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17. 동상이몽 (1)
어딘가를 달리고 있었다.
조금 울퉁불퉁하고, 주변에는 길게 뻗은 나무들이 자라 있는…
가끔 내 키만큼 자란 잡초 덩어리들이 때때로 팔과 다리를 스치는,
그런 곳이었다.
하늘에서는 하얀색의 덩어리, 그러니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떨어지던 그 조각들은, 어느새 나를 덮을 것처럼 새하얗게 내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그런 곳을 달리고 있었다.
저기, 잠깐만 멈춰봐.
나는 너를 도와주려는 거야.
달리고, 달리고, 달렸는데도 쫓고 있는 것과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사방에서 떨어지는 눈이 시야를, 방향감각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흔들리는 나뭇잎이, 군데군데 튀어나온 나뭇가지가 팔과 다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들이 의지를 갖추고 나를 막으려는 것처럼.
잠깐만, 왜 도망가는 거야.
나는 정말로 너를 도와주려고…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어째서 다들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눈(雪), 눈(目).
눈이 너무 많다.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눈이….
저기, 대답해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왜 매번 이렇게 되는 거야?
나는 정말로…
“―저씨….”
정말로.
“―저씨, 일어나서 밥….”
내 마음을 그대로 전했을 뿐인데….
왜 항상.
“언제까지 누워만 있을 거예요!”
“어, 으…?”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높은음의 여자 목소리가 내 귀를 찢을 것 같이 파고든다. 곧이어 미세한 바람과 함께 온몸에 가벼운 한기가 스며든다. 그 불쾌한 감각에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주변 상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뭐야.”
덮고 있던 이불이 접혀 있는 채로 방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자기 전에 꼭 닫아 두는 오피스텔의 창문도 활짝 열려있고…저것들 때문에 갑자기 추웠던 걸까.
…머리 아파.
방금 전까지 푹 자고 있었을 텐데도 어째서인지 피곤은 조금도 가시지 않은 채 머리는 가벼운 두통을 호소하고 있었고 눈꺼풀은 무게추라도 매달아 놓은 것처럼 축축 처지고 따가웠다. 오직 코만이 어딘 가에서 흘러나오는 구수하고 담백한 내음을 감지하며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으….”
“잠 좀 깨셨어요?”
앉아서 벽에 기댄 채로 상황을 확인하고 있던 나에게 정돈이 안된 듯한 삐죽삐죽한 머리카락이 돋보이는 소녀, 여름이는 쭈그려 앉아 나와 시선을 맞추고넌지시 말을 건넨다.
그렇게 그 아이의, 폐사한 진주알처럼 탁하고 빛 하나 들지 않는 눈동자가 내 시선에 들어온다.
어딘가 익숙한….
…생각해보면 찜질방에서 홀린 듯 저 아이를 데려온 것도 저 눈 때문이었지.
그러나 어쩐지 오늘은 저 눈과 마주치는 게 조금 껄끄러운 느낌이 들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지금, 몇 시….”
“벌써 해가 중천이거든요. 어디보자, 12시 조금 넘었네.”
12시…?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자고 있었던 걸까.
퇴사하기 전에는 평일은 6시 기상, 주말에도 8시까지는 일어났었는데…무엇보다 그렇게나 오래 잤는데도 피로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는 것이, 특히 눈가 주변이 따끔거리는 것이 신경 쓰였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이해는 하는데요, 최소한 밥은 먹고 주무시든지 하세요.”
그런 일…?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가?
멍하니 생각을 하던 와중 오피스텔의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티비가 눈에 들어왔다.
아, 그래.
어제는 저 새로 산 티비로 채널을 돌리다가,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발견해서.
그래서 그걸 봤었지.
그리고,
그리고…
…
아.
“아저씨, 여기, 이 상자 좀 저기에 놔주세요.”
여름이가 손짓하는 곳에 있는 것은 지난번, 마트에 들렀을 때 산 물품들을 한 번에 담기 위해 썼던, 1층의 셀프 포장 코너에 비치되어 있던 종이 박스. 한 거대 제과 브랜드의 유명 과자의 상표가 적혀 있는 그 상자는 군데군데 테이프로 감싸져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이게 뭐야?”
“밥상 대용으로 쓰려고요. 아직 못 샀으니까.”
밥상.
그러고보니 밥상을 사지 않긴 했었다.
퇴사한 이후로는 줄곧 밖에서 사 먹기만 했으니까 딱히 살 이유도 없었고.
“갑자기 이건 왜? 그냥 밖에서 사 먹으면….”
“아저씨가 하도 안 일어나시길래 저 혼자 먹고 왔어요. 식당에 둘이서 갔는데 아저씨 혼자만 시키면 뭔가 좀…그럴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근처에 식자재 마트도 있겠다 대충 사서 만들어 봤어요.”
“뭐? 그냥 나 혼자 갔다 오면 되잖아. 아니면 배달을….”
“…식칼이나 도마가 제대로 드나 테스트할 겸 만들어본 거라고요. 먹어요, 그냥.”
굳이 번거롭게 일이나 만들고.
…사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그 구수한 냄새에 남몰래 입맛을 다시고 있는 내가 있었다. 요 1주일간은 자극적인 배달 음식이나 식당 음식만 사 먹어서 그런 것일까,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담백한향을 조금씩 흘리고 있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원래는 밥도 하려고 했는데 쌀이 워낙 무거운 데다가 배달시키면 저녁에나 온다고 해서 그냥 즉석밥만 사 왔어요.”
“네 거는?”
“저는 배 안 고프다니까요. 그냥 테스트할 겸 아저씨 것만 조금 만들어 본 거예요.”
된장찌개를 가스 레인지에서 상자로 만든 조잡한 밥상으로 옮길 때쯤, 여름이가 전자 레인지에서 즉석밥을 꺼내며 그렇게 말했다.
“차린 건 없지만, 드세요.”
“아, 응.”
숟가락을 들어 국을 뜨자 여름이는 그대로 반대편으로 가 감시하는 듯 조용히 내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색하다.
국을 뜨면서도 어젯밤 이 아이의 앞에서 부렸던 추태들이 자꾸만 생각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아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었다.
“그, 왜?”
“아니, 맛이 어떤가 싶어서요.”
그냥, 맨날 하는 것처럼 방 어딘가에 기대 휴대폰이나 만지면서 시간이나 때울 것이지, 뭐가 그리 궁금하다고.
“…맛 있, 맛있어. 맛있네. 음.”
“…말은 왜 더듬어요?”
“뭐, 뭐가.”
평소처럼 말하고 싶은데.
어째서인지 입에 담으려고 하면 혀가 자꾸만 엉키는 것이었다.
“어젯밤 일 때문에 그런 거면 신경 안 써도 돼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어젯밤이 뭐.”
“아저씨 울었잖아요.”
“…”
잊어줬으면 했는데.
오히려 저 아이가 저렇게나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뭐 사람이 살다 보면 울 수도 있는 거죠.”
“그건, 영화가 슬퍼서 그랬던 거야….”
“…그걸 보고서요? 아니 전 진짜로 신경 안 쓰니까…푸흡, 아, 생각하니까 또 웃기네.”
“네가 그 영화를 제대로 안 봐서 그래. 얼마나 비극적인 내용….”
“그, 그게요? 흐읍, 읍…푸하하하!”
그러면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깔깔거리면서 비웃는 여름이.
얼마 만이었더라. 그 영화를 보고 저런 식으로 깔깔 거리는 사람을 본 것은….
“아, 아저씨, 푸흡, 음. 화났어요? 죄, 으음…죄송하다니까요. 으읍, 읍.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하아….”
잠시 숟가락을 뜨는 것을 중지하고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긴 내 등 뒤로 웃음을 애써 참으며 사과하는 여름이의 가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말이지 배려라고는 조금도 없는 아이구나. 그 웃음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싱크대 옆에 비치해 둔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찬장에서 작은 그릇 하나를 꺼냈다.
“한 그릇 더 드시게요? 하나밖에 안 사 왔는데…편의점이라도 갔다 올까요?”
“그런 거 아니야.”
“네?”
뭐, 아무리 비웃더라도 영화 이야기는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너도 먹으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직 손조차 대지 않은 즉석밥의 반절을 퍼서 작은 그릇에 담아 여름이 쪽으로 넘겼다.
“어, 저 먹고 왔다니까요.”
“그냥 먹어.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 다 들리니까.”
“…”
고개를 숙이고 배를 움켜쥐는 그 아이의 모습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잘 된 것 같아, 된장찌개.”
“…제가 만든 거지만 맛있긴 하네요.”
잠에서 깨자마자 어디선가 들려오는 보글보글 끓는 소리.
가스 레인지의 불길로 따뜻한 기운이 맴돌고 있는 주방.
“리모컨이 거기 있나?”
“어, 잠시만요. 찾았다. 몇 번 채널인데요?”
누군가가 나를 위해 만들어 준 요리.
“11번.”
“지금 시간이면 뉴스 안 할 걸요? 24번 틀게요 그냥.”
서로의 목소리가 오가는 식탁.
“아니, 출발 블루레이 여행 보려고 했던 건데.”
“와, 그거 진짜 오랜만에 들어보네요…아직까지도 하고 있었구나.”
박스로 대충 만든 조잡한 식탁에 두부와 파 정도만 들어간 된장찌개, 그리고 즉석밥.
요 1주일간 먹은 음식 중 가장 부실한 식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건만,
그 맛이 이 3년간 먹어왔던 어떤 것보다도 맛있게 느껴지는 건 비단 나만의 착각은 아니리라.
그래,
나는.
조금도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
“…”
“…”
돌돌 말아 올려놓은 블라인드가 돋보이는 유리 창문을 통해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오고 있는 한 사무실, 근래 들어 보기 힘들어진 먼지 한 톨 없는 쾌청한 날씨였건만 그와 대조적으로 그곳의 풍경은 타닥타닥 거리는 자판 소리와 이따금 들리는 딸깍거리는 건조한 소리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련아, 보내준 거 테스트해보고 있는데 여기가 조금.”
“…아, 네. 메일로 정리해서 보내주시면 고칠게요.”
드문드문 자판 소리에 섞여 사람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것은 매우 사무적이었고 경직되어 있었으며 사무실의 살풍경한 인상만을 더 할 뿐이었다.
“설하야—…테스트 다 끝나면 내가 보낸 메일도 확인해줘—….”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봐.”
설하라 불린 여인은 새로운 버전의 자사 앱을 시연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마우스를 조작해 이메일 함을 열었다. 그랬더니 그곳에는 조금 전, 민서가 확인해 달라고 보냈던 메일 위에 금방 온 듯한 새로운 메일이 도착해 있는 것이었다.
발송인은, 후챈 기획.
어딘가 들어본 듯한 이름의 회사였지만 요 근래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앱에 추가할 새로운 기능의 테스트, 각종 강연, 로드맵과 같은 회사 전반에 대한 계획 수립까지 말그대로 쉴틈없이 달려온 탓인지, 무엇 때문에 이 회사와 교류를 한 것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확인을 해보니 그것은 한 마케팅 계획과 관련된 이메일로, 참조(CC) 기능 때문에 설하의 메일함에 와 있었을 뿐 그것의 실질적인 목적지는 계약 전반을 담당하고 있는 다솜의 메일함이었다.
그렇다. 설하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몰랐다.
모르고 싶었다.
후챈 기획이라는 이름을 가진 회사도, 확정된 디자인도, 배포할 포털 사이트의 대상과 이유도, 메일 아래에 첨부되어 있는 한 사람의 이름도.
자신은 모르는 일이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누군가 대충 처리를 한 뒤 나에게 결재를 요청하는 메일 정도만 보내주기를 원했다.
그렇게 한다면 그냥 허가한다는 내용만 보내면 해결되는 이야기였으니까.
“…다솜이 언니.”
“응, 왜?”
그래서 설하는 다솜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던 것이다.
“메일, 확인해주실래요.”
“응, 잠깐만. 이것만 끝내고 바로 확인할게.”
다솜은 그녀가 현재 처리하고 있는 간단한 문서작업을 끝내고 메일을 확인하겠다고, 그렇게 설하에게 답변을 했다. 정말로 잠깐의 시간,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설하에게 있어서 이 메일은 1분 1초라도 빨리 처리하고 휴지통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골칫거리에 불과했다.
“…그건 이따가 해도 되니까 빨리 이것부터 좀.”
“…어디에서 온 건데 그러니.”
“후챈, 기획이요.”
조금씩 오고 가던 대화의 랠리가 중단되고 잠시동안 정적이 흐른다. 그 정적을 가리려는 듯 사무실 안의 타자 소리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몰라.”
“네?”
“모르는 곳이야.”
모른다, 라고 이다솜은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리 말했다. 컴퓨터의 미세한 불빛만이 그녀의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있었지만 동공 안쪽은 마치 모든 접근을 거부하는 동굴과도 같이 깊고 어두웠다.
“언니가 답장을 안 해 주셔서 다시 한번 메일을 보낸 모양이에요. 빨리 좀, 처리해주세요.”
“…정말로 모르는 회사라니까. 거슬리면 스팸 메일함에라도 넣어버리지 그러니? 설하야, 내가 지금 많이 바빠서 말이야… 그런 스팸메일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라서.”
설하의 요청을 다솜은 다시 한번 끊어낸다.
스팸메일.
그 소리를 듣자마자 설하는 마음속 어딘가에서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언니가 진행하시던 계약이잖아요.”
“그러니까 모른다고.”
“…적당히 좀 하세요. 우리 회사를 온라인에 어떻게 홍보할지 이 회사랑 이야기를 나누신 거 맞잖아요. 그래요. 그날, 도진이가 가져온….”
사무실 안의 타자소리가 일제히 멈춘다.
이제 사무실에는 천장에 설치해 둔 에어컨에서 나오는 바람 소리만이 유일한 청각 정보를 제시해주고 있었다. 사락사락, 시간이라도 멈춘 듯한 그곳에서 네 여자들의 머리카락이 일렁였다.
“…”
“…”
설하의 매끄러운 목덜미를 타고 땀방울 하나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실내의 온도는 22도, 분명 더위를 느낄 정도의 온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땀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들이줄곧 피해오던, 생각하기를 거부하던 현실.
설하의 한마디는 꾸깃꾸깃 접어 탕비실 한 구석에 던져 놓은 그 현실을 다시 꺼내어 구현해 내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