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화 〉11. 곱빼기 (2) (11/21)



〈 11화 〉11. 곱빼기 (2)

“야! 아침부터 여기서  하는 거야?

그녀, 채설하의 그 질문을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아니,  상황조차 이해하기 버거웠다. 그녀는 명목상이긴 하지만 일단은 뮤지엄의 대외활동을 책임지고 있는 사장으로서 업무가 한창 진행중일 시간대에 마트를 들릴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잠깐 볼 일이 있어 들렸다고 보기엔 그녀가 돌돌거리며 끌고 있는 쇼핑 카트에는 파나 김치 따위의 식자재부터 간단한 파티 용품들까지 들어 있었다. 그래, 마치 친구와 할 파티를신나게 준비하는 아이처럼.

“…”
“너, 저, 전화는   받은 거야! 걱정했잖아!”

걱정?
그녀의 입에서 저런 말을 들어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애당초  마음 속에 남은 마지막 불씨를 꺼뜨린 것은 그녀의 행동 아니었던가.

“…”
“야!”

말할 것은 목구멍 아래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나는 그녀들에게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기대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임을 어제 벌어진 사건으로 충분히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입을 닫고 가만히 있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여기서 그녀에게 말을 해봤자 통하지도 않을 것이고 4명이 전부 모인 그 자리가 아닌 이상 퇴사나 우리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나도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거야.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인건 너가 더 잘 알잖아?”


그렇게 상기된 얼굴로 경고하듯 채설하는 옆쪽의 의자에 앉아  얼굴만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와는 뮤지엄의 그 어떤 멤버보다도 깊고 오랜 교류를 맺어온 사이니 모를 리가 없다. 이전부터 그녀는 얻고 싶거나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달성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내일은 잔뜩 머리가 아플 것이 분명했으니 오늘 하루정도는 느긋하게 쉬고 싶었는데 이미 다 글러먹은 이야기였던  같구나.

“…너야 말로 왜 여기 있는 건데. 아직 근무 시간이잖아.”
“도, 도진이 목소리…”
“뭐?”
“아, 아무것도 아니거든!”
“그래. 그럼 이제 각자 갈 길 가자. 나는 바빠서. 어차피 내일 출근하잖아.”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인사 정도는 해줬으니 이 이상의 이야기는 무의미할 것이다. 여름이에게는 메신저를 통해 마트 입구에서 만나자고 지시해야겠군.

“잠깐!”

그녀가 한층 더 상기된 목소리로 헉헉거리며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던 나를 가로 막는다. 안 쪽에 입고 있는 블라우스는 땀에 젖어 내부가 거의 비치려고 하고 있었다. 대체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리 화난 건지 이제는 감조차 잡을  없었다.

“버, 벌써 가려고?”
“바빠.   이야기도 없을  아니야.”

그녀와 더 이상 얼굴을 마주보고 싶지도 않았고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있어! 그…그러니까 그, 그 츄리닝! 어떻게 된 거야. 그런 촌스러운 옷이나 사가지곤… 다른 사람들이 우리 회사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당장 환불하고 와! 너, 너만 원한다면 내가 같이 가 줄 수도…있고?”

츄리닝.
방금   검은색 트레이닝 복을 말하는 건가.
그것보다도.

“회사?”
“그,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너 말이야…”

푸흡, 하는 미소를 내비치며 그녀는 계속 해서 이야기를 해 나간다.

“서운한 게 있었으면 미리 말을 하지 그랬어.”
“…….”

조금,
서운한 것을 언급하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마음속 어딘가에서 꺼진 불씨를 되살리려고 하는 내가 있었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어쩌면 설하는 다를 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에서 두번째로 생겼던…최고의 이해자였던 그녀라면,
내가 왜 퇴사했는지에 대해 눈치챘을 지도 모른다.

…만약 그녀가 나에게 진심으로 그간의 무례를 사과하고, 아니.
내 마음속의 어둠을 예전의 너가 그랬던 것처럼 꺼내서 따스하게 보듬어 주기만 한다면.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 있을까?



네가 그 한마디만 해준다면,
네가 지금이라도 그, 낡은 시계 앞으로 와준다면.

“하여간 진짜 귀엽다니까.”
“…뭐?”
“뭐, 인정해. 나도 요즘 일이 바빠서 여유가 없었으니까.”

불과 몇 분전까지만 해도 칼을 처음 든 어리숙한 병사처럼 덜덜거리며 허둥대던 그녀는 어느새 숙련된 장교마냥 그 칼과 같은 한마디 한마디로 나의  쪽을 담담하고 자비없이 유린해가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퇴사는 뭐니? 대체…푸흡, 그 나이 먹고도 역시 도진이는 도진이인가 싶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뭐냐니, 앞으로는 널 더 신경 써주겠다고. 너, 요즘 우리가 바쁘다고 조금  놀아준 것 가지고 심술부리고 있는 거잖아.”

예상해왔던 반응이었건만.
정말로 가증스럽구나. 너희들은.

“미안해, 도진아? 대신 내일은 기대해도 돼. 사과의 의미로 우리가….”
“비켜.”

기대하지 않는다면 실망할 일도 없다.
나는 그녀들에게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들보다도, 채설하의 그 한마디를 듣자마자 제멋대로착각해 순간적으로 마음 속 어딘가에서 꺼진 불씨를 정신없이 부채질해가며 되살리려고 했던 나의 모습에 환멸감이 들었다. 그 흔적을 지워내기라도 하려는 듯 나는 이다솜에게 그랬듯이 에스컬레이터를 막고 있는 채설하의 어깨를 한쪽으로 밀어내 그 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유, 유도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버, 벌써… 이런  둘이서만 있을 때 하라니까!”
“비켜.”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만한 힘이 나오고 있는 지 믿을  없을 정도로 철옹성과 같이 에스컬레이터를 막고 한치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그녀. 이제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나의 바람은 그녀에게 결코 닿지 않고 있었다.

“마, 말이 나와서 그런데 너…내일 회사 끝나고 시간이  있으, 있으면 말인데…”

에스컬레이터가 아니면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만이다. 뭣하면 비상계단으로, 아니면 창문으로 뛰어내리면 되는 이야기다.

“야, 야! 내가 말하고 있잖아! 그, 그러니까 내일…”
“비키라고 했잖아.”

잠재우고 있었던 마음의 일렁임이 멈추지 않는다.
아니, 이제는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젯밤 부서졌던 둑의 영향일까.

이제는 한계였다.
쥐고 있던 주먹이, 조금 떨렸다.

“죄, 죄송합니다! 저기.”

그 순간,  앞에서 내 소매를 잡고 조금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 그 여자와 나 사이에 별안간 한 소녀, 그러니까 여름이가 끼어들었다.

“어, 그러니까… 혹시 나를 부른 거니?”
“네…저기, 그. 심부름으로 호랑이 시리얼을 사러 왔는데 마침 다 떨어진 것 같아서, 근데 저기. 주변에 남자직원분들밖에 없어서 그게 좀, 무서워서…”
“아… 언니가 대신 물어봐 줄까?”
“…네. 저기,죄송합니다….”

여름이의 본성을 아는 나에게는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그런 촌극(寸劇)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너는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하아, 유도진. 나머지는 내일 이야기하자. 모처럼의 휴가니까 낭비하지 말고 푹 쉬고.”
“…”

 말과 함께 채설하는 여름이를 데리고 과자 등을 진열해놓은 코너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 감사합니다….”
“뭘, 그럴 수도 있지. 으음, 근데 우리 어디서 본  있던가?”
“네…? 저기, 저는 잘….”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 멍하니 보고 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메시지를 여름이에게 보내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철 역과 연결된 대형 마트의 입구밖으로 나왔다. 몇 분 정도 지나서 그 아이는 큼지막한 시리얼 상자를 들고 내 쪽으로 뒤뚱뒤뚱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뭐하는 짓이야.”

조용히 넘어갔으면 될 문제를 나는 굳이 입에 담아 그 아이를 추궁한다.
그래, 궁금했다.

“뭐가요?”
“왜 끼어든거냐고.”

그러더니 그 아이는,

“호랑이 시리얼이  떨어졌었다니까요.”
“뭐?”
“그래서 그냥 착해 보이는 언니한테 도와달라고  건데요.”
“우유도 없이 시리얼만 먹을 거라고?”
“…집 근처 편의점이  싸거든요.”

점심시간이 조금 넘었을 시점, 우리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과는 다르게 버스 안은 한층 더 한산한 모습이었고 이제 그 안에 있는 승객이라고는 우리 둘밖에 없었다.

“저 화장실  쓸게요.”
“…그래.”

다시 돌아온 집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  가전제품들이 이틀 후 배송오기만 한다면  삭막한 풍경도 어느정도 사라지리라.

“점심은 저번에 시켰던 그 중국집 어떠세요.”
“그러자.”

아마 평일 대낮의 가정집에서 중국음식을 시켜 먹는 사람들도 우리 밖에 없을 것이다.

“어제 죽을 먹어서 그런가, 이 짬뽕이랑 탕수육이 좀 당기더라고요.”
“음.”

눈 앞에서 오물오물, 마트에 전시되어 있던 티비에서 나온 영화의 주인공처럼 배달 음식을 먹고 있는 여름이.

“내일은 잠깐 회사에 다녀올 거야.”
“아, 네.”
“카드는 두고 갈 테니까 밥은 알아서 해결해. 무슨 일 있으면 편의점이나 관리실에 와이파이 잡히니까 연락하고.”
“네.”

출근.
나는 내일 그 회사에 다시 출근한다.
그녀들과의 관계에 매듭을 짓기 위해서.

“…그런데 이거 잘못 시키신 거 아니에요? 양이 저번보다 많은 것 같은데. 저야 좋지만.”
“잘 모르겠는데.”
“아니, 이상하다니까요. 휴대폰 좀 잠깐 줘보세요.”
“자, 잠깐.”

그러더니 여름이는 대처할 겨를도 없이 내가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확 채가는 것이었다.

“자, 보세요. 곱빼기로 시키셨잖아요.”
“…버튼을 잘못 눌렀어.”
“…뭐야 그게.”

그날 그 아이와 함께 점심을 먹은 이후,
아침까지만 해도 내  어딘가를 가득 채운 울렁거림이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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