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10. 곱빼기 (1)
그 날, 너는 오지 않았다.
밤, 잠을 애써 청하려고 해도 퇴사 첫 날처럼 속 안에서 원인불명의 구토감과 몸살에 걸린 듯한 떨림이 계속 해서 이어져 오전 5시쯤에는 그것을 견디지 못해 일어나고 말았다. 온 몸에는 식은 땀이 가득했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을 반증하듯눈꺼풀은 무거웠으며 그러면서도 두통 때문에 제대로 누워있을 수조차 없었다.
오피스텔의 중심부에서 조용히 잠을 청하고 있는 그 아이를 깨우지 않도록 나는 조심히 현관 옆에 위치한 화장실로 이동해 변기를 잡고 헛구역질을 계속 했다. 전 날 저녁으로 먹은 것은 밍밍한계란 죽이 전부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 속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임이 자명했으나 토해내고 싶었다.
뭐라도 토해내면 이 기분이 조금 풀릴 것이라 믿었기에.
한참을 그렇게 계속 화장실 안에 있다가 다시 현관으로 나왔지만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잠이라는 마지막 탈출구조차 막혀버린 지금 나는 그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전 날 잠금이 풀린 거래소 앱에 들어 있는 돈을 모두 출금하고 계정을 새로 만들거나 기존 사이트에 있었던 비밀 번호를 수정하고 주민등록번호 변경 방법 등을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하는 따위의 일을 계속 하며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새벽, 밤은 길었고 동은 트지 않았다.
마치 내가 그녀들과 보낸 시간들을 상징하듯.
“…안 주무셨어요?”
“…”
바깥에서 어디론가 가는 듯한 차들의 덜덜거리는 엔진 소리와 창문 옆 실외기 위쪽에 도란도란 앉아 구구거리는 비둘기의 소리가 조금씩 들릴 때쯤 일어난 그 아이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어젯밤 그 아이 주변에 아른거렸던 얼굴들은 이제 짐을 챙겨 떠난 모양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 아이, 여름이에게 어떤 식으로 대답을 해줘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무언가 한 마디를 하려고만 해도 자꾸만 어제 내가 여름이에게 했던, 말이 생각나서 목구멍 끝까지 넘어왔던 그 한 마디를 삼키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 말은 우리의 관계에 있어 적합한 말일까, 이 행동은 비즈니스 관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맞나 끊임없이 따져보는 내가 있었다.
외려 어젯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을 거는 그 아이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뭐 할 건데요.”
“…”
가구를 사야한다.
침대를, 냉장고를, 주방용품을, 뭐든 사서 이 텅 빈 집안을 채워 놓아야 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한 결 나아질 것 같았다.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시작하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뜯어낼 수 없는 가구가 내 방구석 한 켠에 하나 더 생기는 것은 이 이상 사절이었다.
“…옷.”
“네?”
“옷을 사러 갈 거야.”
그 이상의 감정이 섞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을 해간다.
“갑자기요?”
“대낮에 그런 꼬질꼬질한 옷을 입은 둘이 마트 안을 돌아다니면 의심받으니까.”
“그건 그렇죠.”
“옷을 산 뒤에는 어제 못 산 냉장고를 살 거야. 시간이 남는 다면 다른 것들도.”
“…네.”
출근한 회사원들과 같이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해 짧은 미팅을 가진 우리는 말없이 각각 가볍게 샤워와 세안을 마친 뒤 근처 김밥집에서 간단하게 조식을 해결하고 마트로 가는 버스를 탔다.
“어른 하나, 학생 하나입니다.”
“네, 이제 찍으시면 됩니다.”
마트가 있는 도시 중심부로 향하는 한산한 버스 안에는 어설프게 맨 넥타이를, 이제는 조금 빛이 바랜 검은색 양복위에 대충 걸친 뒤 잠을 청하고 있는 사내와 어제 본 게임방송 이야기를 조잘조잘 해대는 학생들이 있었다. 군데군데 앉을 곳이 남아있는 관계로 다리가 아프진 않았지만 버스 안의 그 광경은 어젯밤 여름이가 나에게 한 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것이었다.
모두가 돌아갈 곳이 있는 이 곳에서 오직 우리 둘만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창 밖의 풍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도착한 대형 마트의 옷을 파는 코너, 그곳에서 나는 남성복 몇 가지를 고르고 있었다. 백화점도 아닌 마트인 만큼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옷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지금 같이 당장 입을 옷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고른 것은 집 안이나 가까운 편의점을 갈 때 입을 트레이닝 복. 추가적으로 바깥에서 무난하게 입을 수 있는 블레이저와 반팔 티셔츠, 슬랙스와 청바지 같은 옷들을 몇 벌 더 구매했다.
생각해보면 옷을 살 때는 꼭 그녀들 중 한 명과 와서 고르곤 했었지.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지금 고른 옷들이 내 의지로 산 것인지 무의식에 각인된 그녀들의 취향에 맞춰 고른 것인지 점점 알 수 없게 되어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여름이에게 도와 달라고 할까.
아니, 계약 조건은 가구나 전자제품 같은 집과 관련된 용품으로 한정되어 있을 것이다. 딱 잘라서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옷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라는 개인을 꾸미기 위한 것으로 저 아이와 나의 관계에 있어서….
…
그냥 저 아이에게 말을 거는 것이 거북했다.
여름이는 여성복을 파는 작은 팝업 스토어에서 여러가지 옷들을 들어보고 걸쳐보며 구경하고 있었다. 가볍게 말을 걸면, 아니 손만 뻗어도 바로 닿을 정도의 위치였지만 어쩐지 그 거리는 퇴사했던 날, 저 아이와 같이 모텔로 걸어갔을 때의 거리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다.
“…트레이닝 복은 그냥 입고 가겠습니다.”
“네, 입고 있던 옷은 저 주시면 따로 포장해 드릴게요.”
그렇게 두 세개 정도의 팝업스토어를 전전해 입을 옷들을 대충 구매한 나는 메신저 앱을 이용해 여름이에게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다 샀으면 6층 에스컬레이터 앞으로.>
이른 아침, 사람이 없는 마트의 텅 빈 에스컬레이터가 오가는 것을 멍하니 보며 의자에 앉아 있던 나의 옆에 쇼핑을 마친 여름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다 샀어요.”
그 아이는 강렬한 빨간색을 기조색으로 어깨부터 소매까지의 재봉선 부분을 하얀색으로 포인트를 준 상의와 아무런 무늬가 없는 검은 색 바지…그러니까 나와 같은 트레이닝 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거 하나밖에 안 샀어?”
“반팔 티도 몇 장 샀어요. 어차피 집에 세탁기 있잖아요.”
같은 옷을 세탁만 해서 돌려 입을 생각인 걸까. 그러고 보면 이 아이가 나와 처음 봤을 때 입고 있던 옷도 평범한 회색 후드티와 청바지였지.
“이제 일하러 갈게요.”
“뭐?”
“냉장고 사러 간다고요. 받은 대가만큼 일은 해야 할 것 아니에요.”
“…음.”
트레이닝 복을 입은 후줄근한 인상의 두 사람이 두리번거리면서 가전제품 코너에서 냉장고를 고르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우스워보였는지 명백한 구매 의사가 있는 고객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직원들은 아무도 다가오지 않고 있었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여름이는 어제와 같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비교하며 신중하게 냉장고를 고르고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
“…”
어제와는 달리 우리 사이에 일체의 말도 없었다는 것 정도이다.
“이거, 일시불로 결제하겠습니다. 설치는 따로 해주시는 건가요?”
“네, 고객님께서 원하시는 날짜를 말씀해주시면 저희 측에서 기사님을 보내 배달부터 설치까지 다 해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였을까, 여름이가 골라준 몇 가지 후보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나니 마트에 도착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점심시간이 되기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이 남았건만, 벌써 오늘 할 일이 다 끝나버린 것이다.
“시간 남으면 몇 개 더 사시겠다면서요.”
“…생각 중이야.”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며 가전제품 판매대를 걷고 있으니 벽 쪽에 전시된 거대한 티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진보된 해상도와 색 표현율을 소비자에게 선전하려는 것처럼 티비 안에는 외국의 한 유명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만들었던, 요리사 쥐가 각종 식자재를 화려하게 음미하고 있는 영화가 재생되고 있었다.
“티비 사시게요?”
“음.”
어제 본 영화가 재미없었던 이유는 분명 화면이 작은 스마트폰으로 감상해서 그랬던 거겠지. 이티비에 비해 색 표현율도 해상도도 형편없었으니까 완성도가 아무리 좋았어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리라. 그래, 이 정도로 큰 화면의 대형 스크린으로 재감상한다면 분명 다를 것이다. 아니, 확실하게 재미있어질 것이다.
아아, 그렇고 말고.
“…그렇게나 큰 티비를 사신다고요.”
“그래.”
“벽 한쪽을 꽉 채울 텐데요.”
“상관없어.”
그 텅 빈집을 조금이라도 더 꽉 채울 수 있다면 나에게는 오히려 더 좋은 이야기가 아닌가.
티비를 비롯해 청소기나 다리미 따위의 가전제품을 몇 개 더 구매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 곳을 떠날 수 있었다.
“…”
“…”
할 말은 여전히 없다.
아니, 이게 맞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올바르고 바람직한 관계다.
지금까지의 거리감이 이상했던 것이고 비효율적이었던 것뿐.
“…저 과자 몇 개만 사도 될까요.”
“그래.”
“그럼 구경 좀 하고 올게요.”
과자를 구경하러 간 여름이를 기다리며 나는 아까 그랬듯이 에스컬레이터 옆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때때로 거래소 앱을 확인하며 멍하니 있었다. 사흘전까지 끊임없이 지속됐던 소동들이 거짓말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오늘 하루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로웠고 잔잔했다.
마치 폭풍이 오기 전, 밤 날의 잔잔한 바다처럼.
“……”
내일이면 다시 그 회사, 뮤지엄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그녀들과의 소중했던 인연들을 제대로 마무리하기 위해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그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흘 전만 해도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유리 회전 문도, 두꺼운 철제문도, 하얀색 벽지와 흑색 가구, 그리고 대리석 바닥이 조화된 조금 세련된듯한 사무실의 모습도, 그 바닥에 눌러 붙은 커피 자국도…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다시, 그녀들의 얼굴을, 목소리를 마주해야 하는구나.
“하아….”
조금만 이야기한 것만으로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내일은 어떻게 될지 조금도 예상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그녀들과의 관계를 유지해 온 나에게 경외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아아,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걸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여름이가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순간,
“…유, 유도진?”
그녀, 그러니까 조금 헐렁한 듯한 보트넥 디자인의 아이보리색 블라우스 위에 우아한 분위기의 검은색 뷔스티에 원피스를 레이어드 한 차림새에,
앞 머리를 내린 청조한 분위기의 선명하고 반짝이는 흑색의 롱 헤어와 대조되는 강아지 상의 귀여운 얼굴을 가진 그녀.
나의 최고의 이해자이자 동반자이며 친우였던 그녀.
“…”
“시, 시발, 유도진 맞잖아!”
그 가느다란 목소리로 어울리지도 않는 천박한 욕을 그 조그마한 입으로 담는 그녀.
나의 전 사장님.
채설하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