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화 〉15. 접근금지 가처분 (2) (15/21)



〈 15화 〉15. 접근금지 가처분 (2)

“…카드  테니까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사 마시건 케이크를 사 먹건 시간이나 때우고 있어.”
“네? 싫어요.”

여름이의 그 가증스러운 등을 뻥 차서 택시 밖으로 밀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경찰서 앞에 도착해 있었다. 출입이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는 입구, 경찰차가 몇 대인가 주차되어 있는 거대한 주차장, 그리고 차가운 회색의 콘크리트로 둘러 쌓인 서(署)는 그 격에 맞게 보는 것만으로도 엄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직 점심도 안 됐어. 너랑 같이 들어갔다가 학생이 아침부터 학교도  가고 여기서 뭐하냐고 추궁당하기 시작하면 귀찮아진다고.”
“…그건 그렇지만.”

내가 말하는 것을 납득한 것인지 평소와 달리 반박하는 것도 포기하고 고개를 숙이는 여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으면서  따라온 건지 모르겠군.

“끝나면 연락할 테니까.”
“됐으니까 아저씨야말로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세요.”
“뭐?”

이 아이, 오늘따라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카드나 주세요.”
“그래.”

여름이가 카페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차가 분주하게 오가는 게이트를 지나 내부로 들어갔다.

…생각해보면 경찰서를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
보통의 사람이라면 파출소정도면 모를까 경찰서라는, 이 장소에 발을 디딜 기회가 살면서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지은 것 때문에 온 것도 아닌데  내의 분위기 탓일까, 조금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번호표 뽑으시고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러고 보니, 무슨 죄를 물어서 그녀들을 고발해야 하는 걸까.
민원실에 들어가 번호표를 뽑고 대기하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개인정보 유출.
불특정 다수에게 내가 원치 않았는데도 나의 정보를 적어 벽보로 배포했으니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스토킹.
나는 이미 퇴사의 의사를 전달했는데도 벽보를 붙여가며 집요하게 달라붙는 것은 뉴스나 영화에서 자주 보던 스토킹 범죄에 해당하지 않겠냐는, 막연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 와중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처음 퇴사를 했을 때와 달리 그녀들에게서 전화나  통의 문자조차 일절 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번호를 바꾸지 않아 아직도 전화를 하려고 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 무슨 영문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벽보 같은 전위(前衛)적인 행위보다도 전화를 거는 것이 나 개인을 호출하기에는 더욱 용이했을 텐데.

“들어가시면 됩니다.”

조금씩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내 차례가 되어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두 명의 경찰관이 서있는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아, 예. 혹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피곤함에 잔뜩 찌들은 듯한 경찰관 한 명이 그리 물어본다.

“예, 다름이 아니라…그, 오늘 이 동네 전체 붙은 벽보를 보신 적 있으시죠?”
“아, 예예. 아침부터 난리도 아니었죠, 그것 때문에. 근데 그게 왜…?”
“거기 써진 이야기가 제 이야기라서요. 벽보 회수는 물론이고 주동자까지도 처벌하고 싶습니다.”
“아…그러세요?”

서에 가서 물어보면 빠르게 해결될 것이라는, 아까 현장에서 만난 경찰관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이 두 사람의 경찰관은 탐탁지 못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수군대기 시작했다.

“이런  어디로 보내야 돼?”
“일단 생활질서계로 보내는  나을  같은데요.”

이야기를 마치고 흠흠 거리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는  명의 경찰관.

“생활질서계에서 도와주실 겁니다. 우선 거기로 가보시죠.”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비슷한 사건을 담당하는 부서에 가서 다시 이야기를 해야 되는 모양이었다. 안내받은 생활질서계는 같은 건물에 5층에 위치해 있어서, 복도로 나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안녕하세요, 민원실에서 안내받고 왔는데 어디로 가야…”
“이리로 오시면 됩니다.”

들어간 곳은 중소규모의 사무실, 다들 바쁜 탓일까, 민원실 때와는 달리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아 내가 먼저 넌지시 말을 건내자 그제야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한 중년의 남성이 데스크에 앉아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아, 그…누군가가 제 개인정보를 벽보에 적어 아침부터 무단으로 길거리에 유포하고 있습니다. 벽보 유포도 멈추고 싶고 해당 유포자까지 처벌하고 싶습니다만….”
“아아, 그 전단지 말하는 건가 보네.”
“예, 뭔가 방법이….”
“그래서 고소하실 겁니까?”
“예?”
“고소하실 거냐고 여쭤봤습니다.”
“…그, 수사라 던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워낙 민원이 빗발쳐서 주동자에 대한 수사는 이미 시작했습니다. 단지 선생님이 피해입으신 건에 대해서 보상을 받고 싶으시다면 고소를 하시라는 거죠.”
“아, 예….”

고소라,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이런 일은 살면서 처음이었으니까.
그냥 경찰서에 오면 모든 게  해결될  알았는데 아무래도 조금 복잡한 모양이었다.

“고소장은 제가 법원에 가서 써와야 하는 겁니까?”
“아뇨, 접수하실 거면 지금 여기서 어떻게 써야 하는 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아, 그러면 그렇게 해주시죠.”
“…근데 그, 쓰기 전에 왜 고소하실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상황을 알아야 제가 도움을 드릴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아까도 말했듯이 벽보 안에 제 신상정보가….”
“그러니까, 그 신상정보라는 게 뭐냐는 거죠.”

벽보 안에 들어있는 신상정보.
그러니까,
178cm에 72kg 정도 되는 흑발의 다크서클이 심한,
검은색 양복과 흰색 셔츠, 그리고 가죽 구두를 신은 사내의 이야기.
이것은 분명 나의 이야기.
그럴 것이다.

“…”
“하아, 선생님도 눈치채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불법적으로 얻어낸 정보가 아닌 단순한 외형적 특징들을 유포하는 것은 처벌할 근거가 희박해서, 보통 개인정보 유포로 처벌되는 것은 모욕이나 허위사실을 덧붙인 경우죠. 혹시 선생님을 모욕하거나 사실이 아닌 정보가 벽보 안에 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없습니다.”

그것보다 벽보 안에는.

“…조금 더 덧붙이자면 설령 이 벽보 안에 누군가를 모욕하는 내용이 들어있더라도 제 3자의 시각에서 피해자를 특정할  있는 정보, 그러니까 특정성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그, 처벌하시기 힘드실 겁니다. 제가 몇 년 동안 여기서 일해온 경험으로서는…”

그 이후 눈앞의 사내는 자신의 경력과 비슷한 사건들을 줄줄 읊으며 뭔가를 설명하려 했지만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벽보 안에 있는 것은 분명히 나의 이야기이다.
내 의사를 무시하고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유포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벌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그러니까 오늘은…네?”
“벽보 안에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보겠습니다. 아마 제가 아는 사람일 겁니다. 이러면….”
“하아, 그렇다 치더라도 여전히….”

다시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하는 사내의 말을 무시하고 표기된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삐삐 거리는 대기음이  번인가 계속되더니 이윽고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채설하? 아니면 유가련? 오민서인가?  자꾸 이런 짓거리를 하는 거야. 나는….”
“…전화 받았습니다만 무슨 용건이신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 노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벽보 보고 연락 드렸습니다만.”
“아, 예예. 그래서 그분을 찾으셨다는 거죠.”
“누가 이런 헛짓거리를 하는 겁니까? 채설하입니까? 아니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그분을 어디서 봤는지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이후 핸드폰으로 계좌를 보내주시면 사례금은 알아서….”

더 이상 통화를 계속할 가치도 없어 보여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뭐라고 하더랍니까?”
“…모르는 척하더군요.”
“그것 보세요. 전국 팔도에 178cm에 검은 머리인 남자가 한둘도 아니고, 선생님인지 아닌지 특정할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지금 선생님의 복장은 이 삐라, 아니 전단지에 기재된 인상착의와도 다르지 않습니까? 기분은 이해하지만 저희가 도와드릴 방법은…게다가 스토킹 행위를 증명하더라도 경범죄 처벌법 이상의 수위로는 처벌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지인이었던 사람이 제 가상화폐 거래소 계정을 가지고 협박을 하던 녹취록이 있습니다. 벽보는 됐으니까 이걸로는 어떻게 고발할 없는 겁니까?”
“하아.”

벽보는 이제 됐다.
그렇다면 하다 못해 증거가 남아있는 유가련이라도 확실하게 처벌하고 싶었다.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괴롭힌다면, 나도 그저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
그게 이틀 전, 퇴사를 하며 한 다짐이었을 텐데.

“…선생님, 음성 자료를 증거로 쓰실 거면 속기사무소에 들리셔서 녹취서부터 만들어 오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내 결의는, 그들에게는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빨리 나오셨네요.”
“조금, 들러야 할 곳이 많아서.”

아무래도 여름이는 내가 올 동안 쭉 경찰서 주변에서 선채로 나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아저씨, 괜찮은  맞아요? 얼굴이.”
“괜찮아. 빨리 가자.”
“일단 이거라도 좀 마시세요. 성급하면 될 것도 안 된다고요.”

그러면서 그 아이는 손에 들고 있던 또 하나의 테이크아웃 컵을 내게 건넸다.

“뭐 좋아하시는지는 몰라서 그냥 자바칩 샀는데…괜찮으시죠?”
“…어차피 내 돈으로 산 거잖아.”
“…”

뭐, 됐나.
지금은 머리가 아파서 그런지 단 게 먹고 싶었으니까.

“동사무소부터 갈 거야.”
“네.”

아무래도 경찰 측에서는 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방법도 없을뿐더러 의지도 없어 보였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변호사의 자문을 구해 소송을 진행하면 뭔가 달라지리라.
달라져야 한다.

벽보 문제로 그녀들을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을 안 이상, 나는 지난날 조사했던 자료를 토대로 지금 내가 해결해야 하는 가장 시급한 사안인 유가련에게 유출 당한 내 주민등록번호를 바꾸기 위해 동사무소부터 먼저 들리기로 했다.

그다음은 협박성 메시지가 담긴 녹취록을 이용한 고소.
그리고,

그녀들이 두  다시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게끔 법원에 접근금지 신청을 하는 것.
그래, 그렇게만 한다면 분명….

“89번 민원인님, 3번 데스크 앞으로 와주세요.”
“안녕하세요.”
“어떤 일로 오셨나요?”
“네, 다름이 아니라 주민등록번호가 타인에게 유출되어서 새로 바꾸려고….”
“…아, 네. 혹시 주민등록증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
“여기 있습니다.”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눈앞의 공무원에게 제출했다.

“주민 등록지는문제없으신 것 같네요. 그럼 혹시 준비해 오신 근거 자료를 볼 수 있을까요?”
“지인  한 명이 제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해 통신사에서 번호 이전 기록을 조회했습니다. 이건  기록과 인증에 쓴….”
“선생님, 그런 걸로는 안 되구요. 판결문이나사건사고사실확인원 같은 것을 가져오셔야 해요.”

“어라, 끝났어요?”
“가자.”

머릿속은 점점 뒤죽박죽이 되어가고 있었다.

“상담 받으러 왔습니다만….”
“아, 네. 잠시만 앉아서 기다리시죠.  도와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택시를 타고 법원 근처에 기생하듯 우후죽순으로 설립된 수많은 변호사 사무실  가까운 곳으로 들어갔다. 앉아서 조금 기다리다 보니 아까 경찰서에서  중년의 남성과 비슷한 연배의 변호사가 위층의 사무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래서, 어떤 일로 찾아오셨는지.”

오늘 하루 수십 번은 들은 듯한 그 말.

“접근금지 신청을 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아, 예…하아, 가족이신가요? 아니면….”
“그, 4명의 여자입니다만. 이름은….”
“…그런 건 됐으니까, 사유를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스토킹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하아….”

문서를 작성하던 남자는 이내 타자를 멈추고 큰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또 뭔가, 내가 잘못한 것이 있는 걸까.

“미안한데, 나보다 어린 친구 같으니까 말 놓을게. 스토킹, 스토킹이라…  참, 무료 상담 딱지를 떼든가 해야지 원.”
“저기, 그래서 뭘….”
“이보게, 내가 여기서 자네 같은 사람을 몇 명을 봤는지 아나? 여자친구, 아니면 남자친구랑 싸웠다고 대뜸 찾아와서 접근금지 신청  해주세요.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  아느냐고. 친구들이랑 싸운 거면 법원까지 가서 얼굴 붉히지 말고 그냥 좋게 좋게 해결해. 그러면서 친해지는 거지. 뭘 피곤하게 여기까지….”

나는 또 뭘 잘못 한 것일까.
그저, 그녀들에게 피해를 입었고.
차후에 일어날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공권력의 힘을 빌리려고 했을 뿐이다.

경찰서에서 동사무소로, 다시 동사무소에서 법원으로 발을 옮겼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그딴 건 제 알  아니고 그래서 수임하실 거냐고요,  하실 거냐고요.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걸 뭘 그리 복잡하게 설명한담.”
“…뭐?”
“아저씨, 아무래도 이 사람은 돈 벌 생각이 없나 봐요. 그냥 다른 곳 가요.”

내 옆에 가만히 앉아있던 여름이가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내 손을 잡고 그 사무실에서 나를 강제로 끌고 나왔다.

“어차피 널리고 널린 게 변호사 사무실인데 뭘. 이번에는 저쪽으로 가봐요.”
“…그래.”

무료, 무료.
어딜 가나 무료 상담뿐이다.
차라리 돈을 쥐여주고서라도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법원 내부에 마련된 국선 변호사의 상담은 이미 기다리는 인파로 한가득이었다.
…로펌에 의뢰를 해야할까.
돈은, 충분하다.
그렇지만 이런 의뢰를 로펌에서 받아 주기나 하는 것일까.
그것이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째서인지 아까 본, 그 경찰서의, 동사무소의, 변호사의 표정이… 자꾸만 생각나서.

“저기로 가자니까요.”
“…알았어.”

다음으로 들린 곳은 아까보다는 작은 규모의 사무실. 데스크를 보는 직원도 없이 냉철해 보이는, 안경을 낀 남성이 자판을 두드리며 혼자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상담하러 왔습니다만....”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접근금지 신청을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다행히 아까의  중년 변호사와는 다르게  사내는 일체의 감정도 없이 사무적으로 일을 처리해나갔다.

“신청하시고 싶은 대상은요?”
“…여기 있는 이 4명의 여자들입니다.”
“아아…네, 확인했습니다. 여기 간단하게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적어 주시고요. 신청자분의 정보도….”

변호사가  양식에 맞춰, 필요한 정보들을 쓱쓱 적어나간다.

“신청 취지 및 신청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스토킹 피해를 당하고있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해당 인물들 중 가족 관계이신 분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연인 관계이신 분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혼인이나 사실혼 관계였던 분이 계십니까?”
“없습…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괜찮습니다.”

심문과도 같은 대화의 핑퐁을 이어가던 나는 문득 의문이 생겨 말을 꺼냈다.

“…그, 요 1년간 집을 구하지 않고  4명의 집에 돌아가면서 숙식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건 사실혼 관계로 봐야하는 건지, 여쭤보고 싶습니다만.”
“음, 동일한 주소로 주민등록이 되어 있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실혼 관계로 보기에는 조금 어려울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실혼 관계를 판단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근거가 있긴 합니다만, 서로 결혼할 마음, 즉 혼인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데 말씀해주신 바로는 그런 관계는 전혀….”
“…그렇습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이제 피해 사실에 대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녀들과 나의.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마음속 어딘가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랬더니 꼭 쥐고 있던 주먹이, 다시 떨리기 시작하면서.

“퇴사한 뒤로 일상생활에 방해가 될 정도로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해당 문자를 볼 수 있을까요?”

변호사의 말을 듣자마자 여름이가 내 가방에서 예전에 쓰던 스마트폰을 꺼내 내게 건냈다.  날, 그녀들의 문자 폭탄에 호되게 당한 이후로 비상시를 대비하여 가방 안에 예전 휴대폰을 넣고 다녔던 것이 도움이 될 줄이야.

“여기 있습니다.”
“아아, 확인했습니다.혹시 이것 말고 좀 더 직설적인 협박 메시지를 받으신 적은 없으십니까? 그,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죽이겠다든지, 죽이고 싶다…같은.”
“…메시지는 이것들이 전부입니다.”
“그렇군요…혹시 이 문자 메시지로 인해 어느 기간동안 피해를 받으셨는 지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하루입니다.”
“혹시 지금 계속해서 오고 있다거나, 하신건.”
“그날 이후로 저런 문자를 받아본 적은 없었습니다.”
“음.”

방금 전까지 거침없이 타이핑을 해가며 질문을 하던 변호사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진다.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그 외에 피해사실이  있으신지….”
“여기, 이 녹취록이….”
“잠시만요. 음, 확인했습니다. 해당 목소리가 어떤인물인지도 알  있겠습니까?”
“유가련이라는 인물입니다.”
“알겠습니다. 상담이 끝난 뒤에 근처에 있는 속기 사무실에서 녹취서를 작성하셔야 법정 증거물로서 인정된다는 점 알아두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이후 한참 동안을 자판을 두들기다 마무리한 듯한 변호사는 그리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 의뢰는 이 유가련이라는 사람에 대한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 것으로….”
“…잠시만요, 그 여자 하나입니까?”
“몹시 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혹시 다른 여성분에게 당한 피해가  있으신지요. 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만.”

나는,
 여자들에게,
채설하에게 매일매일 욕설과 인격적 모독을 당하고 매일 밤, 손발이 구속당한  잠을 청해야만 했다.
이다솜에게는 내 인격을 부정당하고 모든 것을 그녀의 의지대로 제한당하고 사육돼야 했다.
오민서에게는…그 기분 나쁜 눈동자와 손길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그것들이 자꾸만. 피하고 싶어도 계속해서 달라붙어서.

애당초.

“…채설하의 집에서잠을 잘 때 그녀에 의해 손발을 구속당했었습니다. 아니, 애초에 저는  사람들의 집에서 자고 싶지 않았는데 억지로.”
“혹시 그에 대한 협박 문자나 녹취 자료 등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다못해 그, 상해를 입으셨다거나….”
“…”

그녀들은, 그런 협박 따위 한 마디도 하지도… 보내지도 않았었지.
구두로 조금 잔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폭행 따위도, 전혀.


나는 왜,
나는  협박도 당하지 않았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스스로 그녀들의 집에 들어간 거지?

왜,
왜 그녀들의 관계를 유지한 거지?

나는…
나는.

나는, 왜 그날 이후로도 영화 동아리를 탈퇴하지 않고 그녀들과의 관계를 유지한 거지?
아니, 그녀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녀들에게 실망했지만 언젠가는.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 믿고…

그래서 괴로움도 참아가며 탕비실의 커피 자국을 닦고, 그녀들의 시중을 들어주고, 인격적 모독을 참아내고, 좋아하는 영화 한 편도 못본 채로, 내가 좋아했던 프라모델이쓰레기통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도, 거부했던 그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도, 나에 대해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것도, 성범죄자 취급을 당하는 것도, 침대에서 손발을 구속당한 것도,  진심을 무시당한 것도, 장난 취급당한 것도, 날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한 것도.

전부 참았는데.


내가 이상한 건가?
그렇지 않다면 이치에 맞지 않잖아.
그렇다면, 오늘 그 사람들이 날 그렇게 볼 이유가 없는 거잖아.
전부 내 잘못인가?
전부.

그렇다면 그녀들은.
아니, 그렇다면 나는  그녀들과 있으면 그리도 괴로웠던 거지.
정말로, 내가 이상해서?
내가 미쳐버려서?

전부,  선택이었잖아.
그렇다면 나는.

나는 뭘.
여기서  하고 있는 거지.

여기 왜 왔더라?
나는….



왜, 퇴사했지?





“아저씨!”
“어, 어…”

 아이의, 여름이의 목소리가 나를 건져낸다.

“…배고파요. 빨리 끝내고 밥이나 먹으러 가요.”
“…그래.”

지금은…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착수금은 안내해드린 계좌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성벽 밖으로 나오고 싶어 퇴사를 했었다.

“아까 보니까 부대찌개 집 있던데 거기나 가요. 되게 맛있어 보이던데.”
“…”
“아저씨?”

그런데 어째서인지, 회사를 나왔는데도 더 높은 성벽이 하늘을 가로막고있는 기분이 들어서.

“가자.”
“…네.”

그것이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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