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화 〉8. 상륙 (2) (8/21)



〈 8화 〉8. 상륙 (2)

축 내려앉은 우리 둘 사이의 분위기를 비웃듯  날의 날씨는 먼지 하나 없는 쾌청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만이 멈춰 있는 우리들의 머리카락만을 조금씩 움직인다. 내 눈 앞에 있는 아름다운 그녀의, 다솜이 누나의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은 어째서인지 평소의 그 윤기를 조금 잃은 것만 같았다.

“…도진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할게.”
“……”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와.”

그런 말을 하는 다솜이 누나의 눈가는 촉촉해져 있었고 나를 잡고 있는 손은, 아니 전신이 한눈에 봐도 알아볼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조금 심한 말을  것일까. 생각해보면 그녀는 언제나 날 위해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주고 조언을 해 줄 뿐이다. 확실히 유혈이 낭자 하는 영화는  정신 건강에 해로울 것이 분명하고 다 큰 어른이 프라모델을 조립하는 것도 어딘가 미성숙한 이미지를 가져다줄지 모르니까.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따온 광고 계약 한 두개 정도로는 그녀들이 회사를 이룩한 수많은 노고들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  아주 미진한 성과, 아니 발버둥에 불과했으니 누나는 그것을 쓸모 없는 일이라고 표현한 것 뿐이리라. 안되는 것에 매달리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으니까. 그래, 모든 게  위한 일이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해서 불만이나 갈등이 생겨도 내가 먼저 사과를 건내 왔다. 어찌 됐건 그녀의 충고에 나에 대한 애정이 서려 있는 것은 맞았고 결국은 닿지 않을 내 한 마디를 위해 그녀와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고 사내에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누나의 얼굴을  때마다, 그녀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때마다  한마디 하지 못하고 사태를 점점 악화시켜갔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모든 것은 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고 설령 내가 그녀의 혈육인들 나의 자유가 사역 당할 근거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자꾸 그러면 누나 화날 것 같아.”

더욱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제 3자 입장에서봤을  그녀의 나를 향한 모든 행위는 순수한 호의로 비춰진다는 사실이었다. 군 복무 시절, 이 이야기를 훈련소에서 마음을 열었던 전우에게 털어놨을 때 나는 배부른 줄 모르는 기만자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누나의 얼굴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괴롭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내가 미쳐버리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그러던 와중에 나는 하나의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알았어, 누나. 내가 다 잘 못 했어. 미안해.”
“…괜찮아. 요즘 잠도 못 잔 것 같고, 조금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지. 계약 같은 무의미한 짓을 따내려 하니까 우리 귀여운 도진이만 피곤하잖아. 누나는 다 이해해.”
“응.”

고개를 돌려 여름이가 들어간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을 보았다. 2층짜리 단일 건물에 드라이브 스루용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는, 근래 유행하고 있는 양식. 그 건물의 2층 창문에서 나를 보고 있는 여름이와 눈을 마주쳤다.

“도진아, 왜 그래? 이야기도 끝났겠다 이제 가자. 택시 부를래? 밥부터 먹을까? 으음, 먼저 씻기는  좋으려나…오늘이야말로 누, 누나랑 같이….”

이 이상 이 여자와 이야기를 지속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행위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기로했다.

“아침부터 굶어서 배가 고프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맛 집 하나를 찾았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어, 어? 도, 도진이가 나랑…?”
“응.”

겨울날 처마 아래 핀 고드름보다도 싸늘했던 아까의 분위기는 말 한마디로 반전되어 그녀는 지금 깡총깡총 거리며 얼굴을 상기시킨 채 원래의 ‘다솜이 누나’로 돌아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내가 이상적인 ‘유도진’을 연기하기만 한다면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왔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다만 차이점이라 한다면 이제는  여자의 저런 모습을 본다 한들 일체의 감정 변화, 이를테면 안도감이라든지 미안함이라던 지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해보니 이제 정말로 그녀와 나의 관계가 더 이상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음을 느꼈다.

“대신 가면서 조그마한 놀이를 하나 해볼까 해. 요즘 바빠서 누나랑 놀지도 못했으니까.”
“저, 정말로? 도진아, 그 말 진심이니? 그렇지? 역시 나가 있으니까 누나가 그리웠지? 네가 그런 말을 해주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이니.”
“응, 일단 눈을 감아봐. 어떤 식당으로 가는 지 비밀로 하고 싶으니까.”
“으, 응.”

눈을 감는 그 여자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는 여름이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창문으로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앞에 있는 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구화(口話)를 이용해 뻐끔뻐끔 지시를 내린다.

‘나와.’

그 말을 이해한 것인지 여름이는 순식간에 먹고 있던 햄버거를 포장해서 계단을 타고 내려와 나와 그 여자가 있는 도보로 나왔다.

“도, 도진아…아직이니? 누나 조금 무서워서.”
“조금만 기다려줘 누나, 지도 앱으로 식당이 어디 있는지 검색하고 있으니까. 옆에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응….”

다시 한번 소리 없이 입술의 움직임만을 이용해 여름이에게 한 가지 지시, 아니 부탁을 했다.

‘택시.’

그 말을 들은 여름이는 나지막하게 끄덕이더니 때마침 대로에서 운행 중이던 택시 한 대를 향해 그 연약해 보이는 팔을 연신 흔들기 시작하더니 우리 바로 앞까지 그 차를 불러왔다. 눈치 하나는 빠른 아이라 다행인 것 같구나.

“누나, 조금만  기다려줘.”
“응, 도진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난 뭐든지 할  있어.”

그 역겨운 한 마디를 애써 귀에서 씻어내고 여름이와 함께 준비된 택시의 뒷 좌석에 탑승했다.

“카드 결제로 할게요.”
“알겠습니다. 목적지는 어디로….”

택시 기사에게 주소를 말한 뒤 나는 창문 너머 그 여자, 눈을 감고 손을 모은채 어딘가 기도하는 듯한 이다솜의 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의 이 거리가 우리들의 거리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리.

“아저씨, 아까보니까  언니랑 껴안고 있던데 여자친구 아니에요?”
“끔찍한 소리 하지 마.”

그보다 나보다 한  많은  여자는 언니인데 나는 왜 아저씨인지 그게 궁금했다.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마음 깊숙한 곳에서 뭔가 일렁이는 느낌이 들어 굳이 입에는 담지 않았다.













*
수많은 카메라와 청중들이 한데 모인 한 대형 강당. 한 여자가  곳의 가장 안쪽에 있는 강연대에 올라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맞은 지금 우리는 언택트 사회에서 미디어 기업이 사회에 어떤 것을 환원해야 하는지….”

우렁차고 또박또박한 목소리와 대조되는 165cm 정도의 작은 키와 아직 어려 보이는 앳된 얼굴, 그리고 청순함을 더하는 흑색 머리카락의 그녀는 자신이 사장직을 맡고 있는 회사, ‘뮤지엄’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곳에 결집한 청중들을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설립한 지 1년도 안  벤처기업의 사장이 과거 유수의 대기업 사장들만 오를  있었던 이 강연대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그녀를 더욱 고양시키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기, 인터뷰 요청은 어디로 해야….”
“…이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하셔서 미리 예약을 잡으시면 돼요. 요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박수가 우레처럼 쏟아진다. 웅변의 재능을 증명하듯 그 젊은 사장, 채설하의 말 하나하나에는 뿌리가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만족한 것인지 근래에는 보지 못했던 순수한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대기실 의자에 앉아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가련이니? 강연 끝났어. 곧 회사로 복귀할 거야.”
“아, 수고하셨어요. 언니. 반응은 어떠셨어요?”
“조금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던 것 같아. 인터뷰 요청도 많이 받았고.”

대학 시절부터 수년을 함께  와 지금은 같은 회사의 프로그래머를 맡고 있는 사랑스러운 후배, 가련과 통화를 하며 설하는 자신이 달성한 성과를 담담히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래서  새끼 모레에 온다는 거 진짜지? 보, 복직한다고.”
“뭐, 출근하신다고 하셨으니까 아마도 그렇다고 봐야겠죠. 처음에는 협박할 생각이었는데 순순히 출근하신다고  걸 보면 오빠, 아, 아니지. 형도 요 사흘 동안 뭔가 느끼신  있던  아닐까요.”
“…푸흡.”

그럼 그렇지. 하며 설하는 금방이라도 앉아있던 의자에서 방방 뛰며 날아갈 것 같은 자신의 엉덩이를 간신히 저지하고 있었다.

‘그 녀석, 퇴사니, 뭐니 하더니만 결국은 회사가, 우리가, 아니…내가 그리워진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말이 아니었을 텐데, 도진이 가련이를 통해 전한 말은 어째서인지 설하에게 상당히 유리한 내용으로 와전되어 있었다.

“…가련아.”
“네?”
“모레에는 파티를 할 거야.”
“갑자기요?”

조금 생각해보면 그 녀석에게 요즘 욕만 하고 살짝 거칠게 대하긴 했지. 설령 그것이  아이를 위한 것일지라도 1년 내내 쉴 틈 없이 달려온 그 아이에게는 그것이 아주 조금, 불만이었을 수도 있다. 어처구니없는 퇴사소동도 그것의 일환이라  수 있을 것이고. 요는 그 아이는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귀여워서… 돌아오면 작은 파티라도 열어줄까.

푸흡, 하고 설하는 자신의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간 입꼬리를 잡고 그렇게 되 뇌이는 것이었다. 한참동안, 강연이 끝나 인적이 없어진 강당의 한 대기실에서는 여자의 행복한 듯한 웃음소리와 끼익끼익 거리는 회전의자의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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