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화 〉18. 동상이몽 (2) (18/21)



〈 18화 〉18. 동상이몽 (2)

“…사표, 수리하실거에요?”
“뭐가.”
“형이 내신 사표, 수리하실 거냐고요.”

이틀 전, 유도진이라는 사내가 냈던, 사직의 의사를 내포한 한 장의 종이. 네 사람이 열심히 준비한 파티장은 그 종이 쪼가리 하나만으로 순식간에 장례식장과 같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수리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아이, 도진이가 회사를 떠나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설하는 지난주에 그가 제출한 사직서를 즉시 파쇄기를 이용해 갈아버리고 그 조각마저도 한 번  갈고 가위질해 흔적도 남지 않을 정도로 산산조각을 낸 뒤 건물 옥상에 비치된 흡연구역에서 태워버린 것이다.

그걸로 모든  해결됐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비정하게도 세상에서 지워버렸을 그 한 장의 종이를 설하의 얼굴에 다시 한번 들이미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사직서를 낸 이상 그걸 막을 방법은 없어. 설령 내가 수리를 거부한다 한들….”
“그래서 수리하신다는 거네요.
“…그래.”
“허.”

형광등의 빛을 머금어 조금 빛이 나는 아름다운 은발의 머리카락과 이국적인 외모가 돋보이는 여인, 가련은 어이없다는 듯 눈을 찌푸린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줌의 숨에 불과하건만, 설하에게 있어서  숨은 마치 날카로운 칼과 같이 몸 안으로 파고들어 그녀의 안쪽을 사정없이 찔러 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그 아이, 도진의 퇴사가 자신의 탓이라고 책망하는 것처럼.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됐는데? 사직서를 빼앗아서 다시 파쇄기에 갈아버리기라도 했어야 할까? 그 새끼가 나가지 못하도록 사무실 문을 잠그기라도 했어야 할까?”
“…염치라는 것도 없으신가 보네요. 언니는, 여전히.”
“뭐?”

염치(廉恥).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설하는 자신이 왜 그런 이야기를 가련에게 들어야 하는지 조금도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그래, 적어도 저 아이에게 그럴 이야기를 들을 처지는 아니었다.

“지금 탓이라는 거야?”
“글쎄요. 언니가 형한테  짓을  생각해보면 아실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허, 너야 말로 형, 형. 아주 지겹지도 않나 보구나?  새끼가 했던 말은 벌써 까먹었나 보지? 그런 식으로 자꾸 거리를 두니까  아이가….”
“…내가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된 건데….”
“자, 잠깐. 애들아.”

초여름의 날씨건만 끝을 모르고 차갑게 식어만 가는 사무실의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깨려는 듯, 다솜은 황급히 자리에서 뛰쳐나와 서로를 책망하고 있는 두 여자의 사이에 끼어 들어갔다.

“조금만 진정하고….”
“언니가 그럴 말씀을 하실 처지는 아니죠.”
“프라모델도 버려, 영화도 못 보게 해. 도대체  그런 짓을 하신 건데요?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서… 그래놓고 진정하라고요? 허….”
“…너희들이 뭘 아는데.”

두 사람 사이에 스펀지처럼 끼어 새어 나오는 분노를 받아내던 다솜은 순식간에 그 허용 용량을 초과한 것 마냥 어느새  자신조차도 부정적인 감정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너희들이  아이와 나에 대해  아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적어도 언니보다는 더 잘 알 걸요.”
“가련아, 아까부터 네 말만 들어보면 너는 아무 잘못도 없는 것처럼 들리는데 내 착각인가 싶어, 응? 항상 그런 식으로 착한 척만 하면 기분 좋아?도진이 앞에서도 항상….”
“…난.”

누군가 말을 꺼내면 공격당하고 그 공격한 사람을 다시 말이라는 이름의 비수로 찔러 내려간다. 그런 점에서 지금 사무실 안의 상황은 중세시대의, 유혈과 선혈이 낭자하는 투기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 번 누군가를 겨누기 시작한 그 칼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휘둘리고 있었다.

“푸흡―…”

그 소란을 멈춘 것은,  목소리.

“푸흡―…푸하하하하―….”

달팽이처럼 느릿느릿하면서도 어딘가 음습하고 가시가 서려 있는 듯한….
지금까지 질리도록 들어온 목소리일 텐데, 어딘가 섬뜩한 분위기에  사람은 칼질을 멈추고 우뚝 서서 목소리의 발원지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뭔데요.”
“아니―…미안…웃겨서―…푸흡….”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소리의 발원지, 오민서의 박장대소는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고요한 사무실에 그녀의 웃음소리만이 조금씩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지경이 돼서도…아직까지도 남 탓만 하는구나―…정말이지, 너희들은….”
“…그래서, 너는 결백하다고?”
“푸흡―…아―…정말… 나는  잘못이 없다고는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애초에  모든걸 시작한 건…!”


어떤 일이 일어나던 항상 느긋하고 여유로우면서도 속내를 조금도 짐작할  없는 여자.
그것이 뮤지엄의 다른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오민서라는 여인에 대한 인상이었다.
교제한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건만.

“그 아이는…우리가 싫어서 떠난 거야―… 누구 한 명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싫어서―… 너희들이 아무리 책임을 남에게 돌리려고 해봤자…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





“도진이는, 돌아오지 않아ㅡ….”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설하는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떠나기로 했다. 오늘은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만큼 남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넝마 짝이 되어버린 마음은, 이제 한계였다.

“레드로 하나 주세요.”
“죄송한데,그, 신분증을 보여주셔야 구매가 되거든요.”
“…네.”

27살.
많다면 많은 나이이고 적다면 적은 나이이겠지만 적어도 담배를 구매할 수 있는 나이는 옛 저녁에 지나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작은 담배 한 갑을 구매하기 위해서 저,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를 버텨내며 매번 지갑에서 번거롭게 주민등록증을 주섬주섬 꺼내 제시해야하는 것이었다.

“조금만, 옆으로….”
“잠시만요, 나갈게요.”

건물 근처에 마련된 흡연자 전용 부스는 이미 점심을 먹고 담배 한 개비를 피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인해 만석이 된  오래였다.  너구리 굴과도 같은 한심한 풍경은 모두 담배 냄새가 없는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시가 도입한 법이 원인이었다.

지정된 장소 외에서 흡연을 하면 벌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천장이 누렇게 변한 작은 굴로 들어가 저렇게나 간절하게, 그리고 한심하게 작은 종이 쪼가리를 빨아대고 있는 것이었다.

한심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채설하는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의 기분이 얼마나 절실한지 아주  알고 있었다. 아주 조금의 자리만 남았어도, 설하 또한  마리의 너구리가 되어 저 굴 안으로 들어가서 종이 쪼가리를 꼬나물고 있었을 것이다.

“후우….”

그 이후로도 흡연 부스를 전전하던 설하는 결국 통짜 유리회전문을 낑낑거리며 밀고 회사가 입주해 있는 건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향했다. 자살이나 낙상과 같은 불미스러운 사고를 막기 위해 천장을 제외한 사방이 거대한벽으로 막혀 개방감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그 곳은 작은 의자가 있고 흡연이 허용된다는 포스터가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군데군데 청소를 하지 않아 눌러 붙은 가래침 따위를 신경 쓸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았기에.

그녀는 그렇게 의자에 앉아 담배  개비를 입에 꼬나물고 매캐한 연기를  안 가득 머금었다가 다시 뱉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이, 도진이가 금연할 것을 권유해 요 몇 년간은  근처에 가져다 대지도 않았건만 오늘만큼은 이 짓거리를 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버틸 수가 없는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다.
미성년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직까지도  되어 보이는 티를 벗지 못한 동안의 얼굴로 담배를 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우스워보였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고민을, 생각을, 현실을 연기와 함께 날려 보내려는 듯 채설하는 강박적으로 숨을 내쉬었지만 잡념은 가시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바라봐도, 자신이 내 뿜은 매캐한 연기만이 자욱할 뿐이었다.

“…”

유도진이 두 번째 사직서를 제출하고 회사를 떠날 때, 그녀가 느꼈던 감정은 당혹스러움과  모든 과정을 일단 멈춰야 한다는 다급함이었다.
그렇기에 넘어지는 것 따위도 신경 쓰지 않고 도진의 바지 가랑이를 붙잡았던 것이고 모처럼  비싼 하이힐이 부러지는 것을 감수하면서 계단을 달려 나가 그를 불러 세웠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도진은 간절한 그녀를 향해 뒤돌아보지도 않고 매정하게 떠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그곳에 주저앉은 채 있다가 동료들의 손에 이끌려 처참한 몰골로 사무실에 들어와 머리를 조금 식히고 그녀가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그렇다, 자신은 또다시 유도진에 의해 배신당한 것이다.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며 마음 속에 깊이 묻어둔 과거의 케케묵은 감정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항상 유도진을 잡는 것은 그녀였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배신하고 상처 입히건, 그녀는 그것을 용서하고 그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오고 자신의 마음을 억눌러왔다.

확실히 근래도진에게는 초조하고 답답한 마음에 조금 심하게 대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면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관계를 개선하려 했으면 되는 문제 아닌가. 왜 참고만 있다가 자기 혼자 화내고, 이렇게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것인지 그녀는 도진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없는 것이었다.

몇 년을 함께 해온 최고의 친구이자 이해자이건만, 지금의 도진의 마음은 조금도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그날, 도진에게 배신당한 이후로도 줄곧 참고,  참아오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도 모른 채 자기가 서운하다는 이유로 관계의 단절을 선언한 그에게 이글거리는 분노의 칼날을 겨누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지극히 타당하리라.

하지만 이 마음은 그에게 닿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은 언제나 을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자각한 것만으로도, 깊은 자괴감과 비참함이 그녀의 마음속을 침식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가라.

더 이상 그 남자 때문에 고민하는 것도 싫었고 비참해지는 것도 싫었다. 차라리 잘 됐는지도 모른다. 그  같은 남자는 잊어버리고 이제부터 새 출발을 하면 된다, 라고 그녀는 입 안의 담배를 조금 더 세게 물면서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한 것 따위는 조금도 없는데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걸까.
그래, 그딴 자식 따위는….

“아―…여기 있었네―….”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종이 쪼가리를 태우던 와중, 끼이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옥상으로 통하는,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조금 녹슨 철문이 열리며 지금 이렇게 채설하가 담배를 피우게 만든 원흉, 오민서가 싱긋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남의 속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듯한 태도.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담배―…끊은 것 아니였어…?”
“…뭔데.”
“아―…조금 이야기하고싶은 게 있어서….”

오랫동안 교제를 이어왔지만, 이렇게 오민서가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대화를 권유해 오는 것은 채설하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놀라운 광경이었다.

“도진, 아니 그 새끼 이야기를 하는 거면 이제 됐어. 내 알 바 아니라고.”
“으음―…그렇구나…그럼 다른 사람한테 말해주러 가야겠다―….”
“…뭐?”
“응…? 관심 없다며…?”

오민서가 하려는 말이 유도진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은, 충분히 추측할  있었다.
…그런 남자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뒤에 붙은 ‘다른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거슬렸기에 채설하는 오민서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일단 말해봐.”
“아하…알았어―…대단한 건 아니고…도진이랑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어떻게  건가 해서―…”

핀을 꼽고, 웨이브를 조금  그 갈색의 머리를 쓰다 올리며 오민서는 담담하게 그런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근데, 너가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그냥 다른 애들한테도 물어보게―….”

날 또 다시 배신한 남자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는 새 출발을 할 거야.
다 끝난 이야기야.
그래, 전부.
그날 전부 끝났어야 할….
나는,
나는…
나는 더 이상 을이 되지 않을 거야.

그녀의 머리와 이성은 올바르게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 팔이, 가슴이, 말은 그와 대조되듯….

“…어디야….”
“응…?”
“어디야, 어디로 가야 하냐구. 응? 어디서 찾은 건데? 말을 해. 말만 해줘. 그러니까.”
“아―…깜짝이야…아파, 설하야….”

설하의 팔은  어느때보다 강한 힘으로 민서의 가느다란 팔을꽈악 쥐고 있었다.
말은, 호흡은 다급해졌다.

“그래서…만나고 싶다는 거야…? 아니면….”
“만날게. 만난다고. 만나고 싶어. 그러니까 빨리.”

설하의 대답을 듣고 만족했다는 듯이 미소 짓는 민서는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글쎄…그냥  말해주는 건 재미없으니까―…”
“뭐…?”
“조금, 힌트를 줄 테니까…잘 찾아봐―…”
“…지금, 뭐 하자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수수께끼를 푸는 놀이라도 하자는 것일까.
채설하는 어이가 없다는  오민서를 바라보며 조금의 푸념을 입에 담았다.
대답을 들은 오민서는, 어째서인지 입꼬리를 한층 더 올리더니….

“싫으면, 말고….”

그녀는 마치 마녀와도 같이 그렇게 제안하는 것이었다.
결코 거부할  없는 제안을….

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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