 식어버린  마음 속의 결의가 머리 속을 휘 저었다. 어쩌면 이제는 지친 걸지도 모른다.  상황도, 소중했던 동료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던 나에게도…
아니…

“내가 물어보고 있잖아, 유도진! 대, 대답하라고 시발!”

이건 분노다.
잔뜩 밟혀오고 내 마음을 철저히 부정한 동료들 아니, 그녀들에 대한.
나는 회사에 도움이 되고 싶었고 내가   있는 최선의 일을 다 해왔다.
너희들이 잠들었을 때 남몰래 책과 동영상 사이트를 키며 공부를 해왔다.
그런 내 노력을 보지 않으려 한 것은, 날 무능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너희다.
나는…틀리지 않았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 책상 안 쪽 고이 모셔둔, 결코  일이 없을  알았던 하나의 봉투를 꺼내 들었다.

그래, 이제는.

“어, 형. 그거 뭐에요? 서, 설마 편지? 누, 누구한테 주는 건데요?”
“뭐? 펴, 편지? 갑자기 왜. 아, 아. 정말이지... 어젯밤 피자 사준 건 그냥 편하게 넘어가라고 했잖아~. 누나가 동생한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니까.”

이제는 지친다.

나는 서랍에서 꺼낸 그 봉투를, 사직서가 든 봉투를 들고 존경받아 마땅할 나의 자랑스러운 사장님의, 설하의 곁으로 다가갔다.

내 인격을 부정당하는 것도.
나를 발정 난 호색한으로 보는 너희의 경멸 어린 눈초리에 시달리는 것도.
나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도.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

“뭐, 뭐야, 뭐야 시발, 갑자기… 유도진, 여기 회사야! 미, 미친 것 아냐?줄려면 조, 좀 더 분위기가 있는 곳에서, 그러니까 두, 둘이서만 있는 곳에서…”

그렇게 나는 담담하게 긴 인연의 끝을 상징하는 봉투를 그녀에게 건넸다.

“뜯어봐.”
“뭐, 뭐야, 갑자기. 무섭게. 읏…”

애완견 따위에게 그런 말투로 재촉당해서 화라도 난 것일까. 얼굴을 붉히며 하얀 봉투를 척척 뜯어가는 설하의 표정은 이내 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너, 너 이게 뭐야. 사, 사직서? 그만둔다고? 장난이지? 이거. 하하, 존나 재미없거든.”
“마, 맞아요. 형. 진짜 재미없네요. 맥락도 없는 개그 치지 마시라니까요.”
“도진아-. 그런 장난 치지 말고…오늘 집에 가서…뭘 먹을지나 이야기해보자-. 안 준다는 건 농담ㅡ이었으니까…”

농담, 그리고 장난.
내 작은 반란은 그녀들에 의해 그렇게 진압되어 가고 있었다.
너희들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는 그런, 길가의 돌 같은 존재에불과했구나.

그녀들에게 바라왔던… 이제 조금은, 나를 돌아봐 줬으면 하는 바람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마음의 불씨가 완전히 꺼져가는 것을 느껴졌다.
그날, 눈 오는 밤에도 꺼지지 않았던 나의 마지막 불씨가…

“…정말로 그만둘 거야.”
“왜, 왜 그래 갑자기!  갑자기 그만둔다는 건데! 도, 돈 때문에 그래? 월급 올려 줄게! 업무가 빡세서 그런 거면 정말 아무것도 안 시킬게! 그냥 회사 나와서 얼굴만 비추고 바로 퇴근해도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이, 이건 없는 걸로 할게?”

내가 바라는 건 그런  아니야.

“그만둔다고 했잖아.”
“아, 안 돼!이런 거 수리 안 해. 절대로 안 해! 계약 위반이야! 너, 너. 이대로 나가면 업계에 소문 다 낼 거야. 재취업 따위는 꿈도 못 꾸게 할 거라고, 그러니까 시발, 빨리 이거 가져가라고!”

질리도록 들어온 협박. 여느 때와 같이 그녀는 또다시 나를 협박하고 관리하려 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마음이 꺾이고 말았겠지. 불과 하루 탕비실에서 열심히 걸레질을 하고 있을 때만 해도…나의 계약이, 노력이 부정당하는 그 직전까지도 너희를 믿고 싶었다. 너희가 나를 봐주길 원했다. 너희가 나를, 인정해주기를 바랐다. 나를 나로서.

너희가 나를 그렇게 취급할 권리는 조금도 없어.
설령…내가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가면 부동산에 들러 매물이 있나 알아보자. 옷도, 짐도 전부 새로 구매하자. 잠은 당분간 찜질방에서 자면 되고 그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쉬자. 그냥 지금은 이 여자들에게 벗어나기만 하자. 그렇게만 한다면…

그렇게만 한다면,
뭔가 시작할  있지 않을까.
이런 나라도 다시.

“잘 있어.”

그러니까, 안녕.

“야, 야! 거기서! 야!”
“혀, 형!”
“도, 도진아! 재밌으니까 이제 돌아와. 누, 누나 재밌다니까?”
“도진아-.빨리- 와서ㅡ. 오늘 반찬…”

1년동안 열어오고 닫아온 사무실의 철제 문이 쾅하는 소리와 함께그녀들과 나의 공간을 갈라낸다.

오늘 나는.
내가 만들고, 내가 키워온… 정든 회사를 떠났다.
나를 다시 한번 사랑해보고 싶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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