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화 〉6. 협상 (6/21)



〈 6화 〉6. 협상

부우웅
부웅! 부우우우웅!

“아저씨…?”
“괜찮아.”

상황을 정리해보자.
하나, 나는 그녀들의 번호를 차단했다.
둘, 그녀들은 다른 번호를 써서 나에게 다시 연락했다.
셋, 그래서 번호를, 심지어 통신사까지 바꿨다.
넷, 그런데도 그녀들은 여전히 나에게 연락을 하고 있다.

정리할 것도 없이 그녀들이 내 바뀐 번호를 알아낼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번호를 한 번 더 바꿔도 마찬가지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가련이는 내가 자주 쓰는 아이디와 비밀번호,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를 외우고 있다.

“하아.”
“손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조금은요.

“이거 전화번호 변경 내역을 알아볼  있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요?”
“어, 그게. 잠시만요. 아마 통신사 홈페이지에서 로그인 하시고 본인인증하시면 조회되실 거예요.”


흔히들 보안을 위해 사이트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따로 맞추는 것이 좋다고들 하지만 나는 기억력이 나쁜 관계로, 아니…솔직히 귀찮았기 때문에 10년동안 같은 아이디와 비밀번호로 각종 포털 사이트와 게임, 어플리케이션 서비스를 이용해왔다.

아까 통신사 변경할 때도 똑같은 계정 정보로 가입했으니,  주민등록번호까지 알고 있는 가련이가 나의 번호변경 이력을 조회하는 것은 누워서  먹기보다 쉬웠겠지. 본인 인증은 굳이 휴대폰이 없어도 메일주소로도 가능하니까.

으음, 엎질러진 물, 차분하게 어떻게 해결할지를 생각해보자. 우선 주민등록번호를 바꿔야 하나…동사무소에서 바꿔주기는 하는 걸까? 아니면 지금까지 써온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이 우선일까.

잠깐만.

분명히…
비트코인 거래소 앱도 똑같은 아이디로 가입했었지.

“…”

아마 내 피해망상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어느때보다 빠르게 팝업창을 지우며 스마트폰을 조작해 다운 받아 놓은 거래소 앱을 실행시켰다. 로그인을 하면 비밀번호부터 바꾸는 것이 좋겠지.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지만 미리 대비해서 손해볼 것은 없으리라.

<로그인 시도가 10번 이상 실패하여 1일간 차단  아이디입니다.>

“…….”
“아저씨, 아저씨? 진짜 괜찮으신 것 맞으세요? 얼굴이 새 파랗잖아요. 아침에 김밥 먹은 게 상했었나?”

침착하자. 그냥 내가 본인 인증을 해서 비밀번호를 초기화하면 로그인 제한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안되더라도 이 거래소를 관리하는 사측에 전화를 해서 본인임을 인증하면 되겠지. 저 쪽이  개인 정보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유리한 것은 본인인 나다.

전화부터 걸어볼까.

부우우웅…
부웅…!

[전화 - 010-61XX-XXXX]
[010-41XX-XXXX]
도진아 제발 답장  
[010-41XX-XXXX]
목소리라도 들려줘
[010-78XX-XXXX]
시발놈아, 안 받는다 이거지?

아아,
 됐지.

그렇다면 대리점 직원분의 휴대폰을 빌려 전화를 해보는 것이 좋을까. 아니, 결국 출금을 할 때는 내 휴대폰으로 본인 인증을 하게 되어 있다. 그나저나 너무 하는군. 이쪽은 너희들에게 모든 것을 박탈당해 이미 너덜너덜하게 된 상태인데 이제는 소중한 코인까지 저당 잡으려 하는구나.

조금, 참고 있던 울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전화 - 010-61XX-XXXX]
[010-61XX-XXXX]

[010-61XX-XXXX]
슬슬 눈치채셨겠지만 받으시는 게 좋을 걸요?
[010-61XX-XXXX]
출금은  되지만 다른 코인에 싹 다 꼬라 박을  있다는 건 알고 계실  아니에요.
[010-61XX-XXXX]
이상한 코인 풀 매수하고 또 오늘처럼 로그인 잠그면 진짜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010-61XX-XXXX]
궁금하면 내일 형이 먼저 로그인하나 제가 먼저 로그인 하나
[010-61XX-XXXX]
한번 겨뤄 보시던가요.

“…”

유가련.

출중한 외모를 가진 여인들밖에 없는 뮤지엄 안에서도 단연코 가장 아름답다고 말할  있는, 새하얀 은발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를 오빠라고 불러줬던 러시아계인 어머니의 피와 한국계 아버지의 피가 섞인 여자아이.

외모뿐만 아니라 컴퓨터 공학 쪽의 재능도 출중해 지금은 수많은 프로그래밍 업무를 혼자서 담당하고 있는, 그야말로 부조리함의 결정체라고 불릴만한 존재. 그리고 그런 그녀는 게임을 아주 좋아해서…대학 시절에는함께 피시방도 다니며 다양한게임을 즐겼었다. 대부분 나의 패배였지만.

“…”

또 다시, 가련이와 게임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야.”
“네, 네?”
“미안한데 잠깐 나가서 통화 좀 하고 올게. 볼 일이 조금 생겼거든. 여기 앉아서 휴대폰이라도 만지고 있어.”
“아, 알았어요. 그러니까 표정 좀 푸세요. 무서워요.”

그 아이는, 여름이는 내 말을 듣고 평소처럼 까불거나 비꼬는 말 없이 순순히 말을 들어줬다. 조금은 내 상황을 눈치채준 것일까.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아무런 죄가 없는 어린아이에게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까부터 조금씩 올라오는 감정을 참아가며 대리점의 유리 벽을 열고 나온 나는 그 즉시그녀, 가련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
“용건은?”
“읏, 형, 형 맞죠. 도진이 형.”

전화를 받은 가련이의 목소리는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짜증이라도 난 것일까. 적어도 너만은 나에게 그런 태도를 보여선 안 될 것이다.

“가련아, 용건만 말하자. 뭘 원하는 건데.”
“…회사로 돌아오세요.”
“뭐?”
“출근하시라고요. 오늘 출근 안 하셨잖아요. 덕분에 완전 엉망이라구요, 여기는. 바닥도 더럽고 정수기 물도 다 떨어졌고, 오빠 냄새도 슬슬…”

이해할  없다.
나는 이미 퇴사를 한 사람이다.
너는, 너희들은 그 장면을 똑똑히 봤을 터인데.

“나는 이미 퇴사했어. 이틀 전에 설하의, 아니 사장님의 앞에서 사직서를 제출했었으니까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겠지. 너희들도 그것을 봤을 텐데. 이미 끝난 이야기를 가지고 왜 이렇게 연락을 하는 거지?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왜 그래요.형도 그날 장난치신 거잖아요. 네?”

장난이라.
회사에 출근해서 제대로 된 일도 받지 못하고 다 뜯어져 가는 대걸레로 복도를 닦고, 정수기의 물을 갈고. 잠재적 성 범죄자인 무능한 인간 취급을 받으며 어디 나갈 때마다 시선을 바닥으로 고정시켜야 했고 너희들에게 내 모든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하고관리 당했던.

너희에게 살가운 말 한 마디조차 받지 못했던…
그런생활이 장난이었구나.

“일단 출근하셔서 마저 이야기해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까, 네?”
“안 가.”
“네?”
“가련아, 나는 너희들이 바랬으니까 퇴사한 거야. 너희들이  마음을 짓밟고 우롱했으니까.그래서 나온 거야.”

…난 대체 너희들에게 어떤 존재였던 걸까.

“네? 형, 그게 무슨 소리세요? 우롱은 형이 먼저 하셨잖아요? 저희는 이렇게나 형을 신경 써 드리는  매일매일 여자나 만나시고, 만날 궁리만 하시고. 어디 가기라도 하면 계속 여자만 쳐다보고…”
“뭐?”
“그리고 형, 형이 후챈 기획이랑 계약 따 놓고 잠수 타셔서 지금 완전 엉망이거든요? 인수인계도 제대로  해놓고 그렇게 가버리시면 안 되죠. 이 쪽은 신용이 생명인 업계인데.”

분명히.
 날 아침, 계약을 따 두긴 했었다.
먼지가 쌓인 누렇게 변색된 모니터와  쳐지지도 않는 키보드를 이용해 메일을 보내고, 잠을 쪼개가며 미팅 자료를 준비해서 겨우겨우 따 낸,  계약이.
너희들에게 모조리 부정당한 그 계약이.

“사직이고 뭐고 일단 출근하셔서 그거라도 해결하세요. 그건진짜 형이 없으면 해결이 안 되는 문제니까. 벌려 놨으면 수습은 하셔야 할 것 아니에요?”
“…”

이제 와서…

“그리고 문자 보셨죠? 그, 요즘 멍멍코인이라는  유행한다던데 그거나 내일 잔뜩 사버릴까 싶어요. 혹시 알아요?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갈지? 그냥 1일만-아니다. 내일 또 실패하면 3일 잠기겠구나. 그래요. 3일동안만 확인 못하는 거라고요.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이제 와서 그럴 것이라면, 나는  날 아침에 너희들이 내 성과를 인정해주기를 바랬다.
나도 뭔가 따내면 다시, 예전처럼 너희에게 인정을 받고 업무를 도와주고.
또 다시 뮤지엄의 당당한 정사원으로서 회사에 기여할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그 날의약속을…

 노력을 무시한 건 너희들이면서 왜 이제 와서.

“출근만 하시면 그런 짓 안 할 테니까 일단회사로 오세요. 뭐, 경찰에 신고해보시던지요. 배상 판결이 확정되는  언제쯤일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그런 식으로 계속 협박을 한다면 신고는 당연히  것이다. 지금 너희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배상도 소송으로 똑똑히 받아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먹힌  시간은, 고통은 결코 돌아오지 않겠지만. 너희들과 보냈던 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기에 퇴사를 한 뒤에도 마음  구석에 남겨뒀던 애뜻한 감정을, 이리도 산산조각 내버리는 것은 정말로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냐.

…정말로.
정말로 이제는 날 봐주지 않는 거니.
내가 무슨 말을 하건, 내가 무슨 표정을 짓건…

“가련아.”
“네?”
“출근할게.”
“…뭐라고요?”

아무래도 그 날의 말로는 부족했던 것 같으니까.
이제는 끝내자,  지긋지긋하고도 잘못된 인연을.

“아, 아무런 조건 없이요? 뭐, 그…돈의 50%를 미리 입금하라던가 그런  있잖아요.”

조건이라.

“조건이라면 있어.”
“저, 정말요. 말씀만 해주시면 뭐든지…”
“회사에 출근하면 내 이야기를 들어줘.”
“네…?”

우리들의 관계는 이미 파탄 났다.
그래도 마지막 이별만큼은, 나의 소중한 친구들과의 이별만큼은…
제대로 매듭짓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런 하찮은 거래소의 계정 따위를 가지고 협박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믿지도 않거든. 내가 회사에 출근했을 때 돌려줄지  돌려줄지 누가 알겠어. 너도 알잖아. 그런 걸로 협박해봤자 내가 모든연락을 끊고 잠적하면서 소송을 진행하면 최후에 지는 건 너희들이라는 것을.”
"…이 망할 회사일만 아니면 언젠가는 찾아 낼걸요."
“뭐?”
“아, 아니에요. 하아, 알았어요.  말대로 급한 건 저희 쪽이니까요. 계약이야 그렇다 쳐도 오빠의 냄새를 몇 개월이나 더 못 맡을  생각하니 엄청나게 짜증난다구요."
“가련아,  안 들려. 조금 더 크게 이야기 해줄래?”

통화품질이 좋지 않은 것일까.

“…아무튼 알았어요. 알겠다고요. 무슨 속셈이신지는 모르지만 그냥, 출근만해주세요. 그리고 계약만 끝내주세요. 거래소 계정도 지금 다시 돌려드릴 테니까...”
“그래. 정말로 그 계약 건만 해결하고 끝인 거야.  이미 퇴사했으니까.”
“…일단은 그런 걸로 치자고요. 내일 바로 오시는 거죠?”

내일이라.
내일은 하고 싶은 좀 많아서.

“아니, 모레에 갈게. 내일은 할  좀 있거든. 그럼 그  보자.”
“네? 할 일이요? 누구랑요? 형, 형!”



지치는 구나.
이래서 평소에는  아이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곤 했었지.
어차피 끝을 봐야하는 문제였으니까…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다.

딸랑딸랑

“아, 아저씨, 이야기 끝나셨어요?”
“응, 미안하다. 기다리게 해서.”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이 아이와의 계약 조건에 따라 텅 빈 집을 채우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까 아저씨 표정 말인데요. 진짜 무서웠어요. 가뜩이나 동태 눈깔처럼 썩은 눈이 한층 더 진해졌다고 해야 하나. 진동 계속 오는 것도 그렇고 뭔가 문제라도 생기신  아니에요?”
“그냥 직장 문제로 조금. 퇴사절차에 뭔가 착오가 생겼거든.”
“그러면 아저씨 다시 회사로 돌아가실 수 있는 거예요?”

글쎄.
이제는 너무 늦었지.

“못 가.”
“…또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아무튼 휴대폰도 샀겠다 이제 집에 가요. 빨리 씻고 싶다…”
“그래, 그러자. 택시 타고 가면 금방 도착하니까 좀 참아.”

그러면서 택시 정거장을 향해 걸어가던 나는 문득 휴대폰에서 끊임없이 울리던 진동이 잠잠해졌음을 눈치챘다. 가련이가 모두에게 말해준 거겠지.

부우웅

[010-61XX-XXXX]
 계정 가지고 협박한 건 죄송했어요
[010-61XX-XXXX]
모레 꼭 오셔야 돼요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다고, 가련아.
네가 그 하찮은 돈 따위로 내 마음을 흔들려고 한 것도, 그 모든 일들을 장난으로 치부한 것도. 내 마음에 상처를 준 것도 너의 사과 한 마디로는 절대 회복되지 않을 거야.

[010-61XX-XXXX]
형 근데 깜빡하고 말  한거 하나 있는데요
[010-61XX-XXXX]
다솜이 언니가 형 목소리듣더니 바깥으로 뛰쳐나갔어요
[010-61XX-XXXX]
뭐라더라 파장? 흔들림? 같은 걸 말하던데

그 문자를 보자마자 어디선가,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익숙한…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뜀박질 소리가 서서히 들려온다. 그래, 마치 폭음과도 같은 그 소리가.

"-진아, 어디있-."

“…”
“응? 아저씨 이름이 어디서 들린  같은데…”

두두두두두

"진아-. 이 근처에 있는  다 알..."
“도진아, 도진아! 어디 있어-!”

누나의 저런 모습을 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구나.
회사에 취직하고 나서는 누나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멀리서 들리던 그 소리는 점점 그 강도를 올려가서,

두두두두
두두두두두

“…도진아?”
“도진이니? 도진이 맞지. 도진아! 도진아!”

“…잠깐만 저기 들어가서 햄버거  주문하고 있어봐. 무슨 일 있으면 나와서 나 부르고.”
“아, 아저씨?”

오늘도 조금 피곤한 하루가 될 것 같구나.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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